가을 운동회? 마을 운동회! (1)
한강 표면에 부딪혀 부서진 빛이 드는 곳.
직각을 사랑하는 여느 빌딩과 달리, 부드러운 곡선의 거실을 가진 고급빌라 안.
따뜻한 베이지 톤의 색상이 돋보이는 거실에는, 한 여자가 양털처럼 보드라울 것 같은 베이지색 소파에 엎어져 있었다.
“으음.”
안방에 있는 킹사이즈보다 더 넓은 소파에서 자는 게 요즘 아라의 취미였다.
-지잉
아라가 소파에서 비적비적 일어나, 팔을 높이 뻗어 밤새 눌렸던 팔을 늘려주자, 아라의 상황을 항상 귀신같이 꿰고 있는 매니저에게서 온 전화가 울렸다.
“하암. 어어어. 나 일어났어-.”
쩌억.
느릿하게 핸드폰으로 손을 뻗은 아라는, 눈을 비비며 입을 크게 벌려 모자란 공기를 보충했다.
[입 찢어지겠다. 주름 생기기 전에 입 닫자.]
귀신같은 매니저.
CCTV를 달아놓았는지 항상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
시원하게 벌린 입을 닫은 아라는 괜히 입술을 문질렀다.
“진짜 CCTV 안 달았지?”
[그거 달았다가, 내 목숨은 누가 책임질까, 아라야?]
“흠···. 오케이. 믿어주지.”
[됐다. 자르던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맛있는 거 쏜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멍한 상태였던 아라는, 그만둔다는 매니저의 뉘앙스에 반쯤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전에도 바빴지만, 날이 슬슬 따뜻해진 요즘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모든 걸 아슬아슬 하지만, 완벽하게 끼워 맞추고 있는 매니저를 잃으면 아라도, 매니저도, 회사도 망한다.
매니저는 왜 망하냐고 물으신다면, 매니저를 잃어 하루하루 피골이 상접해가는 아라를 발견한 팬들에 의해서···. 라고 할 수 있겠다.
[...쏜다고? 뭐로?]
오케이.
큰 덩치만큼이나 먹성 좋은 매니저가 미끼를 물었다.
“아유. 여부가 있겠습니까? 매니저 오빠님이 원하시는 모든 메뉴를 저는 제공해 드릴 의무가 있는걸요.”
[진짜지?]
“어! 이번엔 진짜! 나 빼고 먹어도 돼! 내가 아예 카드를 주면 될까?”
[....어. 알았어. 네 꺼는 포장해서 줄게.]
오케이.
이 덩치 큰 매니저가 드디어 삐죽 솟았던 눈썹을 내렸다.
지난번에도 맛있는걸 사 주겠다고 했다가, 스케줄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하여간 매니저는 기억력도 좋고, 일도 잘하고, 먹을 것도 좋아하고···.
“뭐 먹을 거야?”
자신이 없어도 얼마든지 맛있는 걸 사 먹으라고는 했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카드를 주었으니,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된다!
[음. 지금 고민 중이야. 촬영장 앞에 새로 생겼다는 샤브샤브 집에 갈지, 오랜만에 네 카드 받는 거니까 아주 비싼 대게를 배터지게 먹을까···.]
“매, 매니저 오빠?”
[...아니면, 미화리 마을 사람들처럼 투 뿔 한우를 먹을까?]
자신을 빼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대게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아라에게 선택지는 몇 없었다.
“투뿔한우? 한우!!”
야채는 매일 다이어트를 한다고 먹으니, 샤브샤브는 절대 당기지 않았고, 대게는 예전에 자유롭게 먹게 했다가 회식비만 몇백이 나왔었다. 한우라면, 일정이 조금 늦게 끝나도 달려가 먹을 수 있을뿐더러, 단백질 보충이라 하고 먹으면 다른 음식보다는 더 많이 먹을 수도 있으니.
[오케이. 한우. 30분 뒤면 도착하니까 준비하고 있어.]
“오케이···! 헐?”
[무슨 일이야?]
매니저는 잘 대답하다 말고 갑자기 놀라는 소리를 내는 아라에 황급히 물었다.
또 넘어진 건 아니겠지?
아냐. 그러기엔 부딪치는 소리가 안 났는데?
설마···. 스토커가 침입한 건 아니겠지?
아라가 대답을 할 때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액셀을 거세게 밟으려 할 때였다.
매니저가 온갖 걱정을 다 하게 만든 아라의 목소리가 다시금 스피커를 통해 전해졌다.
“오빠! 내가 지금 TV에서 이상한 걸 봤는데 말이야···.”
한 톤 낮아진 목소리.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매니저는 안다. 깨발랄의 대명사인 아라의 목소리가 낮아진다는 건, 무언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소리.
스케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아라의 기분은 굉장히 중요했다.
[뭘 봤는데? 뭐야? 또 누가 네 성대모사 해? 아니면 무대에서 삑사리 낸 거 방송하고 있어? 아니야? 그럼···. 누가 너 중학교 때 사진 오픈했어? 쓰읍. 근데 이건 우리 회사에서 업체 통해서 다 지웠는데···.]
허.
아라는 매니저에게서 들려오는 끝없는 자신의 흑역사에 머리가 띵해져 옴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TV에서 방영되는 방송을 보면서 배신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아직까지 자신의 흑역사를 읊어대는 매니저의 멈추지 않은 목소리에 아라는 이마를 짚었다.
“아니 그거 말고···! 이 피디님 새로운 예능이 지금 TV에 방영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으응?]
“모른 척 하지 말고! 내가 분명히 이 피디님 새로운 예능 들어가면 나 좀 어필해 달라고 분명히 부탁했던 거 같은데···.”
그렇다.
잠을 깨기 위해 매니저와 통화하며 무심코 켠 TV에서 이박복 피디의 새로운 예능이 방영되고 있는걸 아라가 발견 한 것이다.
“메인이 장 이장님이시네···? 첫 방송으로 미화리 마을을 갔어? 어머. 웬일이야! 저녁도 같이 먹네? 호호호.”
차라리 그냥 화를 내라.
여성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는 아라의 목소리에 매니저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그게···. 네가 지금 바쁘잖아? 드라마 촬영도 해야 하고, 화보 촬영이라, 라디오도 하고, 또 다음 주에는 프랑스도 가야 하고···. 바쁘잖아. 안 그래도 내가 저 프로그램 컨택했는데, 막 시골을 다닌다네? 무슨 얘기인지 알겠지? 나는, 아니, 우리 회사는 아라 너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스케줄을 잡···.]
“나 갑자기 머리 아파졌어. 안 그래도 미화리 한과 티켓팅도 번번이 놓쳐서 스트레스 만땅이었는데... 저 프로그램 봤어? 재방송이니까 봤겠지···. 막 약과랑 매작과랑···. 내가 맨날 먹고 싶어서 침만 흘렸던 게 산처럼 쌓여있다? 어머. 솥뚜껑에 고기도 구워 먹네? 저건 얼마나 맛있었을까···?”
[아라야, 잠깐만. 진정해봐.]
매니저는 필사적으로 아라의 컨디션 난조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내가 갈 수 있었는데! 나도 노래 잘하고! 먹방도 잘할 자신 있었는데!”
털썩.
TV에서 이 피디가 미화리 마을 사람들과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본 아라는 소파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흑···.”
소파에 모로 누운 자세로 쓰러진 아라는 전화기를 귀에서 떼지 않고 주먹 쥔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꼈다.
[아라야? 울어? 울면 안 돼! 좀 있으면 인터뷰 촬영 가야 하는데···! 눈 부어서 사진 찍히면 어쩌려고···!]
“몰라. 난 지금 매우 매우 슬픈 상태야. 사진은 아련하게 찍히겠지.”
이익.
아라는 촬영만 생각하는 매니저의 말에 더욱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없었다.
화창한 날씨처럼 아주 깨끗했다.
그렇다.
그녀는 지금 연기 중이었다.
“저 장면에 내가 있었으면···. 오늘 아주 날아다녔을 텐데···. 나는 이번 주에도, 다음 주에도 미화리를 못 가겠지···. 맨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흑흑.”
프로인 아라는 곧 있을 인터뷰를 위해 눈물은 절대 흘리지 않도록 감정을 컨트롤하긴 했지만, 슬픈 건 사실이었다.
화면발을 잘 받기 위한 매일 같은 다이어트와 식단관리는 아라를 무대에서 가장 빛나게 했지만, 그녀의 멘탈을 책임지는 건 역시나 달콤한 간식 한입이었다.
마른 사막의 단비 같은 단맛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양껏 먹을 수 없기에 한입을 먹더라도 최고의 단맛을 찾아다니곤 했다.
그리고 지금.
아라는 미화리 산골 마을을 다녀온 뒤로부터 자신이 고르고 골라 먹던 단맛이 그냥 믹스커피라는 걸 알았다.
그에 비해 미화리 할머니들이 만드셨다는 한과는···. TOP이었다.
“앨범 마무리하면 데려다준다고 해놓고는···. 약속도 안 지키고. 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입으로 뱉고 나니 정말로 서러워졌다.
TOP을 먹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던가. 밤낮을 반납하고 앨범을 완성했다.
[아···. 그건 진짜···.]
매니저도 동의했다.
그때 아라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제일 가까이 있던 자신이 제일 잘 알리라.
하지만 대표가 가지고 온 스케줄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국내가 아닌 해외 유명 쇼에 나가는 건이라 더더욱.
그 덕분에 아라는 해외에 이름을 알리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회사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매니저 오빠는 저만 믿으라더니 여태까지 사랑방 간식 한 번도 안 가져와 주고! 이건 너무하다! 이건 파업해도 뭐라고 못한다! 안 그래?”
[아···.]
급기야 파업을 선언하는 아라에 매니저는 골치가 아파졌다.
이게 다 대표님 때문이다.
아티스트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줘도 모자랄 판국에. 이렇게 파업 소리가 나오게 하다니.
“...내가 원하는 것도 못 먹는 이 삶이 뭐 그렇게 의미 있을까···?”
급기야는 혼잣말로 연예인 생활 청산을 말하는 아라의 목소리에 매니저는 갓길에 황급히 차를 세웠다.
쉬는 것도 괜찮고, 자신에게 이러게 땡깡을 부리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연예인 생활을 관두는 건 안 된다.
아라는 자신이 픽업해 여기까지 키운 1호 연예인이었다. 아직 아라는 할 수 있는 일들이 태평양처럼 넓었다.
아라를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로 만들려는 원대한 목표가 있는 매니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침착하게 제 계획을 아라에게 말했다.
[오케이. 아라야, 이번 주. 딱 이번 주 스케줄만 하고 나면, 내가 하루 풀로 너 쉬게 해준다. 쉬는 날에, 미화리 가자! 어? 그때 맞춰서 사랑방 예약도 하고! 아, 이번엔 내가 안 하고 내 동생한테 돈 주고 시킬 테니까 안될 걱정은 말고. 우리 동생 알지? 너훈아 티켓팅까지 성공한 놈. 그놈이 여태 목표한 티켓팅 실패한 적이 없다. 나 믿지?]
다급한 매니저의 목소리에 아라는 고민했다.
매니저 동생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실제로 겪기도 했고.
자신의 콘서트 티켓팅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하기 위해 매니저 동생과 함께 컴퓨터 두 대로 티켓팅하는 너튜브 영상도 찍었으니 말이다.
그때도 같은 조건으로 티켓팅을 하는데, 매니저의 동생만 티켓을 3장이나 구매해버렸다.
때문에 티켓팅에 관해서라면, 매니저는 믿지 못해도 매니저의 동생은 믿음을 넘어 신이나 다름없었다.
“음···. 오케이.”
[그래. 그럼 이번 주는 열심히 하는 거다?]
“응. 당연하지. 나 씻으러 간다. 이따 봐.”
매니저에게 확언에 아라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음 주에 하루를 당당히 쉬기 위해서는 이번 주 남은 일정을 제대로 소화해 내야 한다.
“아자아자! 다 사고 말겠어!”
욕실로 가는 아라의 눈은 전쟁에 나가는 장군의 그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