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1화 (11/412)

타자 인생 3회차! 11화

02. 뭐야, 저 녀석? (5)

그 예상대로 2회 초 태산 고등학교의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이 났다.

4번 타자 유진욱을 중견수 뜬공으로 잡아낸 손지원이 5번 타자 조혁과 6번 타자 송지민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유진욱에게 큼지막한 타구를 얻어맞았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박유성이 침착하게 백스텝으로 잡아내면서 분위기를 지켜냈다.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김민철 감독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 코치.”

“네. 감독님.”

“애들 연습 안 시켰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들 저래? 밥을 부실하게 먹인 거야?”

“아직 경기 초반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한 타순 돌면 달라질 겁니다.”

한우열 수석 코치가 달래듯 말했다.

어처구니없게 한 점을 내주기는 했지만 김진수의 공이 좋은 만큼 중반으로 넘어가면 얼마든지 점수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민철 감독이 원하는 건 치열한 승리가 아니라 압승이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3학년 선발 나왔어? 올 해 불펜으로만 뛰었던 2학년이잖아! 저런 녀석을 상대로 안타 하나 못 때린다는 게 말이 돼?”

1회부터 손지원을 시원하게 두들기고 강판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왔건만.

2회까지 안타 하나 때려내지 못하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게다가 태산 고등학교의 하위 타선은 식물 타선이나 다름없었다.

수비는 좋으나 타격이 아쉬운 2학년 두 명에 수비형 포수 김세찬까지.

3회 초 공격마저 삼자범퇴로 끝난다면 경기의 1/3을 안타 없이 날리는 꼴이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애들 좀 다독이겠습니다.”

“진즉에 그렇게 해야지. 수석 코치랍시고 뒷짐만 지고 있으면 돼?”

“네.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다가 괜히 한 소리 들은 한우열 수석 코치는 수비에 나서려던 선수들을 불러놓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혁아.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공을 놓치면 대체 뭘 치겠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내가 어려운 거 요구했어? 실투는 놓치지 말자고 했잖아. 아니야?”

“다음번에는 꼭 치겠습니다.”

“그리고 지민이 너.”

“죄송합니다. 코치님.”

“무슨 말을 했는데 죄송하대? 진짜 이 녀석들이 좋게 말로만 하니까 코치가 우습지?”

“아닙니다!”

“오늘 중요한 경기야. 절대 지면 안 되는 경기라고.”

“넵!”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상대 투수는 진수하고 달라. 전국 대회 경험도 없는 2학년이라고.”

순간 김진수가 피식 웃었다.

자신은 청라 고등학교 시절 전국 대회에서 세 번이나 등판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3학년이라는 이유로 선배들을 챙기는 박재혁 감독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다른 학교 2학년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출전 기회를 보장받았던 게 사실이다.

덕분에 청라 고등학교를 나왔을 때 여러 학교에서 연락이 왔었고.

그 중에서도 인프라가 좋고 에이스로 밀어주겠다는 태산 고등학교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태산도 신성도 별 거 없다니까?’

마운드에 오른 김진수는 특유의 약자멸시 모드를 발동했다.

만만하다 싶은 타자들을 상대로 칠 테면 쳐 보라며 철저하게 정면 승부를 펼친 것이다.

그렇게 5번 타자 홍선우부터 9번 타자 이재윤까지 5타자를 범타로 돌려 세운 김진수의 앞으로 박유성이 나타났다.

“저건 또 뭐야?”

박유성의 손에 들린 빨간 색 방망이를 보며 김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패션 아이템도 아니고 타석마다 방망이를 바꿔 드는 게 같잖게 느껴졌다.

하지만 기정후의 방망이를 얻은 박유성은 한껏 신이 나 있었다.

“그래. 이 거지.”

급하게 손질만 했는데 손에 착 감기는 게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유비에게는 제갈량이요 관우에게는 적토마라고나 할까.

“관우가 아니라 여포였나?”

타석에 들어 선 박유성은 보란 듯이 루틴을 돌렸다.

오른 발로 바닥을 다지고.

방망이를 쭉 뻗어 오른 쪽 타석 안쪽 선을 콕콕 두드린 뒤에 타격 위치를 잡고.

뒷다리를 바닥에 파묻은 다음 방망이를 한 바퀴 빙글 돌렸다가 어깨에 툭 하고 걸쳤다.

그러자 발끈한 김진수가 또 다시 얼굴 쪽으로 위협구를 던졌다.

“어이구야.”

김진수의 손이 옆구리를 빠져나오는 순간 빈볼임을 직감한 박유성은 여유롭게 상체를 비틀었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헐리우드 액션을 선보일까 잠깐 고민했지만.

1대 0으로 이기고 있고 홈경기에 먼저 빌미를 제공한 만큼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런 박유성을 힐끔 바라 보던 구심이 대신 앞으로 나왔다.

“마지막 경고야. 다음번에는 퇴장이다.”

프로 야구나 정식 경기였다면 곧바로 레드카드를 꺼내들었겠지만 연습 경기이고 아직 미숙한 아마추어들의 경기이다 보니 구심도 한 번 더 옐로우 카드를 꺼내들었다.

구심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던 김진수가 박유성을 향해 마지못해 사과의 제 스처를 보였고.

박유성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을 들어주면서 다시 경기가 재개됐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넘겼다고 해서 정말 아무 일이 없게 된 건 아니었다.

원 볼로 볼카운트가 불리해지면서 김진수와 김세찬은 다음 공을 두고 한참을 다퉜다.

김진수는 그냥 몸 쪽으로 승부를 보겠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김세찬은 바깥쪽으로 하나 빼야 한다며 버텼다.

‘첫 타석에서도 몸 쪽 공은 전부 걷어냈어. 2사 이후이긴 하지만 괜히 내보내면 골치 아파진다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하던 둘은 결국 몸 쪽 싱커로 타협을 봤다.

김진수가 원하는 몸 쪽 코스에 김세찬이 원하는 유인구가 결합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진수의 손 끝을 빠져나온 공은 김세찬의 요구보다 높게 제구가 됐고.

‘이게 웬 떡이냐?’

박유성이 딱 치기 좋은 코스로 날아들었다.

따악!

박유성이 힘껏 휘두른 방망이 중심에 정확히 찍힌 공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크으. 바로 이 맛이야.”

홈런임을 직감한 박유성은 배트를 뒤쪽으로 내던지며 천천히 1루 베이스를 향해 뛰었다.

그런데······.

“뭐야?”

펜스를 넘어야 할 타구가 펜스 앞쪽에서 뚝 하고 떨어졌다.

“헐, 이게 안 넘어간다고?”

뒤늦게 시동을 건 박유신은 일단 2루까지 내달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루 쪽 더그아웃을 향해 양 손 검지를 뻗어 들었다.

하지만 요란스러운 빠던 때 더그아웃 앞까지 몰려나와 타구를 지켜봤던 선수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유성이 쟤 뭐하냐?”

“설마 홈런을 기대한 거야?”

“크흐흐. 근데 안 넘어간 게 더 웃기지 않냐?”

“그러게. 나도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안 넘어가네?”

“야. 홈런은 아무나 치냐?”

“우리 유성이는 안타만 쳐.”

“그래. 안타만 치자. 유성아.”

김진수가 후속 타자 오진욱을 2루수 땅볼로 유도하며 3회 말 신성 고등학교의 공격은 무득점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박유성은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불려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막 던지라고 준 배트가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그럴 거면 홈런을 치던가.”

“다음번에는 꼭 치겠습니다!”

“말은 잘 하지.”

얄미운 박유성의 입술을 꼬집을까 했던 김석률 수석 코치가 이내 어깨를 두드렸다.

비록 2루타에 그쳤지만.

투 아웃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장타를 때려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다만 아쉬운 건 빠던 후 타구를 지켜보며 시간을 끌었다는 점이다.

1대 0으로 앞서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반대 상황에서 그랬다간 두고두고 욕을 먹었을 터.

“그리고 타구 지켜 볼 시간에 일단 뛰어라. 네가 제대로 뛰었으면 3루까지도 충분히 살아 들어갔을 거야.”

“넵. 코치님.”

“내가 무엇을 지적하는지 이해했어?”

“제가 3루에 갔다면 김진수도 공을 던지기가 까다로웠겠죠. 다음 타자가 태수니까 어떻게든 진욱이하고 승부를 보려고 했을 테고요. 그러다보면 기회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

노파심에 한 마디만 더 하고 끝내려 했던 김석률 수석 코치는 순간 기가 찼다.

그러니까 다 알고 있었던 거다.

알면서 안했던 거다.

“너는 좀 혼나야겠다.”

“네?”

“주둥이 가져 와.”

“웁!”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의 입술을 한참동안 쥐어뜯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승균 감독과 코치들은 다들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손을 뻗는 순간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혼 날 거면 수석 코치님께 혼나는 게 낫지.’

코치를 가리는 게 아니라 김석률 수석 코치는 신성 고등학교의 모든 코치들과 선수들이 따르는 지도자였다.

일찍 은퇴하긴 했지만 프로에서 통산 3할을 쳤을 만큼 실력도 좋았고 일본과 미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아마추어 현장부터 경험을 쌓겠다며 프로 구단의 제안을 뿌리칠 만큼 강단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김석률 수석 코치는 선수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

나승균 감독을 시작으로 코치들조차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학부형이 있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그런 게 일절 없었다.

야구를 잘 하건 못 하건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는 다 똑같은 선수였다.

다만 열심히 하지 않는 선수에게는 그 누구보다 엄하게 혼을 냈다.

다른 선수들보다 늦게 외야로 뛰어 나온 박유성은 애꿎은 펜스를 노려봤다.

“왜 쓸 데 없이 뒤로 민 거야?”

정확한 비거리를 측정한 건 아니지만

박유성이 입학하기 전 주기적으로 주차장 차량을 파손하던 시절의 펜스였다면 잔소리 대신 칭찬을 들었을 텐데.

“두고 봐. 올 겨울에 빡세게 훈련 한다.”

허무하게 잃어버린 홈런을 되찾기 위해 박유성이 까득 이를 갈았다.

그 시각.

관중석 구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박원호 과장은 방금 전 박유성의 플레이를 곱씹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 대리. 만약에 다른 선수였으면 2루까지 들어갈 수 있었을까?”

“당연히 들어가죠. 우익수 키를 넘기는 타구였잖아요.”

“그 소리가 아니라 저 녀석, 처음에 술렁술렁 뛰었잖아. 1루에 거의 도착할 때 쯤부터 정신 차리고 달렸고.”

“그냥 처음부터 뛰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하아.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니?”

좀처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부하 직원에게 한숨을 내쉬던 박원호 과장은 다시 눈을 옮겨 박유성을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펜스 근처까지 물러났던 녀석이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외야 중간 지점까지 내려와 있었다.

반면 다른 외야수들은 제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박유성이 전진 수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이러면 벤치에서 지시가 나온 게 아닌 거 같은데······.’

박원호 과장의 시선이 다시 박유성에게 향했다.

그 때 따악, 하는 파열음이 터졌고.

새하얀 타구가 좌중간으로 날아갔다.

‘저건 못 잡겠는데?’

박원호 과장은 공이 빠질 거라 예상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야구를 했고 현재도 사회인 야구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봤을 때 코스가 너무 좋았다.

그나마 좌익수가 타격과 동시에 스타트를 끊은 거라면 모르겠지만.

프로 레벨도 아니고 이제 막 3학년이 되는 고등학교 선수들에게 그 정도 수비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분명 무리였는데······.

“뭐야? 잡았어?”

시야 밑쪽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슬라이딩을 하며 타구를 건져 올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