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2화 (12/412)

타자 인생 3회차! 12화

02. 뭐야, 저 녀석? (6)

박원호 과장이 놀란 눈으로 최영규 대리를 바라봤다. 그러자 최영규 대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저도 모르죠.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어휴. 진짜 너는 여기 왜 왔냐?”

“비서실 연락 받고 온 거잖아요.”

“그 지시를 누가 내렸을 거 같은데?”

“비서실장?”

“하아. 넌 그냥 가라.”

“정말요?”

“그래. 가서 사표나 써.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박원호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최영규 대리가 박원호 과장을 붙잡았다.

“어디 가시려고요?”

“잘 안 보여서 나가서 보련다. 왜?”

“비서실에서 몰래 지켜보고 오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막 지시 어기시면 안 되죠.”

“너나 잘 하세요.”

신성 고등학교 야구장 외야 코너에는 야구 관계자들을 응대하기 위한 별도의 관중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야구장에서 올려다볼 때는 벽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중간 중간에 끼워진 유리창을 통해 플레이를 지켜 볼 수 있는데 그 사각 때문에 방금 전 박유성의 플레이를 놓치고 만 것이다.

“비서실에서 왜 보냈는지도 모르는 놈이 비서실 타령은.”

회장실 비서실에서 경기를 지켜보라는 지시를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상대 팀이 태산 고등학교이기 때문이다.

다음 주 정경련 모임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태산 그룹을 상대하려면 정확한 데이터가 필요했다.

신성 그룹에서 대놓고 경기를 지켜보다가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놀림거리가 될 거라 조용히 관찰하라는 지시가 덧붙은 거지만 박원호 과장은 이미 신성 고등학교 쪽으로 분위기가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안타성 타구들이 전부 잡혀 버리면 경기를 이길 수가 없지.”

박원호 과장은 당당히 시야가 트인 관중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태산 고등학교의 2번 타자 홍세혁은 유격수 땅볼로 아웃이 됐고.

3번 타자 김재석이 타석에 들어왔다.

“후우······.”

마운드 위에 선 손지원이 길게 숨을 골랐다.

수비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11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동안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김재석을 힘으로 이겨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포수 김 산도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싶었다.

‘김재석도 우리와 똑같은 2학년이야. 잡을 수 있어.’

가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김 산이 몸 쪽 빠른 공 사인을 냈고.

단단히 고개를 끄덕인 손지원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손지원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몸 쪽으로 날아들자 김재석은 망설이지 않고 허리를 돌렸다.

따악!

청명한 타격음이 경기장을 쩌렁하게 울렸고.

총알처럼 날아간 타구는 그대로 펜스를 직격했다.

“빠졌다!”

“달려! 달려!”

팀원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김재석은 1루를 찍고 2루로 돌았다.

슬라이딩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유니폼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김재석은 그대로 뛰어 달렸다.

타구가 펜스까지 뻗어 나갔으니 조금 여유를 부려도 문제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신성 고등학교 2루수 오진욱이 베이스 커버를 들어왔다.

그리고 저만치 3루 베이스 코치의 다급성이 들려왔다.

‘뭐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재석은 외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타앗!

외야 어딘가로부터 날아온 공이 잔디를 때리더니 그대로 오진욱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 말도 안 돼!’

김재석이 다급히 몸을 던졌지만 태그 준비까지 마친 오진욱을 뚫어내지 못했다.

“아웃!”

2루심의 단호한 콜과 함께 태산 고등학교 더그아웃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반면 신성 고등학교 선수들은 서로 파이팅을 외치며 신을 냈다.

“저 녀석 진짜 물건인데?”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지켜 본 박원호 과장은 무릎을 탁 하고 쳤다.

현재 신성 고등학교 전력은 냉정하게 봤을 때 서울 지역 중위권이었다.

서울 팀들이 지방 팀들보다 전력이 좋아서 전국적으로 따지면 중상위권까지 올라가겠지만 전국대회 8강은 쉽지 않아보였다.

그래서 장태수 말고는 눈에 띨 만한 선수가 없을 줄 알았는데.

“중견수 이름이······ 박유성. 외워둬야겠어.”

박원호 과장이 전광판을 확인하며 웃었다.

뭔가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김민철 감독도 뒤늦게 박유성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 정체가 뭐야?”

처음에 고연규가 좌중간으로 타구를 날렸을 때 김민철 감독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선두 타자 고연규가 나갔으니 이번 이닝에서 최소한 동점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타구를 박유성이 그림 같은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면서 모든 게 꼬여버렸다.

입학할 때부터 번트 하나는 기가 막히게 댔던 홍세혁은 희생번트를 성공시킬 기회를 날렸고.

펜스까지 날아가는 장타를 때려낸 김재석도 타점을 올릴 기회를 날렸다.

그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미는데 완벽한 보살로 김재석을 2루에서 잡아내는 걸 보니까 정말 고등학생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그러자 민호석 타격 코치가 눈치 없이 입을 열었다.

“중견수 말씀하시는 거라면 박유성입니다.”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래? 저 녀석 뭐냐고!”

“그게······ 저렇게까지 잘 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민호석 타격 코치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신성 고등학교 2학년들 중에 주의해야 할 선수 중 한 명으로 꼽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구색 맞추기일 뿐.

장태수 말고는 신경 쓸 선수가 없다고 여겼는데 김진수를 상대로 2안타를 때 려낼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김민철 감독이 듣고 싶은 대답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게 지금 코치가 할 소리야?”

“네?”

“지금 그게 할 소리냐고! 당신 지금 나하고 장난해? 내가 우스워?”

“그게 아니라······.”

괜히 불똥이 튀자 민호석 타격 코치가 냉큼 고개를 숙였고.

한 발 물러나 있던 한우열 수석 코치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대신 입을 열었다.

“진정하십시오. 감독님. 아직 경기중입니다.”

“경기는 무슨 경기! 고작 이런 경기를 보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2루에서 죽긴 했지만 타자들이 손지원의 공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고작 한점 차이니까 바로 뒤집을 겁니다.”

“확실해? 장담할 수 있어?”

“손지원은 첫 선발 경기입니다. 게다가 진수처럼 미리 준비를 한 것도 아니니까 곧 힘이 빠질 겁니다.”

반쯤은 흥분한 김민철 감독을 달래기 위해 한 말이지만 실제로 손지원은 공식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한 적이 없었다.

자체 청백전을 통해 선발 경험을 쌓긴 했겠지만 그 정도로는 오늘 같은 경기에서 5이닝 이상을 던지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김진수는 청라 고등학교 시절부터 일찌감치 선발 자원으로 커 왔으니 이 닝이 거듭될수록 선발 투수간의 역량 차이가 벌어질 거라 여겼다.

그 예상대로 투구 수 60구를 넘긴 5회 초부터 손지원은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최고 152km/h까지 던질 수 있다던 포심 패스트 볼 구속은 140km/h 중반까지 떨어졌고.

덩달아 날카롭던 슬라이더의 각도 무뎌졌다.

손지원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커브와 체인지업 비중을 높였지만 포심 패스트볼의 위력이 떨어지면서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따악!

김재석에게 가려졌지만 한 방 능력을 갖추고 있는 유진욱은 바깥 쪽 포심 패스트 볼을 밀어 쳐 좌중간 깊숙한 타구를 날렸고.

따악!

지명 타자로 출전한 조 혁도 바깥쪽으로 밋밋하게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우중간을 열었다.

거기에 미래의 4번 타자 감으로 키우고 있는 1학년 우익수 송지민까지 3유간을 꿰뚫는 안타를 때려냈지만 스코어는 변하지 않았다.

안타가 되어야 할 유진욱과 조 혁의 타구를 박유성이 가볍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미치겠군.”

뒤이어 타격적으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1학년 안혜수까지 2루수 옆으로 빠지는 안타를 때려내자 김민철 감독이 짜증을 내뱉었다.

앞선 두 개의 플라이 중 하나만 안타가 됐어도 한 점을 만회하고 1사 1,2루였을 텐데.

2사 1,2루 상황에서 수비형 포수라 평가받는 김세찬의 타석이다 보니 답답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한 코치.”

“네. 감독님.”

“대타 준비시켜.”

“대타요?”

“그럼? 이 기회를 이대로 놓칠 거야?”

“하지만 세찬이가 빠지면······.”

“원형이 있잖아!”

김민철 감독이 버럭 소리쳤다.

팀에 포수가 없는 것도 아닌데 딴 소리를 늘어놓는 한우열 수석 코치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한우열 수석 코치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수석 코치로서 말려야 하는 결정이었지만 이대로 경기를 내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김민철 감독을 이성적으로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주전 포수 김세찬을 대신해 콘텍트 능력이 좋은 1학년 황호준이 타석에 섰다.

그리고 황호준은

따악!

손지원의 초구를 때려 중견수 오른 쪽으로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2루 주자를 홈으로 돌리는 게 정석이었지만 앞서 김재석을 횡사시킨 박유성의 송구 때문일까.

“스톱! 스톱!”

3루 베이스 코치가 다급히 송지민을 멈춰 세웠다.

“쳇.”

송지민이 홈으로 뛰면 잡아 보려고 도움닫기까지 했던 박유성이 혀를 찼다.

그리고는 내야 근처까지 내려온 김에 손지원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지원아! 첫 승리까지 아웃 카운트 하나 남았다.”

“······!”

공식 경기도 아니고 고작 연습 경기였지만.

신성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선발로 나선 손지원은 꼭 승리 투수가 되고 싶었다.

‘무조건 잡는다.’

잠시 전광판을 확인한 손지원은 마운드 뒤쪽으로 내려가 로진백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2사 만루 상황에서 등장한 9번 타자 민찬희의 몸 쪽에 149km/h짜리 포심 패스트 볼을 꽂아넣었다.

“나이스 피칭!”

“공 좋다! 하나 더!”

팀원들의 목소리에 힘을 얻은 손지원은 젖먹던 힘을 다해 공을 던졌고.

퍼엉!

묵직한 포구성과 함께 꽂힌 공은 오늘 경기 최고 구속인 151km/h를 찍었다.

“갑자기 왜 이래?”

민찬희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3루 쪽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손지원이 어렵게 승부할 거라는 민호석 타격 코치의 조언만 믿고 초구와 2구를 지켜봤는데 연달아 스트라이크가 들어 왔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민호석 타격 코치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저 멍청한 놈. 그렇다고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공을 놓치면 어쩌자는 거야?”

초구는 코스가 까다로웠다 하더라도 2구는 거의 한 가운데로 몰리듯 들어왔다.

말 그대로 배짱으로 던진 공인데 그걸 지켜보기만 했으니 한숨이 절로 났다.

민찬희에 대한 신뢰를 잃은 민호석 타격 코치는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보고 대처하라는 뻔한 사인을 냈고.

그 사인에 맞춰 바깥 쪽 슬라이더를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던 민찬희는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크아아아!”

제 손으로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 손지원이 사자처럼 포효했고.

2사 만루라는 천금같은 득점 기회는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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