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158화 (158/163)

가을 운동회? 마을 운동회! (4)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피부를 따갑게 하던 햇빛이 천막 안까지 들이치려 고개를 기웃거린 거 같은데···.

“우와! 이게 다 뭐에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아이스크림의 산은 기웃거리던 햇살도 기겁하고 달아날 만큼의 냉기를 뿜어댔다.

“제가 오늘 스케줄이 비어서 갑자기 왔다가 운동회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이 날씨에 뛰면 힘들 것 같아서 사 와봤는데···. 별로일까요?”

“별로이긴요! 너무너무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이따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어머! 음료수까지 사 오셨어요?”

산더미 같은 아이스크림 산 뒤로 보이는 음료의 산에 손을 뻗어 짐을 나눠 받던 한혜원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네. 아이스크림이 당류다 보니까, 힘을 낼 때는 당이 좋긴 하지만, 이것만 먹으면 자칫 혈당조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당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죠? 한번 생기면 진짜 힘들어지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물도 마시고, 차가운 거 못 드시는 분들은 이온 음료 드시면 좋을 것 같아서 사 와봤어요.”

“아···. 네. 고맙습니다!”

마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다다다 쏟아내는 여자의 모습에 한혜원이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황급히 천막 밖으로 나가 장 이장님의 선물을 이모저모 뜯어 보는 어르신들 무리로 달려갔다.

“어르신들! 손님 왔어요! 손님이 아이스크림이랑 음료수 엄청 사 왔어요!”

한편, 지방디 선글라스를 낀 여자를 피해 어르신들에게 달려간 한혜원과 달리, 이 대리와 서 대리는 여자의 등장과 동시에 무서운 걸 본 마냥 움직임을 우뚝, 멈추더니 이제는 딱 붙어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서, 서, 서, 설마···.”

“내, 내, 내 생각이 맞아?”

“어어어.”

“아, 아, 아, 아라님···!”

마치 저들이 서 있는 땅에만 지진이 난 것처럼.

“어머. 저 아시나 봐요.”

여자는 국지성 지진을 일으키는 두 대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방긋 웃었다.

“어억.”

“여, 여긴 천국?”

그녀의 미소에 한 명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려고 하고, 나머지 한 명은 하늘을 보며 천국을 중얼거렸다.

“어머? 다들 왜 이러신데? 정신 차리세요! 헐! 대리님! 넘어가면 안 돼요! 팀장님! 이 대리님 머리 좀 한 대 때려주세요!!”

여한이 없다는 표정으로 뒤로 넘어가는 서 대리를 잡은 김연우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머리를···. 때리라고?”

“네! 그래야 정신 놓았을 땐 머리를 때리는 게 최고래요!”

“그래···?”

“네!”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힘껏 고개를 끄덕이는 김연우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때다 싶어 저러는걸 보니 이 대리에게 평소 쌓인 게 많은 모양.

폭력은 반대긴 하지만, 열반의 경지를 넘어 천국 끄트머리에 발을 걸치려는 이 대리를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김연우의 말대로 중지를 뾰족하게 만들어 이 대리에게 다가갈 때였다.

“어이구! 우리 가수 선배님 오셨네!”

아직까지 빛을 반사해 휘황찬란한 스팽클 자켓을 벗지 않은 장 이장님이 한 손에 쭈쭈바를 들고 뛰어왔다.

“어머. 이장님! 잘 지내셨어요? 선배 가수라니요. 그냥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그럴까?”

“네. 그럼요! 진짜 이게 얼마 만이죠? 저 오늘 운동회 참가해도 될까요? 뇌물도 가져왔습니다!”

오자마자 여자를 향해 경례하던 장 이장님은, 손사래 치며 너스레를 떠는 그녀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저 뒤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궁금한 표정으로 목을 쭉 뺀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자자! 언능 온나! 우리 가수 아라 양이 운동회 껴달라꼬 아이스크림 뇌물까지 사 왔는데, 어째 생각하노?”

“이장님, 음료수도요.”

“어잉? 음료수도? 하이고! 아라 양이 음료수도 산더미처럼 사 왔다!”

아라가 손을 뻗은 방향을 따라간 장 이장님은 음료수를 확인하더니 더없이 활짝 웃으며 마을 사람들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장 이장 덕분에 낯선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거북이를 닮았던 걸음을 재촉하며 천막을 향해 들이쳤다.

“아이고! 내가 선글라스 때문에 긴가민가했다 아이가!”

“내도! 얼굴이 조막만해가지고 선글라스만 동동 뜨는데 내사 눈이 안 좋아가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제!”

“우리 마을 사람인데 당연히 참여 가능하제! 니는 우리 마을 명예 주민이다!”

“맞다! 맨날 우리 마을 홍보해주고, 내가 니 덕분에 인별도 한다! 고맙다.”

“잘왔다. 잘 왔어.”

순식간에 아라 앞으로 당도한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아라를 환영했다.

“어머. 제가 선글라스를 아직 안 벗었네요. 죄송해요. 저 명예 주민이에요? 세상에. 너무 감사해라. 우와. 인별도 하세요? 제 팔로워시라고요? 저도 팔로우할게요! 아이디 알려주세요! 항상 맛있는 거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아라 또한 자신을 환영하는 마을 주민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감사함을 표했다.

“헉, 아, 아, 아, 아라···. 으악!”

음향 체크를 하느라 방송실에 있었던 박준혁이 학교 밖을 나오며 비명을 지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라고? 준혁아? 여자 이름이 들린 거 같다?”

그의 비명은 삽시간에 제압되긴 하였지만. 어쨌든.

“근데 연락도 없이 여기는 웬일이고? 아, 반갑지 않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스텐 사발을 한 손에 들고 온 강 할머니가 아라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탁.

하얀 플라스틱 탁자에 올려진 사발에 담긴 내용물의 모습을 관찰하던 아라는 강 할머니의 질문에 황급히 관찰을 멈추고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 그게, 여기 음식 먹고 싶어서 왔어요. 너무 그리운 거 있죠? 먹다가 못 먹으니까 병이 날 것 같아서···. 휴가 내고 왔어요.”

“아이고. 맞네. 우리가 요즘 바빠가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미안타.”

“어휴. 아니에요. 여태 챙겨주신 게 얼만데···. 제가 너무 감사하죠!”

미안하다는 강 할머니의 말에 기겁하던 아라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두 손을 마주쳐 합장 자세를 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

갑자기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 탓에, 나는 영문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내 뒤에 숨어 몰래 아라를 보던 팬 둘이 빛의 속도로 오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팀장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라란 말입니다. 아라! 2천만 아라의 팬들이 무섭지 않으십니까?”

“으르렁!”

둘이 아니라 셋.

어떻게 지민에게서 빠져나왔는지 모를 박준혁까지.

으쓱.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가 5천만 정도밖에 안 되는데, 2천만 아라 팬이 무섭지 않으냐는 이 대리의 말은 나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짐승에 빙의한 박준혁의 협박 또한.

팬이지만, 팬이기에 더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셋을 뒤로한 나는, 직접 고개를 숙인 연유를 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 맞다! 이유를 말씀 안 드렸구나. 제가 긴장해서.”

“...?”

긴장이라니. 2천만 팬을 거느린 가수가 긴장할 게 뭐가 있나 싶었지만, 꽤 긴장했는지 손바닥을 바지에 비비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후. 사장님, 이건 진짜 진짜 제가 너무 죽을 것 같아서 부탁드리는 건데요···.”

어렵사리 입을 뗀 아라는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헐. 죽을 것 같다니!”

“우리, 아라님이!”

“으오오!”

덕분에 뒤에서는 또다시 야단법석이 났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발, 저 신비농장 야채랑 사랑방 한과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배송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물론 선착순인 걸 알지만···. 제가 스케줄이 진짜, 진짜. 너무 바빠서요!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도 저랑 다니느라 저보다 더 피곤하고···. 그래서 저희 매니저가 동생 시켜서···. 아, 그 동생이 티켓팅이란 티켓팅은 전부 선공시킨! 그 뭐니, 입지적인 인물인데요, 그래도 그걸 매일 시킬 수는 없으니까···. 제가 돈 더 많이 드릴게요! 두 배! 아니, 세배! 아니, 투자! 투자 안 필요하실까요? 공장 세우셨다고 들었는데, 막 설비, 더 안 필요하세요? 아니! 온라인 판매도 재고 입고됐다는 알림 뜨고 바로 들어간 데 없대요! 제가 지금 밥을 제대로 못 먹은 지가 어언···. 으흑.”

긴장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한번 터진 2천만 팬을 가진 가수는 폭포수처럼 신비농장 작물과 사랑방 한과 예찬을 하더니, 목이 메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두 손에 묻어버렸다.

여린 그 모습에, 2천만 팬 중 3명인 내 직원들은 사장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팀장니임...”

“어흐흐. 가슴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주시죠! 네? 네? 네?!”

“사장님···!”

물론 그들의 소리는 아주 작아 나만 들렸다.

여름철 모기처럼 윙윙거리는 소리에 나는 귀를 감싸 쥐고,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앉아있는 2천만 팬의 가수인 아라를 보며 말했다.

“정기배송이라···. 특혜가 되겠네요.”

“어, 어···. 제가! 절대! 어디 가서 발설하거나 그러지 않겠습니다. 저 입 무거워요! 제가 얼마나 입이 무겁냐면요...!”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손에서 얼굴을 든 아라가 제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엔, 당연하게도 눈물 자국은 없었다.

“그래도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니···.”

“들키면, 제가! 다 자백하겠습니다! 사장님 업장에 피해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

“각서 쓸까요? 제가 당장 변호사 불러서, 공증을 받으면···!”

변호사까지 들먹이며 당장이라도 사인을 휘갈길 듯 간절한 표정에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도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울아, 어찌 안 되겠나?”

“처자가 뇌물도 사 왔는데···.”

모두 한 손에 아라가 사 온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든 채였다.

당장 건너편 천막 아래 있는 냉장 박스만 열어도 미리 준비한 음료가 그득그득 들어있건만···. 아라의 옆에서 그녀를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오케이. 알았어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는 소리에 아라의 상체가 발사체처럼 앞으로 숙어졌다.

“무슨 조건이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자세에 나는 몸을 뒤로 물리며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오늘, 운동회에서 2종목 이상 이기시면, 2달 동안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예? 정말요? 그럼, 3종목 이기면 3개월인가요? 4종목은? 오늘 몇 종목이에요? 제가 다 이겨버리겠습니다!”

역시나, 걸려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된 그녀의 모습에 나는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만약 다 이기신다면, 더 좋은 제안을 하죠.”

“더···. 좋은 제안이요? 알겠습니다! 매니저 오빠, 들었지?”

마지막 제안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라는 주먹 쥔 손을 하늘로 뻗으며 의지를 불태웠다···.

“나 말리지 마! 오늘 전 경기, 내가 이길 거야! 나 초등학교 때 운동회 에이스였어!”

태양도 불태울 것 같은 의지가 아라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

미화리 산골 마을 주민들이 갑자기 방문한 아라에게 정신이 팔려있을 무렵.

반대편 천막에 모인 차 이장과 아랫마을 사람들은 한창 경기목록을 분석하고 있었다.

“달리기 빠른 사람 누구였제?”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차 이장이 고개는 그대로 둔 채 눈동자만 굴리며 제 앞으로 모인 마을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범수 형님이랑, 성찬이 아닙니꺼? 아. 그리고 계주 참가한다고 한 사람들.”

“아이다. 오늘은 컨디션 좋은 사람들이 뛰어야 한다. 범수! 성찬! 나머지 계주 참가자들! 니들 컨디션 어떻노? 괘안나?”

앞선 사람의 대답에 차 이장은 이름이 불린 사람들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괘, 괘안치?”

“아마도···?”

맹수 같은 차 이장의 눈빛을 받은 계주 참가자들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우리에게는!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이 말이다! 자, 계주팀은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으니까 믿고!”

“으응? 우리가?”

“...언제 이길 수 있다. 그랬노?”

“저짝 팀에 젊은 아들 억수로 많던데?”

계주는 무조건 이길 거라고 목을 박아버린 차 이장의 말에 계주 참가자들이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뭐? 그래서 못한다고.?”

하지만 그런 항의는 사백 안이 되어버린 차 이장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항의 소리가 없어지자, 차 이장은 콧김을 킁, 뱉고는 다음 운동 종목을 외쳤다.

“자! 그럼 다음! 줄다리기!”

“박 터트리기!”

“풍선 터트리기!”

“몸으로 말하기!”

“장애물 달리기!”

숨 가쁘게 나머지 종목을 외치며 출전 참가자들과 눈빛을 나눈 차 이장은, 마지막 종목을 남겨두고 길게 숨을 뱉어냈다.

“마지막. 가위바위보.”

마지막 종목을 입 밖으로 꺼낸 차 이장의 모습은 자못 진지해 보였다.

꿀꺽.

주민들은 독불장군같이 승리만 외친 차 이장의 말을 기다렸다.

여태껏 나온 경기 종목들은 그래도 사람의 노력으로 어떻게 승패를 결정할 수 있을진 몰라도, 가위바위보만큼은 운이 거진 전부라 할 수 있는 종목이었기에.

쉼을 원하는 주민들의 애절한 눈빛을 받은 차 이장의 입이 열렸다.

“이긴다. 무조건 이긴다! 우리에겐 뭐라고? 패배란 없다! 자, 다 같이! 우리에겐! 패배란 없다! 안되면! 되게하라!”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무조건 승리! 를 외치는 차 이장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듯, 차 이장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다시금 외쳤다.

“이번만큼은 꼭! 이겨야 한다! 전쟁이다!”

자존심을 다시 가져오기 위한 전쟁!

“으오오! 매니저 오빠! 나 봐봐! 이길 것 같지?”

산골 마을 진영의 용병과-

“이긴다! 무조건 이긴다!”

오직 승리로 영광을 되찾을 생각인 아랫마을의 대표.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운동회의 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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