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운동회? 마을 운동회! (3)
봄의 기운을 가득 담은 나뭇잎이 각자의 색으로 물들 때면, 운동장은 아이들의 즐거운 함성으로 가득 찬다.
흙먼지와 함께.
“으랏차차!”
“입만 놀리지 말고 힘을 써라! 힘을! 에 퉤퉤! 먼지 날린다! 발만 움직이지 말고 들으라고! 아이고! 힘 좀 잘 줘봐라! 내 자빠지겠다!”
운동회를 맞이한 학교 운동장에는, 예외적으로 어른들의 참여도 가능했다.
아이들만의 축제였지만, 1년에 딱 한 번, 아이들과 온종일 지낼 수 있는 어른들은 경기로 정신없는 운동장 한켠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오메! 냄새가 예술이다! 예술!”
“아직 완성 안 됐다! 좀 이따 무라!”
“하나만! 맛만 볼게!”
“떽! 니도 나도 한입씩 먹으면 언제 이거 다 만드는데! 절로 가라!”
아나바다 운동 또한 빠질 수 없었다.
“니 몇 개를 가꼬 가는거고? 그거는 돈 내야 된다! ”
“으잉? 아나바다 아이가?”
“아나바다 물품은 여까지! 여서부터는 돈 내고!”
“와?”
“왜긴 왜야? 야들은 전부 새거다!”
“새거가 왜 여있는데?”
“기부했으니까!”
“뭐? 기부면 공짜로 준거 아니가? 그럼 내도 공짜로 가져가면 되겠네! 저거 내 도!”
“이건 팔아야 한다니까?”
“아나바다 뜻이 뭔지 아나? ‘아!’ ‘나’보고 가지라고? ‘바’라는 대로 해주께! ‘다’ 갖고 간다?”
아나바다 장터에서 흥정하는 모습은 흔했다. 정가 대비 저렴한 가격에 내놓았다 하더라도, 이곳에 온 사람들에겐 그 가격이 정가이니 말이다.
물건을 살 때 또 하나의 재미인 흥정을 위한 목소리는 언제나 존재하였다.
하지만 시장과 달리, 운동회에서의 흥정은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게 보통 다.
“뭔···. 됐고. 놔라. 이거 팔아서 우리 기부하기로 했다.”
“기부? 어데?”
“저짝 초등학교.”
“아···. 그런 거면 진작 말을 해 줬어야지! 아나!”
흥정은 어디까지나 재미이니까 말이다.
학생이 이제 전교생 모두 합쳐 채 20명도 남지 않은 동네 유일한 초등학교에 기부하겠다는데, 깎을 생각은 싹 사라지기 마련이다.
구매자는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구매하고, 동시에 어려운 곳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원래 가격보다 더 가치를 쳐 주기도 한다.
운동회란, 그런 것이다.
학생들을 위한 운동회든, 어른들을 위한 운동회든. 모두가 한데 모여 운동 종목에 참여하고, 우의를 다지며, 평소 잘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친목도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내는 자리.
“자! 여기 천막은 다 쳤다! 뭐 더 도와줄 거 있나?”
“아뇨! 어르신! 저희도 짐 다 옮겼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무얼! 같이 하는 게 맞지! 짐 옮겼으면 또 정리해야 할 거 아니가? 자자, 내한테도 한 박스 줘봐라. 어데 놓으면 되는데?”
“아, 진짜 괜찮은데···.”
“괜찮기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내 도와줄게!”
“넵. 그럼 이걸 여기에···.”
노인, 젊은이 구분 없이 운동회를 위해 힘을 보태고-
“이것 좀 먹으면서 일하세요.”
“어이쿠. 고마우이.”
“별말씀을요.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그럼···. 나 물 한 잔만 부탁해도 되겠나?”
“당연하죠! 잠시만요!”
“고마우이. 그런데 처자는 어디 귀한 자제여?”
“저요? 아. 전 한혜원이라고 합니다. 고향이 여긴 아니고요, 사랑방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아! 그 사랑방 공장! 아이고. 그럼 저 윗동네에서 살겠네! 저치들이 잘 해 주고? 텃세 부리면 우리 마을로 와!”
“떼끼! 이놈이 어디서 우리 마을 사람을 데리고 가려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다.
그렇게 너나 할 것 없이 운동회를 위한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
[아아. 마이크테스트. 헛둘 헛둘. 똑똑똑]
삐익- 하고 마이크 켜지는 소리가 귀를 때리더니, 단상에서 마이크를 쥔 사람이 나타났다.
“헐. 저 뭐꼬?”
“내가 아나?”
“아이고. 내 눈!”
소리가 나오는 단상으로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아이고, 아이고, 했다.
[아-아-. 잘 들립니까?]
“잘 들리기는 건 둘째치고 니 옷 좀 벗어라! 내 눈멀겠다!”
[으응? 눈이 와?]
“와이고! 또 봐도 아프네!”
옷을 벗으란 말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단상 위의 사람, 장 이장의 말에 아랫마을 차 이장은 두 눈을 가린 손 사이로 눈을 빼꼼 내었다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니 마이! 오늘 햇빛도 작살인데 누구 죽일라 그러나?”
가을에게 자리를 빼앗기기 싫은 여름이 제 위세를 뽐내는 늦여름.
마지막 여름의 발악에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햇볕이 제 존재를 강하게 내세웠다.
[아아. 난 또 뭐라고. 내는 선글라스 끼고 있어서 몰랐제. 이런 햇볕 아래서는 선크림이랑 선글라스가 필수인 거 모리나? 아. 모자는 쓰고 있네. 다행이다. 하하하!]
“저···. 이! 어억!”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자 안 썼으면 남은 머리도 지키지 못할 뻔했다며 마이크에 대고 자신을 놀리는 오랜 친구의 모습에 차 이장은 뒷목을 잡았다.
“아이고! 차 이장! 일나라! 괘안나?”
“오, 오늘···. 우리 저 마을 못 이기면 집에 안 간다!”
제 옆으로 모여드는 마을 사람들에 차 이장은 제 옛친구. 아니, 웬수를 향해 이글이글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집에 못 가···?”
“와? 와 집에 못 간다는데?”
“못 이기면 못 간다는데?”
“그런 게 어딨노! 저 이장 말 틀린 거 하나 없구만. 오늘같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서 있으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두피도 아야 한다.”
“뭐, 뭐, 뭐, 뭐??”
아이고. 아이고.
이제는 동네 사람들까지 내를 놀리네!
차 이장은 집에 가지 못한다는 자신의 말에 팩폭을 가감 없이 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다시 한번 뒷목을 잡았다.
“어이쿠! 이럼 안된다! 이장이 되가 뭔 놈의 간이 이리 작노! 부채 좀 가지고 온나!”
“여있다!!”
펄럭펄럭.
그늘에 있음에도 햇빛 아래 있는 것처럼 얼굴이 벌게진 차 이장의 위로 시원한 부채 바람이 일렁일 때였다.
[크흠. 오늘 날씨예보에 따르면, 낮에 더 뜨거워질 수 있다카니까, 다들 선크림이랑 모자, 그리고 선글라스까지 단디 쓰고 참여하소.]
개구진 표정으로 부러 열받은 척하는 제 친구를 내려다보던 장 이장은 고개를 돌려 여러 군데 흩어진 사람들에게 잔소리했다.
“선크림은 얼어 죽을. 평생 농부로 살아온 우리를 뭐로 보고! 이까짓 햇빛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지!”
그 잔소리를 들은 차 이장은 반쯤 드러누웠던 자세를 오뚜기처럼 바로 하고 삿대질했다.
[어허. 자외선이 노화에 얼마나 안 좋은지 모르는 어리석은 중생 말은 듣지 맙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선크림을 잘 발라야 하는 게 뭐냐면···!]
노화와 기미, 검버섯 방지. 피부 수분도 어느 정도 지켜주고, 아무튼 선크림이 최고라는 장 이장의 설명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그려? 나도 그럼 발라야 하나···.”
“그러게 말일세. 근데 선크림이 있어야 바르지···.”
“내는 집에 우리 손녀가 할아부지 바르라고 사준 선크림이 있지! 엣헴!”
“그럼 뭐하노. 지금 없으면 말짱 꽝이구먼.”
가족들로부터 선크림을 받은 사람들의 어깨는 이때다 싶어 으쓱거렸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입을 댓발이나 튀어나왔다.
그렇게 또다시 두 파로 갈라지려 할 때였다.
[선크림이 없으면 뭐다? 모자라도 써야 한다! 그리고 늙으면 늙을수록 뭐다? 눈이 약해진다! 그럼 뭐다? 내처럼 이렇게 선글라스를 써야 하는 거라! 자, 다 같이 따라 해봅시다. 썬선모! 선크림! 선글라스! 모자!]
고작 선크림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듯, 장 이장의 입에서 방언처럼 피부와 눈 건강을 위한 가지고 있어야 할 필수 제품들이 튀어나왔다.
“저···. 뭔데? 약장수가?”
“약장수는 가짜 약을 진짜라고 파는 거 아이가? 저치는 우리한테 뭐 팔려고 하는 건 아니다 아이가.”
“아! 약장수는 아니라도! 누가 지만 저렇게 얼굴 저리 다 싸매고 자랑하는데! 얄미워 죽겠구로.”
“그건 그렇지.”
사람들의 수군거림 가운데, 즐거운 운동회날에 저 인간 자랑으로 시작해야겠냐며 차 이장이 제자리에서 길길이 날뛸 때였다.
[해서!]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던 장 이장은 입꼬리를 싸악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통해 외쳤다.
[미화리 산골 마을 이장인 장순택이가! 여러분들의 무궁한 건강을 위해! 준비 했습니다! 자! 여기서 다들 썬선모! 세트! 가꼬 가이소!]
샤라라-!
마이크를 들지 않은 오른손을 번쩍 든 장 이장님의 움직임에 맞춰 빛나는 스팽글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뜨거운 늦여름임에도 긴 팔인 자켓을 입고 단상에 오른 장 이장은, 더위를 잊은 것만 같아 보였다.
**
“이야. 이장님 완전 스타인데요?”
조금 떨어진 천막에서 박스를 정리하고 있던 이 대리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렇지. 스타시지.”
저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몇 번의 연습이 있었던가.
나는 운동회 회의 후, 꽃분이 할머니가 담은 간장 게장을 혼자 한 접시를 다 먹은 것도 모자라 또 한가득 싸간 차 이장님을 향한 장 이장님의 분노를 직접 목격했더랬다.
“그런데 저건 언제 준비하셨대요? 방송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워라밸을 최우선 삼아 계약한 소속사인 만큼, 장 이장님의 스케줄은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널널한 편이었다.
당장 오늘도 운동회를 위해 비워놨으니 말이다.
“맞아요. 맨날 마을 돌면서 확인하시고, 문제 있으면 해결하시고. 완전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시던데···.”
하지만 방송에 앞서, 장 이장님은 말 그대로 한 마을의 이장이셨다.
‘가수? 좋지! 내 이 나이에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근데, 그래도···. 내는 꿈을 이뤘다고 내 한테 원래 주어진 일을 포기 안 할끼다. 내 혼자 꿈을 이룬기가? 다 같이 이룬 거제. 안그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는 이제 장 이장님이라는 타이틀보다, 장순택이라는 이름의 가수로 더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미화리 산골 마을의 타이틀을 놓지 않았다. 한낱 촌부였던 자신을 유명한 가수가 되게 용기를 준 건 마을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그래도 평생 지낸 사람들이 더 중요한 거지.”
“그게 대단하다는 겁니다. 우선순위를 유명세가 아닌, 마을에 두다니···. 저 같으면 바로 때려치우고 동남아 순회공연 다녔을걸요?”
“아···. 대리님, 동남아 순회공연이 언제적 말이에요. 이장님은 가족을 택한 거죠. 거진 평생을 함께한. 전 완전 존경! 팀장님! 들으셨죠? 대리님은 로또 맞으면 동남아 순회공연 다니신대요!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성!”
“아니! 그 말이 그 말이 아니잖아! 팀장님, 못 들은 거로 해 주십쇼!”
눈을 반짝이며 저는 여기에 뼈를 묻겠다는 한혜원의 말에 이 대리가 기함하며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큰 팔을 휘둘러봤지만, 자신의 반밖에 되지 않는 한혜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협에 패배한 곰은 억울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억울한 곰에게 나는 말했다.
“뭐. 내가 개인의 미래를 어찌할 수는 없지. 더 잘 되는 길이 생긴다면, 나는 언제든지 환영이야.”
그게 언제가 되었든 응원할 생각이지만,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걱정 말라고.
“크흡. 감사합니다. 저도 여기에 뼈를 묻겠습니다!”
“어라? 눈물 하나도 안 나는데요? 이거 거짓부렁 아닌가요?”
감동한 듯 코를 훌쩍거리는 이 대리의 모습을 본 한혜원이 아깝다며 다시 놀려댔다.
“그건 그렇고, 너넨 받으러 안가?”
“네? 뭐요?”
“썬선모.”
“아아. 저흰 괜찮습니다.”
“?”
떡 준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사람들이 제 팀원들이다. 그런데 장 이장님이 사비를 들여 그것도 선물을 줄 때는 좋은 걸 줘야 한다며, 하나같이 이름이 유명한 브랜드로 골랐는데···. 저걸 안 받는다고?
이상했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뜨고 팀원들을 관찰하려 할 때였다.
“두구두구두구두구!”
“짜잔!”
다 같이 뒤를 돌아 입으로 북소리를 내는가 싶더니만, 다시 앞을 본 그들의 얼굴엔 각양각색의 모자가 쓰여 있었다.
“뭐지···?”
나는 고개를 돌려 장 이장님의 선물을 바로 착용한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가 같은 디자인에, 같은 컬러였다.
하지만 내 앞의 팀원들이 착용한 제품들은 브랜드만 같지, 모두 다른 디자인이었다.
“히히. 저희가 짐도 들어드리고, 브랜드 추천도 해드리고, 쇼핑도 같이했거든요!”
“그래서 선물이라고 특별히! 저희만 알아서 고르라고 하셔서.”
“크흠. 짐꾼을 잘했죠.”
“팀장님,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상자가 거의 없어져 가는 거 같은데···.”
참.
이걸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바쁘신 분이 언제 저걸 다 준비했냐며 모른척하더니.
지금 보니 자랑 하려고 여태 밑밥을 깐 거였다.
어이없는 한숨을 내 뱉어 봤지만, 다들 장 이장님이 특별히 주신 거라고 코를 하늘 높이 올려 제 얼굴을 자랑하느라 눈치도 못 채는 것 같았다.
“...”
허. 참. 내.
노을이 할 때는 귀여움만 존재했는데, 그와 똑같은 포즈를 한 팀원들을 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 같았다.
후.
아직까지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패션모델 흉내를 내는 팀원들을 향해 말하려 할 때였다.
“어머. 다들 너무 멋있으시네요. 그건 지방디 신상 아닌가요? 저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어때요?”
어디서 시원한 바람이 훅 들어오나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