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9화
03. 비결이 뭐야? (6)
‘대표팀에서나 만날 줄 알았는데?’
박유성이 프로에 데뷔했을 무렵 송현민은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대표팀에서 서로 인사하고 연락처를 주고받기 전까지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송현민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이번 3회차 인생은 풀려도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송현민 선배님이 진짜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죠?”
“현민이도 현민이인데 걔네 에이전트가 더 난리라더라.”
“에이전트요?”
“현민이 말로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나름 알아준다던데? 이름이 뭐랬더라.”
“혹시 최상규요?”
“어, 그래. 최상규.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기사로 본 적이 있어요.”
“그래? 암튼 그 양반이 네 영상을 보고 극찬을 했다더라.”
최윤석 타격 코치가 좋은 기회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요즘은 고등학교 유망주들도 에이전트 계약을 하는 만큼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침까지 튀겼다.
하지만 박유성은 최상규와 계약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최상규와 잘못 엮였다가 송현민이 나락을 갔기 때문이다.
야구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송현민은 최상규에게 모든 걸 맡겼고.
최상규는 그런 송현민의 신뢰를 악용해 멋대로 코인을 사들였다.
단순히 코인 투자에 실패한 정도라면 또 모르겠지만.
최상규가 들어간 코인은 소위 말하는 작전 코인이었고.
최상규도 뒷돈을 대가로 송현민의 이름을 팔아 작전 세력에 힘을 보탰다.
자신의 이름을 딴 송현민 코인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송현민은 작전 세력이 코인을 던졌을 때 모든 피해자들의 원망의 대상이 됐고.
은퇴한 이후에도 메이저리거 송현민이 아니라 코현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게 됐다.
그래서 2회차 시절에 송현민에게 에이전트를 조심하라고 넌지시 언질을 주었지만.
“상규 형 그럴 사람 아니야.”
송현민은 철석같이 최상규를 믿었고.
1회차에 이어 2회차 때도 전 재산을 날리고 말았다.
‘그나마 내 말 듣고 재산을 조금 더 지키긴 했지만 그마저도 피해자들 구제하겠다고 내놓았으니까.’
에이전트 잘못 만난 죄로 송현민은 거의 모든 걸 잃었지만 최상규는 잘 먹고 잘 살았다.
무슨 백을 쓴 건지 재판에서도 집행 유예로 풀려났고.
야구계에 기생충처럼 붙어 있다가 박유신이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때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최상규를 만나던 날 박유성이 심심해서 따라 나가지 않았다면 아마 박유신도 송현민의 전철을 밟았을 터.
‘이번에는 확실히 뿌리 뽑자.’
박유성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송현민은 물론이고 박유신을 위해서라도 최상규를 내버려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네가 박유성이야?”
“네. 선배님.”
“이야. 이렇게 보니까 더 말랐는데?”
송현민이 에이전트 최상규와 함께 신성 고등학교를 찾아왔다.
“현민아. 일단 감독님께 인사부터 드리자.”
“그 전에 이 녀석 플레이 좀 보면 안 될까요?”
“오자마자 바로?”
“형이 계속 영상을 보냈잖아요. 그걸 보고 왔는데 어떻게 기다려요?”
신성 고등학교 방문 일정은 최상규의 동의하에 확정이 된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최윤석 타격 코치는 박유성의 영상들을 전부 편집해 송현민에게 보냈다.
덕분에 송현민도 박유성이 제법 잘 하는 게 아니라 엄청 잘 하는 녀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상규 형이 그러더라고요. 내년에 바로 메이저리그 보내도 되겠다고요.”
“내가 언제 그렇게 말 했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그게 그 얘기죠. 우리 때도 메이저리그 갈 만한 애들은 손에 꼽혔어요. 1차 지명 받는 애들 중에서도 상위권들만 쳐 줬다고요.”
“어쨌거나 영상만 봐서는 모르는 거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 남들이 보면 네가 테스트 받는 줄 알겠다.”
최상규는 옆에서 돕지는 못할망정 초를 치는 송현민이 얄미웠다.
평소 낄끼빠빠를 잘 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 했건만.
싼 값에 후려쳐서 계약을 해야 하는 유망주를 앞에 두고 칭찬부터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박유성이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왜소하다는 사실이었다.
‘체격으로 봐서는 아직 반쪽짜리겠네. 그렇다면 일단 기를 좀 죽이는 게 좋겠어.’
송현민이 모교도 아닌 신성 고등학교에 찾아와 얼굴을 파는 조건으로 최상규는 박유성의 라이브 배팅을 약속받았다.
대신 신성 고등학교 학생을 빌려 테스트를 진행하기로 합의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
최상규는 만약을 대비해 미리 준비시킨 선수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최윤석 타격 코치를 불러 선수를 바꾸겠다고 말했다.
“대학 선수요?”
“그 정도는 되어야 볼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프로 구단 단장님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입니다. 가끔 괜찮은 선수가 있냐고 연락오기도 하고요.”
“그 말씀은······?”
“저 친구 실력이 괜찮다면 1차 지명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습니다. 물론 기대 이상이면 메이저리그도 가능하고요.”
“······!”
최상규의 말에 홀딱 넘어간 최윤석 타격 코치는 김석률 수석 코치를 설득했다.
“에이전트가 하는 말은 최대한 걸러 들어야 해. 날씨도 쌀쌀해졌는데 무리하다 유성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치는 건 좀 아쉽지 않을까요? 이변이 없는 한 현민이는 올 해 무조건 메이저리그에 갈 겁니다. 그럼 현민이 에이전트도 영향력이 커지겠죠.”
“흠······.”
“요새는 신인들도 에이전트를 통해 계약하지 않습니까? 테스트 결과에 따라 메이저리그도 밀어 줄 수 있다고 하니까 한 번 진행해 보시죠.”
“그렇다면 유성이 의견부터 물어 보자고.”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에게 직접 최상규의 제안을 전했다.
그리고 박유성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굳이 무리할 필요 없다. 너 정도면 내년에 충분히 보여 줄 수 있어.”
“그래도 대학교 투수를 상대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정말 괜찮겠니?”
“이번 기회에 제가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만약 장태수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따끔하게 혼냈겠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습 때 박유성이 기정후 표 빨간 색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서면 손지원을 비롯해 신성 고등학교 모든 투수들이 잔뜩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재 신성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박유성의 타격감은 최고 수준이었다.
게다가 타구도 시원시원하게 뻗어 나가다보니 팀의 장타를 책임져야 할 장태수와 김병욱이 기를 못 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이스 손지원을 마운드에 세워봐야 제대로 된 실력 평가가 되지 않을 터.
“대신에 방심하지 마라. 고등학생 공하고 대학생 공은 달라.”
“걱정 마세요. 코치님. 제가 저 사람,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게요.”
“너무 못해서 내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지 말고.”
“만약에 그러면 배트 값 청구하세요.”
“너 후회 안 하지?”
“대신에 제가 잘 하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세요.”
“부탁? 무슨 부탁?”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참고로 돈 드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요.”
최상규가 불렀다는 대학교 선수들을 기다리는 동안 송현민은 학교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본관으로 이동했고.
박유성은 운동장 한 편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워밍업을 했다.
그런데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몸을 푸는 인원이 늘어났다.
“뭐냐?”
“뭐가?”
“우린 신경 쓰지 마. 유성아.”
“그럴 거면 저 쪽으로 가서 하던가. 왜 내 옆에서 이러는 거야?”
“뭐래? 운동장 전세 냈어?”
“그래. 유성아.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다 같이 쓰라고 만든 운동장이잖아?”
“어휴. 진짜.”
괜히 정신 사나워진 박유성이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장태수와 김병욱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다시 박유성 옆으로 붙었다.
“진짜 저리 안 갈래?”
“같이 좀 하자. 너도 혼자 하면 심심하잖아.”
“그래. 유성아. 우리가 남도 아니고 친구들끼리 거리 두는 건 아닌 거 같다.”
“내가 너희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시즌이 끝났다고 연습도 술렁술렁하던 장태수와 김병욱이 이러는 이유는 뻔했다.
최상규의 눈에 들고 싶어서.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 줄도 모르고.’
마음 같아서는 두 녀석 귓불을 붙잡고 최상규에 대해 전부 말 해 주고 싶었지만.
송현민의 에이전트라는 수식어에 홀라당 넘어간 녀석들이 귀담아듣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시점에서 최상규가 장태수나 김병욱에게 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었다.
장태수의 포텐이 터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김병욱은 당장 내년 시즌 프로 입성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2회차 때 프로에 간 건 나하고 태수, 산이, 그리고 지원이 뿐이니까.’
게다가 상대도 나빴다.
손지원이라면 김병욱도 운 좋게 장타를 때려낼 수 있겠지만 대학 투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 포기해.”
“야! 박유성! 나 몰라? 나 장태수야. 왜 이래?”
“그래. 유성아. 우리가 너만큼 정확도가 높진 않지만 힘으로는 어디 가서도안 꿇린다고 생각한다.”
“대학교 투수는 고등학교 투수하고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 대학교 투수는 160km/h 던지냐?”
“그래. 유성아. 어차피 투수가 던지는 공은 히팅 존을 통과할 수밖에 없으니까 노려 치면 어떤 공이든 칠 수 있다고 타격 코치님이 말씀하셨다.”
“어휴. 꼭 처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왜? 우리가 너보다 잘 칠까봐 쫄리냐?”
“태수야. 친구한테 쫄이라니. 말이 좀 심한 거 같다.”
“그런가?”
“제발 저 쪽으로 꺼져. 이 미친놈들아.”
장태수와 김병욱은 대학교 투수라 해도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실제 고등학교 투수들과 대학교 투수들은 실력 차이가 상당했다.
기본적으로 나이에서 오는 차이를 무시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대학 야구 선수들은 고교 야구 선수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다.
나이가 많은 만큼 훈련도 많이 했고 경기도 많이 뛰었으며 경험도 더 쌓았다.
프로 야구 구단들이 괜히 즉시 전력감이랍시고 대학교 졸업 선수들을 우선 선발하는 게 아니었다.
체격의 차이도 컸다.
요즘 애들은 성장이 빠르다 해도 골격이 완벽하게 자리 잡는 시기는 보통 20대 초반.
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체격이 좋은 쪽이 더 큰 효과를 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대학교 투수들과 고등학교 투수들은 공의 질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투수가 하나의 구질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법.
그 절대적인 시간의 차이로 인한 실력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장태수와 김병욱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