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6화
04. 내 말 들어요 (5)
송현민이 미리 챙겨 온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자 송광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 내일부터 챔피언십 시리즈지?”
“혹시 몰라서 위임장도 미리 써 왔어요.”
“그래. 잘 했다. 암튼 최상규 그 놈은 내가 깔끔하게 치워 놓을 테니까 걱정마라.”
“메이저리그 구단들 상대할 자신은 있죠?”
“이 놈아. 내가 베어스에서 용병 관리만 몇 년을 했는데 그걸 모르겠냐? 메이 저리그 관계자들 연락처는 나도 다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크, 역시. 삼촌 찾아오길 잘 했어요.”
송현민이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뭔가를 떠올리고는 다시 주저 앉았다.
“왜? 마실 거라도 줘?”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너 원래 마실 거 안좋아하잖아.”
“마실 건 됐고요. 삼촌, 내가 괜찮은 녀석을 하나 찾았거든요?”
“괜찮은 녀석? 아까 말한 그 동생?”
“헐,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너도 대인 관계가 손바닥만 할 텐데 아는 동생이 많을 리가 있겠냐?”
프로 경력은 짧았지만 송광철은 지근에서 프로 선수들을 지켜봐 왔다. 그래서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선수들일수록 외롭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삼촌한테는 무슨 말을 못 하겠네.”
“흰소리 말고 그래서? 걔가 잘 해? 얼마나 잘 해?”
“나보다 잘 할 거 같다고 말하면 안 믿을 거죠?”
“아니? 믿을 건데?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 인정할 정도면 못해도 너 정도는 한다는 얘기잖아?”
“와, 에이전트 됐다고 바로 이러깁니까?”
“그럼 뭐 내가 송현민 선수 하면서 굽실거릴 줄 알았냐? 일 없다 이 놈아. 싫으면 무르던가.”
“됐어요. 됐어. 삼촌이 이러는 게 원 데이 투 데이도 아닌데요 뭘. 암튼 내가 걔한테 장비 협찬해주기로 했거든요?”
“장비를? 설마 네가 쓰는 걸로?”
“그만큼 지켜보고 싶은 놈이에요. 삼촌도 나중에 가서 봐봐요. 아마 깜짝 놀랄 걸요?”
송현민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송광철은 일단 에이전트 계약 해지부터 진행했다.
계약 당시 송광철이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하라고 잔소리를 했었는데 그 덕분에 메일 한 통으로 정리가 가능했다.
“이런 X발. 장난해?”
메일을 확인한 최상규가 곧장 트윈스 파크로 쳐들어갔지만.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나 송현민이 에이전트에요!”
“계약 해지했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돌아가세요.”
구단에서 따로 배치해 준 경호원들에 막혀 그대로 쫓겨나고 말았다.
트윈스와 랜더스가 맞붙은 나눔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는 트윈스의 4대 2 승리로 끝이 났다.
선발은 랜더스가 앞섰지만
메이저리그 진출을 코앞에 두고 친척으로 에이전트를 바꿨다는 구설수에 경기력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송현민이 전 경기 멀티 히트를 때 려내며 트윈스를 한국 시리즈로 이끌었다.
한국 시리즈 상대는 베어스를 4대 2로 제압한 히어로즈.
“트윈스 놈들 대판 깨져라.”
골수 베어스 팬이었던 박명철은 베어스도 못 올라가는 한국 시리즈에 트윈스가 진출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박유성의 생각은 달랐다.
“트윈스가 우승 할 걸요?”
“너 인마. 아빠 놀리냐?”
“아닌데요?”
“그런데 왜 트윈스를 응원해?”
박명철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박유성을 바라봤다.
그러자 박유성이 대답 대신 송현민에게 받은 새끈한 배트를 들어 보였다.
“그게 뭐? 그거 다 해서 얼마나 하는데?”
“이거 한 자루에 백만 원 쯤 할 걸요?”
“······얼마?”
“백만 원이요. 참고로 이런 게 열 개 있습니다.”
“크흠······.”
송현민을 비롯해 잘 나가는 프로 선수들은 자신들만의 전용 배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업체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따로 돈을 주고 구하려면 100만 원 이상 들었다.
그래서 내년 시즌에 쓸 만한 분량만 뜯어내면 좋겠다고 여겼는데 송현민은 무려 10자루를 보내주었다.
그것도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 하라는 전언과 함께 말이다.
“이 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배트 몇 자루에 팀을 바꾸냐?”
“몇 자루 아니고 열 자루요. 거기에 추가로 스파이크하고 글러브도 보내줬고요.”
“그래서 그게 얼마나 하는데?”
“다 하면 2천?”
“계좌 불러라. 내가 돈 보내 줄 테니까.”
“아버지. 현민이 형이 마음으로 보내 준 선물인데 그걸 돈으로 계산해서야 되겠어요?”
“돈 얘기는 네가 먼저 꺼냈거든?”
“현민이 형의 마음이 고마워서 저도 마음으로 트윈스를 응원하겠다는 거죠.
절대 돈 때문에 팀을 세탁하는 게 아니에요.”
“에라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해라.”
“그리고 아버지. 저 베어스 안 좋아합니다. 저 스타즈 좋아해요.”
“뭐? 스타즈으? 스타아아즈으으?”
원년부터 야구장에 다녔다는 박명철의 사전에 서울 야구팀은 두 개 뿐이었다.
잠실을 나눠 가졌던 베어스와 트윈스.
어려서 곰돌이를 무척 좋아했다는 박명철은 곰이 마스코트인 베어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오늘도 베어스의 V10을 간절히 염원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12구단 체제를 지켜본 박유성은 달랐다.
“아버지.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제 또래는 다 스타즈 좋아해요.”
“차라리 히어로즈가 프로 구단이단 소리를 해라.”
히어로즈조차 인정하지 않는 박명철에게 스타즈는 구단도 아니었지만.
현재 젊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스타즈의 인기가 뜨거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젊은 팬들의 유입으로 인기몰이를 하던 트윈스가 스타즈에게 위기감을 느낄정도니 말 다한 셈.
“그런데 너 벌써부터 그런 거 써도 괜찮은 거야?”
“이게 어때서요?”
“다른 애들은 10만 원짜리 방망이 쓰는데 너만 그렇게 비싼 거 써도 괜찮은 거냐고.”
“당연히 괜찮죠. 아버지. 그렇게 따지면 팬티도 똑같은 거 맞춰 입을까요?”
“팬티하고 야구 용품이 같냐?”
“다를 게 뭡니까. 그리고 아버지. 원래 야구 용품은 남이 주는 거 쓰는 게 최고입니다.”
박유성은 보란 듯이 배트 헤드에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는 헝겊으로 반질반질 닦아댔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신상 배트라서일까.
번들번들 광택이 나는 게 거울로 써도 될 것 같았다.
“으이그.”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박명철이 갑자기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왜요? 또 소화가 안 되세요?”
“아까 먹은 게 좀 체했나?”
“그러지 말고 병원에 가 보시라니까요.”
“일 없다. 무슨 배 아픈 걸로 호들갑이야?”
박명철은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박유성은 닦던 배트까지 내려놓았다.
앞선 회차에서 박명철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1회차 시절은 손 써볼 틈이 없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는 대장암 4기에 다른 장기로 암이 전이된 상태였다.
그래서 2회차 시절 박유성은 주기적으로 박명철의 건강을 체크했다.
“아버지. 병원 갔다 오셨어요?”
“아무렇지도 않단다. 아주 건강하대.”
“정말이죠?”
“그럼 이 녀석아. 넌 내가 아팠으면 좋겠냐?”
그 때마다 박명철은 아무 이상 없다며 늘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1회차와 비슷한 시기에 박명철은 또 다시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그게 말이다······.”
나중에 듣기로 처음에 몇 번 병원을 다녀보고 말았다고.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다가 병을 키우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1회차 때 보다 상태는 좋아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합병증이 찾아오면서 박명철은 박유신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번 3회차 때는 박명철을 직접 챙기리라 마음먹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계약금을 받게 되면 박명철을 강제로 끌고 가서라도 제대로 된 검사를 받게 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때부터 안 좋으셨던 건가?’
박유성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해졌다.
어쩌면 자신의 예상보다 더 오래 전부터 박명철에게 병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버지. 내일 저하고 병원 가요.”
“거 참.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러지 말고 검사 한 번 받아 봐요. 혹시 모르잖아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넌 야구나 열심히 해. 너 메이저리그 가면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사 준다고 했던 거 잊지 않았지?”
“그 아파트에서 오래오래 사시려면 건강부터 챙기셔야죠.”
“이 놈이 괜찮다니까 그러네.”
고집불통 박명철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박유성은 어머니 이선영을 찾았다.
“어머니. 아버지 좀 어떻게 해 보세요.”
“너희 아버지 성격 알잖아.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제가 이런 말 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래요.”
“꿈자리?”
“그게······ 꿈에 돌아가신 엄마가 나왔거든요.”
“언니가?”
“네. 아버지 잘 지키라고 했던 거 같아요.”
다른 사람을 언급했다면 그냥 웃고 넘겼겠지만.
친언니처럼 따르던 박유성의 생모 이야기가 나오자 이선영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 일단 병원 예약부터 잡자.”
“혹시 모르니까 돈 좀 들더라도 신성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 받아요.”
“신성 병원?”
“거기 제가 아는 쌤이 있거든요.”
박유성은 다시 신성 강남 병원 도핑 분석 센터장 황인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 아버님이 아무래도 대장암인 거 같다는 거지?
“네. 아버지가 기름 진 음식 엄청 좋아하시거든요. 술도 많이 드시고요.”
-혹시 다른 병원은 가 봤니?
“다른 병원에서는 그냥 소화 불량 같다고만 하는데 약을 먹어도 호전이 되질 않아요.”
-흠······. 아버님 연세도 있으니까 대장암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긴 하다만······.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검사 한 번만 받게 해 주세요. 네?”
평소 이런 식의 청탁은 절대 받지 않는 편이었지만.
제 입으로 어디 안 좋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며 여지를 줬던 터라 황인철 센터장도 어쩔 수 없이 박유성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친한 후배에게 얘기를 해 놓을 테니까 아버님을 모시고 오렴.
“넵! 감사합니다. 선생님.”
-대신에 만약에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오면······.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정 안 되면 제가 빌려서라도 갚을게요.”
황인철 센터장은 아버지를 위하는 박유성의 마음이 갸륵하다 여겼지만.
실제 박유성에게는 돈 많은 친한 형이 있었다.
“현민이 형한테 부탁하면 도와주겠지.”
신성 병원 진료비가 비싸다 한들 대장암 검사로 수억 원이 들지는 않을 터.
그 정도는 내년에 받을 계약금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황인철 센터장이 힘을 써 준 덕분에 박명철은 사흘 후 신성 강남 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용종이 있네요.”
“그래?”
“네. 여기 접히는 부분이 미심쩍어서 집중적으로 살펴봤는데 딱 걸렸습니다.”
황인철 센터장의 후배인 대장항문외과 전문의 박재혁을 통해 대장암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예? 암이요?”
“네. 아직 초기라 수술하면 일상생활 하시는 데 아무 지장 없을 겁니다.”
“어이구, 선생님. 꼭 좀 살려 주십시오.”
“하하.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초기는 수술만 잘 받으면 완치율이 거의 99퍼센트입니다.”
“그 말은 1퍼센트의 확률로 잘못 될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아버지. 진정하세요. 초기라잖아요.”
“이 놈아! 그게 지금 아들놈이 할 소리냐?”
자신은 아무 문제없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박명철은 수술을 받고 퇴원할 때까지 어린 애처럼 굴었고.
그런 박명철을 어르고 달래느라 이선영이 고생을 해야 했다.
“너희 아버지 때문에 아무래도 병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걱정 마세요. 저도 당분간은 개인 훈련만 하면 되니까 유선이하고 유신이는 제가 챙길게요.”
“그래. 고맙다 유성아.”
“고맙긴요. 그런 말씀 마세요.”
박명철과 이선영이 병원에 가 있는 동안.
박유성은 동생들과 살가운 시간을 보냈다.
“박유신. 기정후 스페셜 봤어?”
“싫어어어. 나 손흥민 영상 볼거야아!”
“손흥민이 아니라 송흔민! 제대로 발음도 못하는 게 뭘 보고 배우겠다는 거야?”
“형아 미워!”
“너 계속 까불면 간식 없음.”
“싫어어어어!”
“간식 먹고 싶으면 빨리 기정후 스페셜 봐. 넌 야구가 딱이니까.”
“오빠. 오늘 밥은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당연히 배달이지.”
“또?”
“엄마 없을 때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먹어. 나중에 아빠 퇴원하지? 그 때부터는 배달 음식 금지다. 무조건 건강식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박명철과 이선영이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마워. 유성아. 동생들 보느라 제대로 운동도 못 했지? 이제 다시 운동에 집중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 하고.”
좋은 형과 멋진 오빠 노릇에 잠시 심취해 있었던 박유성도 정신을 차렸다.
“먹자 캠프 때처럼 찌울 필요는 없어. 딱 5kg. 일단 그 정도만 찌우자.”
장태수와 김병욱이 먹자 캠프에서 살을 찌우는 동안 박유성도 강도 높은 훈련프로그램을 병행하며 몸을 만들었다.
그 결과 목표였던 몸무게를 정확하게 찍을 수 있었다.
“좋아, 박유성. 출격 준비다.”
한층 근육이 붙은 몸을 보며 박유성이 씩 웃었다.
그리고 해를 넘긴 4월.
주말 리그 전반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