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다! (3)
움찔.
매니저의 어깨가 일순간 튀었다.
"왜 그래, 매니저 오빠? 어디 안 좋아?"
자신의 두배만한 매니저는 등치도 덩치지만, 겁이라곤 없었다. 벌레도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잡아버리고, 무거운 물건도 번쩍 번쩍 들었다.
심지어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아 심야 촬영에도 혼자 꿀잠을 잘 정도였다.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흐응... 언니한테 혼났구나?"
그런 매니저를 놀라게 할 존재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밖에 없었다.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을 가진 그의 연인은 어디하나 무서운 곳이 없었지만, 그녀의 문자나 전화가 올 때면 가끔 저렇게 반응하곤 했다.
"아니? 아니! 진짜 아니야."
매니저는 오해라며 양손을 흔들었다.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모습.
"흐응... 알았어. 아니라고 할게. 오빠, 이번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 언니한테 사과 준다고 했어. 마지막까지 파이팅!"
힘내라며 등을 툭툭 두드리는 아라의 행동에 매니저는 힘없이 대답했다.
"어. 파이팅.."
약속이라니. 이렇게 친해질 줄 알았더라면, 그때 여자친구를 만나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늘도 이곳에 같이 온다는 걸 말리느라 어지간히 진을 뺐었다.
여자친구와 아라는 환상의 짝궁 같아 한명씩 상대하면 그나마 나았지만, 둘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머리가 아파왔다.
"...."
같이 요리를 한다고 주방에 들어갔다 연기와 함께 나왔던 둘의 모습이 떠올라 뒷목을 주무를 때였다.
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시선이 느껴졌던 방향에서 자못 억울한 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님...?"
저처럼 덩치가 큰 남자 한 명이 아라가 사랑해 마지 않는, 그래서 이 소중한 휴일에 이곳으로 달려오게 만든 사랑방의 사장의 앞에서 배신당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어머! 뭐지? 싸우는건가?"
소란을 들은 아라가 등 뒤에서 목을 쭉 빼며 말했다.
후우.
반짝반짝. 흥미로움을 숨기지 못한 아라의 눈을 본 매니저가 그녀의 눈을 피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평소에도 제일 재밌는 구경은 싸움구경이라며 현장 주변으로 누구보다 빨리 가버리는 아라를 아는탓에, 한손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였다.
"아라야. 여기 지금 너 보고 있는 사람들 많다? 우리만 있는게 아니야."
"어? 아, 맞다. 그렇지. 고마워. 쏘리."
그래도 낯선 사람들이 있다고 곧바로 얌전해 지는 아라의 모습에 매니저는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던 손을 풀었다.
그런데... 쏘리라니?
미안하다는 뜻 아닌가?
고맙다는 말은 이해가 가도, 미안하다니.
미안하다는 소리는 아라가 제 잘못을 완벽히 인정했을때야 나오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히히.
개구진 웃음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제 뒤에 있던 아라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오빠! 나 저기 잠깐만 갔다 올게!"
"어어? 아라야!"
황급히 손을 뻗어 잡아보려 했지만, 아라는 미꾸라지처럼 그의 손길을 벗어나 건너편 척막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외쳤다.
"걱정마! 말리러 가는거야! 만약에 진짜 싸워서 운동회 흐지부지 되면 어떡해! 내가 딱 말리고 올게!"
당했다.
말리기보다는 부추기는게 더 어울리는 제 아티스트의 발언에 매니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회사로 가면 이번에야 말로! 아라를 담당할수 매니저로 바꿔달라 요청하고 말겠다고 다짐할 때였다.
-띠리리- 띠리리리-
스피커가 치치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쨍한 종소리가 운동장 한가득 울려퍼졌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아아. 다들 점심 맛있게 드셨나요? 그럼! 배가 꺼지기 전! 마지막 경기인 줄다리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뚝.
MC의 안내가 끝남과 동시에, 건너편으로 넘어가다 말고 운동장 중간에서 우뚝 서있던 아라가 돌연 몸을 돌려 다시 아랫마을 천막으로 걸어왔다.
저벅저벅.
힘있는 그 걸음에 모래가 그녀의 발자국 모양대로 푹푹 파였다.
탁.
이윽코 매니저의 앞에 다시 선 그녀가 말했다.
"매니저 오빠, 어디 아픈데 없어? 어깨는? 어깨는 안아파? 내가 안마해 줘? 갑자기 왜그러냐고? 우리 줄다리기해야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아라는 호들갑을 떨며 어깨를 퉁퉁 두드렸다.
"아이고! 어깨가 많이 뭉쳤네!"
아무 요령없이 그저 두드리기만 해 아프기만 한 아라의 주먹을 받으면서 매니저는 다짐했다.
"..."
나중에 회사로 돌아가면,
아라가 사고치기 전 수습한, 저 위에 있는 MC의 영입도 적극 추진하리라고.
**
휘잉-
운동장 한가운데 놓여진 기다란 줄 위로 모래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저벅저박.
사방에서 들리던 모래바닥 걷는 소리가 한데 모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한데 모인 사람들 사이로 휘몰아쳤다.
휘오오-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운동장 한 가운데 모인 사람들은, 두 무리로 갈라져 서로를 노려보았다.
"흥!"
"헹!"
서로 마주본 사람들은 상대방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누구 먼저라 할것 없이 팔짱을 꼈다.
"이야. 벌써부터 분위기가 후끈합니다! 역시 마지막 경기! 역전할 것이냐, 승자의 자리를 지킬것이냐!"
팽배한 기싸움을 뚫고 양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졌다. 지척에서 들리는것같아 고개를 돌리니, 흥미진진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채 이쪽으로 걸어오는걸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다 졌는데. 거, 너무 부담주지 마라. 안그러나?"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안카나! 하하하!"
아랫마을 사람들이 먼저 도발을 시작했다.
"뭐, 뭐?"
"됐다. 가만있어라."
다혈질인 창섭 할아버지가 그들의 도발에 한발짝 앞으로 나섰지만, 이내 장 이장님의 팔에 가로막혔다.
"왜? ...알았다."
자신을 잡는 장 이장에 발끈, 화를 내려던 창섭 할아버지는,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을 마주하고는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결과는 대봐야 아는거 아니가?"
"대봐야 아는건 비슷할때고. 지금은 대충만 봐도 어느쪽이 유일한지 알 수 있는데 뭐하러 번거롭게 대고 그러노. 안그러나?"
맞다. 맞다!
차 이장의 말에 마을사람들이 짜기라도 한듯 웃으며 맞장구쳤다.
"..."
장 이장은 할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어차피 이 경기에서 이겨서 증명하면 될일.
두 입술을 꽉 깨문 그는 고개를 돌려 MC에게 말했다.
"시작하지."
**
기다란 줄 양쪽 끝에 선 양 마을 사람들의 목표는 같았다.
승리.
"매니저 오빠, 이번에 지면 알죠? 언니가 실망할거에요."
언니가 실망한다니.
대대장이 실망했다는 소리를 할때보다 더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어... 당연하지! 이긴다. 나는 무조건 이길거다. 이겨야만한다..."
스스로 주문을 걸던 아라의 매니저가 인생무상을 느낄무렵.
반대편 진영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태의 큰 덩치가 있었으니...
"이기면 진수성찬. 이기면, 진수성찬. 이기면 진수성찬!!"
둘다 중얼거리는 건 같았지만, 의지는 달랐다.
"휴가는 싫은건가?"
이번경기에서 이길경우, 한혜진은 이 대리에게 1주일동안 잔소리를 하지않음과 동시에 식단을 관리 하지 않기로 하였고, 나는 휴가를 준다고 했다.
입사 후 여태까지 쉴틈없이 일에만 빠져있어 혹시라도 내 눈치를 보나싶어 꺼낸 휴가인건만. 진수성찬만 얘기하니 다른 걸 걸껄 그랬나싶었다.
"예? 아닙니다! 네! 아니고 말고요! 이기면 진수성찬 휴가! 진수성찬 휴가...!"
"아니, 그런의도가..."
그저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걸 해 주겠다는 말을 하려 했건만...
저러는 걸 보니 역시 연차와 관련없는 유급휴가가 마음에 든 모양.
이러나 저러나, 이 대리가 만족하는 모습에 몸을 돌려 꽈배기 모양으로 짜여 있는 밧줄을 좀 더 꽉 잡을 때였다.
"...진수성찬, 휴가... 휴가... 으흑."
돌연 이 대리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뭐꼬? 뭣땜시 그라노?"
갑자기 하늘을 날다 땅에 떨어진것처럼 변한 이 대리의 목소리에 중간쯤의 자리에 있던 장 이장님과 강 할머니가 대번에 뛰어와 이 대리를 샆폈다.
"무슨 일 있나?"
"자. 이거 좀 무봐라."
우리 마을의 핵심전력인 이 대리의 컨디션변화에 두 어르신은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드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최소한 1년은 '패자'라 불릴테니, 당연했다.
강 할머니가 호주머니에서 샘플용으로 작게 만든 약과를 꺼내 한껏 슬픔을 표현하는 이 대리의 벌린 입에 넣어줄때였다.
"하이고. 저게 뭐꼬. 사내자식이 뭐 저리 감정변화가 많아서야..."
쯧쯔쯔.
건너편에서 선두에 선 차 이장님의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꼬?"
장 이장님은 그 소리에 눈을 희게 뜨며 고개를 번개같이 돌렸다.
"내가 뭐? 사내자슥이 큰 일을 앞뒀는데 저러니까 내가 걱정이 되서 그렇제."
제일 힘을 잘 쓸것같은 사람이 저러니 이번에도 승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것이라 생각한 차 이장은, 미소를 지으며 별 의도가 아니었다며 양 손을 올려 손바닥을 보였다.
"저저!"
차 이장은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제 억울함과 결백함을 주장했지만, 몇십년동안 그와 지지고 볶아온 장 이장의 눈에는 그의 생각이 눈에 훤히 보여 뒷목을 잡았다.
열이 올라 쓰러질것 처럼 뒷목을 잡는 장 이장님의 모습에 시야라도 가리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할때였다.
번쩍.
장 이장님의 뒷쪽에서 눈부심이 생겨나더니 번쩍거리는 강 할머니가 앞으로 나섰다.
"니 뭐라했노?"
입에서 냉기가 뿜어져나올것처럼 스산함을 가득 담은 말이 차 이장님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
덜덜덜.
한기서린 강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 차 이장님의 몸이 굳어가는게 눈에 띌 정도였다.
"누가, 내 앞아서 우리 마을 애를 괴롭히나?"
마구니를 찾겠다는 궁예 앞에 선 신하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카리스마 넘치는 강 할머니의 말에 운동장 전체가 귀신이라도 지나간듯한 침묵에 빠졌다.
쿡쿡.
"아, 아니. 나는, 아무 말도... 그냥, 걱정이 되가지고..."
어떻게 뭐라도 좀 해보라고 자신을 꾹꾹 찔러대는 뒤에 사람의 행동에 차 이장이 침묵을 깨려 어렵사리 입을 열었지만...
"아무말은 뭔 아무말도 안했다는 거고! 걱정을 해도 우리가 하지! 왜 니가 나서서 옆에서 말리는 시누이 맨키로 이렇다 저렇다 난리고. 조용히 안하나?!"
차디찬 비수같이 날아드는 강 할머니의 호통에 차 이장은 꽥!하고 항복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할머니의 호통이 실체화 된것만 같았다.
"거기 총각, 내가 잘못했네. 운동회에 좀 몰입되서... 거, 먹는거 좋아하는거 같은데, 나중에 내가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고 특별히 담근 술 줄게."
그러니 강 씨한테 죽기전에 나 좀 살려도.
분명 차 이장의 눈은 그렇게 말했다.
"...특별한 술이요?"
반짝.
휴가때마다 여자친구와 놀러를 다닌 바람에 이제 휴가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바보가 된것같아며 머리를 쥐어뜯던 이 대리의 고개가 들렸다.
그렇다.
이 대리는 푸드파이터임과 동시에 애주가였다.
꼴깍.
이 대리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바로 옆에 있는탓에 그 적나라한 소리를 들은 장 이장님이 먼저 외쳤다.
"진수성찬에는 고오급 술이 필요하제! 쟈는 술 못 빚는다. 잘못 만든 술을 몇십년 담근다고 좋은 술이 되나? 그러다 괜히 입만만 버린다. 내가 줄게! 넘어가지마! 기를 꺽어야제!"
다음은 강 할머니.
"진수성찬. 그거 내가 만들어줄게. 진수성찬이 뭐고? 아주 내가 9첩 반상을 만들어 줄테니까 저 영감한테 넘어가면 안된다! 알았제?"
강 할머니의 말에 이 대리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맛잘알의 레이더가 발동한 탓이었다.
마을에 와서 행복한 이유 중 하나가 마을 할머니들의 음식 솜씨 덕분이라 꼽은 이 대리에게 그 중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강 할머니의 음식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종류의 것이었다.
꿀꺽!
또 한번 크게 침을 삼킨 이 대리가 앞으로 걸었나갔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더 앞으로.
이내 무게 중심을 뒤로 보내기 위해 제일 앞에 서게 된 한혜원의 앞까지.
무슨일이냐는 듯,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한혜원을 보며 이 대리가 말했다.
"저 뒤에 가있어."
"네? 저희 계획이..."
한혜원이 계획을 작게 말했지만, 이대리는 말없이 솥뚜껑같은 손을 뻗어 밧줄을 잡았다.
꽈악.
그저 밧줄을 잡았을 뿐인데, 빠드득 소리가 나며 밧줄의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은것만 같은 한혜원은 저도 모르게 밧줄에서 손을 뗐다.
"...오케이. 알았어요. 대신, 꼭 이기는 겁니다."
선두에서 비킨 한혜원은 이 대리를 스쳐지나 뒷편으로 가며 당부했다.
그녀의 질문에 이 대리는 아주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지은며 대답했다.
"보여준다, 내가."
이 대리의 말이 끝나고, 한혜원이 밧줄을 잡자, 기다렸다는 듯 호각이 울렸다.
삐이익-!
승리를 향한 첫 나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