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7화
03. 비결이 뭐야? (4)
“죄송합니다. 감독님.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죠?”
“나도 그러고 싶은데 좀 급한 일이라서.”
“됐어. 싫다는 사람 놔두고 우리끼리 가자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백광식 수비 코치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한우열 수석 코치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끈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김민철 감독에게 붙은 백광식 수비 코치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코치실로 들어간 한우열 수석 코치는 새 유니폼과 새 운동화를 신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몇 번이고 돌아본 뒤 김민철 감독과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음 날.
“김 코치!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이요?”
“태산 김 감독이 짤렸다네.”
“김민철 감독 말입니까?”
“그래! 유성이 가지고 염병을 떨더니 꼴좋게 됐어. 크하하하.”
나승균 감독을 통해 태산 고등학교의 사정이 전해졌다.
설마하니 연습 경기로 감독이 잘릴 줄 몰랐던 코치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그 경기 때 졌으면 우리 목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던 거네요?”
“모르지. 태산처럼 감독님만 위험했을 수도 있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감독이 바뀌면 우리라고 자리보전 할 수 있을 거 같아?”
“수석 코치님 정도라면 몰라도 나머진 다 짐 싸야죠. 아니면 남아서 눈칫밥먹거나.”
“태산 코치들도 지금 눈앞이 캄캄할 걸?”
“그런데 태산 새 감독은 누가 온답니까?”
“한우열 코치 아닐까요?”
“태산 수석 코치?”
“네. 김민철 감독도 전 감독 밑에서 코치했었잖아요. 우리 감독님도 그랬고.”
“지금까지 분위기대로라면 내부 승진이 유력하긴 한데 참······. 다음 번 신산전이 문제네.”
“느낌에 내년 주말리그 때는 태산하고 같이 묶일 거 같은데 말이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다른 학교들과의 형평성이 있는데 언제까지 편의를 봐줄 수는 없잖아.”
전반기와 후반기로 진행되는 주말 리그에 참가하는 서울 지역 학교는 총 24개.
8개 팀 씩 3개의 지구로 나눈 뒤에 각 지구 4위 팀까지 왕중왕전인 황금사자 기와 청룡기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어떤 지구에 배정되느냐에 따라 왕중왕전 진출 가능성이 달라졌다.
그래서 2025년부터 매 대회전에 지구 편성을 다시 하는 것으로 합의했지만 협회의 특별 관리 대상이었던 신성 고등학교와 태산 고등학교는 최근 3년 간 주말 리그에서 같은 지구에 편성된 적이 없었다.
만약 내년에도 서로 다른 지구에 편성된다면 분명 전력이 약한 학교들이 반발할 터.
분위기 상 김민철 감독 경질과는 상관없이 같은 지구로 몰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전반기보다는 후반기 쪽이겠죠?”
“연습 경기만으로도 이 난리를 쳤으니까 텀을 두겠지.”
“그런데 만약에 1승 1패를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야 모르지. 양쪽 다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양쪽 다 죽을 수도 있고.”
“어휴. 진짜 골치 아프네요.”
“골치 아프지. 다른 경기를 내주더라도 태산 전은 무조건 이겨야 하니까.”
코치들이 하나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나승균 감독 체제 이후 신성 고등학교에 합류한 터라 신산전에 대한 부담감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그 때 최윤석 타격 코치가 배성일 배터리 코치를 바라봤다.
“참, 배 코치. 유성이 말이야. 무슨 일인지 알아 봤어?”
“그거요? 감독님께 슬쩍 떠 보긴 했는데 입을 꾹 다무셨습니다.”
“입을 다물어? 그 말 많은 양반이?”
“뭔가 있는 거 같긴 한데 참······. 그렇다고 수석 코치님께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죠.”
박유성의 도핑 의혹을 두고 신성 그룹과 태산 그룹까지 움직였지만 정작 일선 코치들은 아는 게 없었다.
태산 고등학교 김민철 감독은 확실해 질 때 제대로 터트리겠다며 일부 코치들 과만 의견을 공유했고.
나승균 감독과 김석률 수석 코치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 철저하게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큰일은 아니겠지?”
“유성이 연습하는 거 보면 별 일 아닌 거 같긴 합니다.”
“지난 연습 경기 때 무리해서 검사 한 번 받아본 건지도 모르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고작 연습 경기 한 경기 뛰었다고 신성 병원에 간다고?”
“그 연습 경기 때문에 태산 감독 목이 날아갔잖습니까.”
“하긴. 듣고 보니까 또 그러네?”
“그런데 유성이 말입니다. 갑자기 왜 저렇게 잘 하죠?”
신기남 주루 코치가 슬쩍 운을 뗐다.
김석률 수석 코치가 가급적 터치하지 말라고 해서 최대한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데 수비와 베이스러닝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했다.
“나도 궁금해. 갑자기 뭔가 정신을 바짝 차린 거 같아.”
최윤석 타격 코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 고등학교와의 연습 경기 전까지 박유성의 타격은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성격이 급해서 공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몸 쪽이나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유인구에 방망이가 끌려 나가기 일쑤였는데 라식 수술이라도 받은 건지 갑자기 선구안이 눈에 띠게 좋아졌다.
나쁜 공에 속지 않으니까 타격 밸런스가 좋아지고.
좋아진 타격 밸런스로 타격을 하다 보니 타격의 질까지 높아졌다.
물론 박유성은 홈런을 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라이너 성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타구를 볼 때마다 최윤석 타격 코치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이민우 투수 코치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는 그 이유 압니다.”
“알아?”
“정말? 뭔데?”
“연습 경기 전에 수석 코치님이 유성이 엄청 혼냈거든요.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야구 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래? 수석 코치님이 그랬어?”
“모르긴 몰라도 집에 가서 엄청 울었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유성이 녀석 자존심 엄청 센 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석 코치님한테 그런 말 들었으니까 달라질 수밖에 없죠.”
“하긴. 수석 코치님은 못하는 건 이해해도 열심히 하지 않는 건 절대 용납 안하시니까.”
“근데 못하는 것도 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근데 수석 코치님 이야기 듣고 나니까 생각이 좀 달라지더라.”
“수석 코치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 선수들이잖아. 모두가 프로에 갈 수가 없는데 경쟁력이 없는 걸로 질책하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 결국 야구를 그만 두고 다른 진로를 찾아가야 하는 애들이잖아.”
“현실적인 이야기네요.”
“까놓고 우리 애들 중에 프로에 갈 수 있는 녀석이 몇이나 되겠어? 잘 해야 태수에······ 지원이 정도잖아?”
“유성이는요?”
“유성이야 지금처럼만 해 준다면 1차 지명도 가능하지. 어쨌거나 나머지 중 일부는 대학에 가서 야구를 계속하겠지만 대부분은 야구를 포기해야 하는데 야구 못하는 걸로 인생의 패배자를 만들지 말라고 하시더라. 솔직히 야구 못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죠. 프로야 프로니까 야구를 잘 해야 하는 거지만 아마추어 선수들은 다르죠.”
“그렇다고 못하는 애들을 포기하자는 건 아니니까 괜한 오해들 말고.”
“알죠. 수석 코치님 열정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도자로서 지론은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 김석률 수석 코치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해 왔다.
고집 센 나승균 감독이 엔트리는 물론이고 훈련에 대한 전권을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참, 최 코치님. 올 해도 먹자 캠프 하십니까?”
“어이고. 올해는 좀 쉬고 싶다. 방학 때 쉬지도 못하고 애들 먹이는 것도 일이야.”
“그래도 그 핑계로 애들 레슨 하시잖습니까.”
“식비에 레슨비 좀 더해봐야 남는 것도 없어. 애들이 얼마나 잘 먹는지 모르지? 작년에는 네 놈이서 돼지 열 마리는 먹어치웠다니까?”
“에이, 열 마리는 너무 과장 아닙니까?”
“아니라니까? 오죽하면 아버지가 애들 그만 데려오고 며느리 감이나 데려오라더라.”
올해로 38세인 최윤석 타격 코치는 신성 고등학교 코치들 중에서 유일한 솔로였다.
막내인 이민우 투수 코치도 내년에 결혼을 할 예정이고.
한 살 차이인 배성일 배터리 코치는 큰 애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반면 최윤석 타격 코치는 5년 째 연예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국제결혼 알아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국제결혼은 무슨. 나 아직 쓸 만해.”
“이제 곧 마흔이시잖습니까. 그럼 여자 나이도 서른다섯 쯤 될 텐데 2세를 생각하셔야죠.”
“어휴. 됐다. 저 녀석들 키우는 것만으로도 징글징글해.”
최윤석 타격 코치가 고개를 흔들었다.
결혼에 대한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그런데 최 코치님. 송현민하고 친한 거 사실이에요?”
“내가 말 안했어? 현민이 놈 내가 업어 키웠잖아.”
트윈스 송현민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2023년에 데뷔해 곧바로 신인왕에 골든 글러브를 거머쥐었고.
올 시즌에는 0.353의 타율과 45홈런으로 외국인 용병 타자들을 제치고 타격 3관왕(타율, 최다안타, 출루율)에 이름을 올랐다.
아직 공식 발표된 건 아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로 봤을 때 생애 첫 MVP 수상도 유력한 상황이었다.
이런 송현민과 최윤석 타격 코치가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얘기를 들어도 최윤석 타격 코치가 허풍을 떠는 거라는 반응들이었다.
“그런데 송현민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같은 팀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방금 말 했잖아. 현민이 녀석 업어 키웠다고.”
“송현민은 최 코치님 은퇴하고 나서 트윈스 입단한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같은 팀에서 뛴 적은 없지. 굳이 따지자면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랄까?”
“그래서 올 해는 송현민이 얼굴 좀 보여주시는 겁니까?”
“알잖아. 현민이 이제 메이저리그 준비해야 하는 거.”
“결국 송현민과의 친분은 계속해서 미스테리로 남겠네요.”
“거 참. 진짜라니까? 내가 뭐 통화라도 시켜 줘?”
“통화는 됐으니까 미국 가기 전에 우리 애들 원 포인트 레슨이라도 받게 해주세요. 혹시 압니까? 송현민 따라 메이저리그에 갈 녀석이 나올지?”
“현민이가 알려준다고 메이저리그 가면 우린 다 굶어 죽게?”
“최 코치님. 그러지 말고 힘 좀 써 보세요. 다른 학교들은 이맘때 쯤 선배들이 와서 야구 용품도 기부하고 코칭도 해 주고 하는데 우린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2019년에 창단한 신성 고등학교는 이제 겨우 8회차 졸업자를 낸 상태였다.
그 중 1회차와 2회차 졸업자들은 다른 학교에서 뛰다가 전학을 온 이들이었고.
순수 신성 고등학교 졸업자는 올 해 졸업자들을 포함해도 6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 중 프로의 지명을 받은 선수는 고작 일곱 명.
그나마 가장 잘 나가는 선수가 1군 백업으로 뛰는 상황이다 보니 다른 학교들처럼 선배 덕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태산도 마찬가지잖아.”
“태산은 그래도 프로 선수들 자주 부르는 편입니다. 올 해는 감백호를 초청했다는 얘기도 들리고요.”
“감백호? 태산이 무슨 수로 감백호를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