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화
01. 인생 3회차 (3)
박유성 - 시즌 끝나고 한국 들어 올 거지?
박유신 - 포스트 시즌은 물 건너갔으니까. 바로 들어가려고.
박유성 - 그래. 일찍 넘어 와라. 나하고 특훈 좀 하자.
박유신 - 또?
박유성 - 이 자식이 기껏 메이저리그 보내 놨더니 빠졌네. 너 그래서 MVP 타겠냐?
박유신 - 어휴. 그놈의 MVP 타령.
박유성 - 까불지 말고 형이 시키는 대로 해. 내 말 들어서 손해 본 거 있어?
박유신 - 네에. 네에. 그럼요. 형님이 최고죠.
“알면 됐다. 이놈아.”
박유신에게 아침 식사를 권한 뒤 박유성은 노트북을 켜고 베이스볼 파크에 접속했다.
평소 커뮤니티를 자주 들여다보지는 않지만.
정규 시즌이 끝났고 은퇴의 기로에 선 터라 팬들의 의견을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검색창에 박유성을 집어넣고 엔터키를 누르자 제법 많은 게시글들이 떠올랐다.
그 중에서 박유성의 시선을 잡아 끈 건
982914 박유성은 1년 더 뛰어도 되겠는데? [132]
라는 게시글이었다.
솔직히 오늘 박유성 아니었으면 졌다 인정?
나이를 떠나서 올 시즌 박유성만큼 해준 타자 생각해 봐.
박유성 잡아야 한다니까?
만에 하나 박유성 다른 팀가면 두고두고 후회함.
반박시 니 말이 맞음.
“뭘 좀 아네.”
본문 내용은 김재혁 단장에게 보여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밑에 달린 댓글들은 박유성에게 다시 한 번 현실을 일깨워줬다.
ㄴ장태수도 은퇴하는 마당에 박유성 재계약 하자고? ㅋㅋㅋ 최소 박유성 가족이거나 지인일 듯.
ㄴ박유성 선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ㄴ박유신 선수. 형 걱정할 시간에 다저스 걱정부터 하세요.
ㄴ난 진짜 박유성무새들 이해가 안 간다. 현역 연장하고 싶으면 방출해달라고 해. 그래야 주제파악을 하지.
ㄴ박유성 올 해 잘 해준 거 인정. 하지만 내년에 마흔인 것도 팩트. 전성기 지난 것도 팩트.
ㄴ올 초에 박유성 받고 나서 준주전급들 단체로 트레이드 요청한 거 까먹었냐? 계약 연장하면 진짜 알짜배기들 다 나갈지도 모른다.
ㄴ유성이 형. 형은 이제 은퇴하고 해설을 하자. 그게 맞아.
중간중간에 옹호하는 댓글이 섞여 있긴 했지만.
100개가 넘는 댓글 대부분이 은퇴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제법 긴 댓글이 박유성의 마음을 후벼 팠다.
ㄴ내가 파이터즈 때부터 박유성 팬이었는데 박유성은 애당초 길을 잘못 든 느낌이야. 신인 때는 좀 날쌘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평범한 중거리 타자가 되더라고. 올 해 타격 스타일을 바꾸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경쟁력이 없어. 그냥 유종의 미를 거뒀다 정도? 이병구나 백용택처럼 갔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지.
“X발.”
박유성은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때 박유성의 롤모델은 기정후였다.
바람의 아들이라 불리던 레전드 기종범의 위대한 유산 기정후.
정확도 높은 타격으로 단숨에 주전 자리를 꿰찬 데 이어 장타력을 겸하더니 5툴 플레이어로 각광받으며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한 모습을 보며 제 2의 기정후를 꿈꿨다.
하지만 정확도 높은 타격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장타력은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2회차 들어 장타력 쪽에 비중을 높였던 건데.
이도저도 아닌 타자로 전락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 애당초 스텟이라는 게 정해져 있던 거야. 난 정확 빼서 힘에 투자한 거고.”
박유성이 나직이 푸념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이번에는 좀 편하게 야구했잖아? 장타 욕심 부리느라 타격 폼만 바꾸지 않았더라도 성적이 더 잘 나왔을 걸? 맞네! 확실히 2회차들어 야구가 늘었어!”
1회차 시절.
박유성은 18시즌을 소화하며 통산 2216개의 안타와 0.310의 타율, 그리고 522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이중 박유성을 대표하던 기록은 프로야구 통산 2위에 빛나는 도루였다.
3년 연속 50도루 플러스를 포함해 5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거머쥐었을 만큼 박유성 하면 도루였고 도루하면 박유성이었다.
3할이 넘는 통산 타율(프로야구 전체 30위)도 대단했지만 전문가들은 박유성의 장점으로 빠른 발을 꼽았다.
‘내야 안타만 400개를 넘게 쳤으니까.’
은퇴 후 한 야구 전문 프로그램에서 내야 안타를 제외한 타율을 구했는데 0.253이라는 충격적인 숫자가 나왔을 정도.
그만큼 1회차 시절 박유성은 발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면 장타력에 목을 맸던 2회차 시절에는 20시즌 동안 2445안타와 334홈런에 0.286의 타율을 기록했다.
1회차와 가장 큰 차이라면 도루와 홈런.
1회차 때 9개였던 홈런이 37배 늘어나는 동안 522개였던 도루는 1/4 가까이 줄어들었다.
‘안타 수야 두 시즌 일찍 1군에서 뛰었으니까 늘어난 거고. 성적만 놓고 보자면 1회차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내야 안타를 생각 못했네?’
박유성은 핸드폰으로 야구백과사전이라는 어플에 접속했다.
ㄴ박유성, 통산 내야안타.
질문을 남기자 10초 쯤 뒤에 답이 올라왔다.
ㄴ박유성(트윈스) 선수의 통산 내야안타는 106개입니다.
“어이구. 그 와중에 100개나 쳤어?”
생각보다 많긴 했지만 1회차 시절 408개와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혹시 이것도 구해지나?”
박유성은 어플에 다시 질문을 올렸다.
ㄴ박유성, 내야안타 제외 타율.
잠시 후.
ㄴ내야안타를 아웃 처리했을 경우 0.274
ㄴ내야안타를 배제했을 경우 0.277
조건에 따른 두 개의 답이 올라왔다.
“1회차 하고 비교하자면 0.274인데 그럼 2푼 넘게 올랐잖아? 이거 3회차 가면 기본으로 3할 깔고 가는 거 아냐?”
박유성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프로야구 통산 타율 1위는 기정후.
테임스에 할푼리모도 아닌 사(소숫점 5번째 자리) 차이로 토종 타격왕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만약에 3회차를 살게 되고 계산대로 3할을 깔고 갈 수 있다면?
내야안타 여부에 따라 기정후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와, 씨. 술이 확 깨네.”
장태수가 옆에 있다면 개소리 늘어놓지 말고 취했으면 곱게 퍼 자라고 핀잔을 줬겠지만 박유성은 이 들뜬 기분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
“기정후 선배까지는 갈 필요도 없어. 유신이 녀석 프로야구 통산 타율이 0.345였으니까 그것만 넘어도 메이저리그 갈 수 있다고.”
1회차 시절 박유성이 그토록 갈망하던 제 2의 기정후라는 타이틀은 2회차 박유신이 가져갔다.
다저스에 입단하기 전까지 5시즌을 뛰면서 통산 0.345의 타율과 162개의 홈런을 때려내면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 정확도와 장타력을 겸비한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아시아 선수들의 실력을 평가절하하는 메이저리그 주요 매체들조차 박유신의 3할 타율 달성을 긍정적으로 전망했을 정도.
“유신이도 내야 안타는 많은 편이니까 충분히 해볼 만해.”
2043시즌 박유신처럼 45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건 무리일지 몰라도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에 갈고 닦은 타격 기술이라면 타율만큼은 어떻게든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진짜 한 번만 다시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박유성이 불 꺼진 천정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2회차를 살게 된 것도 기적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3회차도 한 번 노려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2회차를 어떻게 시작했더라?”
잠시 머릿속을 더듬던 박유성은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두 개 더 가져왔다.
오래 전 일이라 다소 왜곡됐을 수도 있겠지만 1회차 시절 은퇴 후에 깡소주를 까며 신세한탄을 했던 기억이 났다.
“소주 대신 맥주이긴 하지만 한 번 해 보자.”
2회차 주량은 맥주 두 캔 정도.
한 캔을 마시면 기분 좋게 취하고 두 캔을 넘어가면 다음날 골이 지끈거려서 그 이상은 거의 마시지 않는 편이지만.
1회차 때 상황을 재현하려면 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우 죽겠다.”
앞서 한 캔에 이어 두 캔을 연달아 들이켜자 취기가 확 오르더니 급소변이 마려웠다.
“젠장. 이게 아닌가?”
박유성이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바지와 팬티를 대충 내리고 조준을 하려는데 머리가 핑 돌아서 변기에 털썩주저앉았다.
“에이, 모양 빠지게······.”
평소 앉아서 소변을 눈다는 장태수에게 남자 망신 다 시킨다고 혀를 찼던 게 생각났지만 이미 시동이 걸린 터라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형. 혀어엉.”
앳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뭐, 뭐야?”
깜짝 놀란 박유성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커녕 결혼조차 하지 않았는데 앳된 목소리가 들리니 등골이 오싹해진 것이다.
그 때 쾅쾅, 하는 문소리와 함께 다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형아아아. 나 쌀 거 같아. 빨리이이.”
“형아? 잠깐. 이 목소리는?”
불현 듯 박유성의 머릿속으로 2회차가 시작되던 때가 떠올랐다.
분명 그 때도 어린 시절의 박유신이 자신을 깨웠던 기억이 있었다.
“뭐야? 그러니까 진짜 3회차가 시작된 거야?”
박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낯설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공간은 예전에 살았던 집의 화장실이 틀림없었다.
“잠깐만. 이거 진짜?”
박유성은 허겁지겁 세면대 앞에 섰다.
그리고 까무잡잡해진 얼굴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크으으! 됐다! 됐어!”
애늙은이 소리를 듣긴 했지만.
제 2의 기정후를 꿈꾸던 그 시절로 돌아온 것이다.
그 때 다시 박유신이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어, 그래. 잠깐만!”
박유성이 문을 열어주자 박유신은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게 열어어!”
“이게 형한테 까불어?”
“얼른 나가아. 나 큰 거 쌀 거야.”
“빨리 싸고 나와라.”
박유신이 볼일을 마치고 나올 때 까지 박유성은 화장실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박유신이 밖으로 나오자 번쩍 들어 안고는 씩 웃었다.
“뭐야아. 내려 줘어어.”
“짜식이 좋으면서. 너 인마 왜 이렇게 가벼워졌냐? 이래서 메이저리그 가겠냐?”
“뭐래. 나 프리미어리그 갈 거거든?”
“뭐 인마?”
순간 박유성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박유신의 꿈은 제 2의 송흔민이었다.
아버지의 오랜 꿈이 야구 선수와 축구 선수를 한 명씩 키우는 거라 박유신에게 강제적으로 송흔민 하이라이트를 보게 한 결과물인데 2회차 시절 박유신을 생각한다면 어림 반 푼도 없는 소리였다.
“박유신. 까불지 말고 형이 시키는 대로 해. 알았어?”
“시룬데? 아빠 말 들을 건데?”
“이게 아주 맞을 소리만 골라서 하지?”
2회차 시절의 박유신은 말을 참 잘 들었었는데.
그 때처럼 만들려면 잘 가르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이 며칠이냐?”
“형은 날짜도 몰라? 10월 2일이잖아!”
“10월 2일?”
박유성은 박유신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갔다.
“이상하다. 이때가 아니었는데?”
2회차 때는 분명 2학년 겨울 방학 직전으로 돌아왔었는데 3회차 시작 시점이 조금 앞당겨져 있었다.
“뭐지? 설마 개꿈인가?”
혹시 몰라 볼을 한 번 꼬집어 봤는데 아팠다.
“꿈은 아닌 거 같은데. 진짜 뭐지? 이 때 뭐가 있었나?”
박유성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달력을 찾았다.
보험 회사에서 준 탁상용 달력에 중요한 일정 같은 걸 기록하던 습관이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뭐지 이건? G는 경기 같은데 태산? 아, 태산하고 연습 경기!”
오늘로 돌아 온 이유를 알아챈 박유성이 씩 웃었다.
라이벌인 태산 고등학교와의 연습 경기에서 실력 발휘를 할 수만 있다면?
이번 3회차도 술술 풀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