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52화 (52/412)

타자 인생 3회차! 52화

09. 누가 1번이야? (2)

“저 녀석이라고?”

한대욱도 박유성을 바라봤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까불까불한 얼굴이 야구 잘 할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 한대욱의 속내를 읽은 걸까.

“쟤 만만하게 보지 마.”

“그래봐야 고등학생이잖아. 아니야?”

“안 되겠다. 마스크 벗어라.”

“······?”

“대욱이 너 믿고 던졌다간 이번에도 또 털릴 거 같아.”

“······!”

한대욱이 놀란 눈으로 김혜성을 바라봤다. 그러다 김혜성이 진심인 걸 알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느 정도 레벨로 맞출까? 대학리그 테이블 세터 정도?”

“그보다 위.”

“대학리그 클린업?”

“그보다 위.”

“설마 프로 레벨?”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테니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상대야?”

한대욱은 순간 궁금해졌다.

도대체 박유성이 뭐기에 김혜성이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번 맞대결 이후 김혜성은 박유성을 꼭 넘고 싶었다.

“저 녀석 우리하고 같이 드래프트 나가. 주목받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우선 지명은 힘들지 몰라도 분명 상위 라운드에 지명될 거고. 프로 야구 판에서 맞붙겠지.”

“그래서?”

“나 고등학교 때 잘 나갔던 거 알지?”

“알지. 우리 또래 중에 효명고 김혜성 모르면 간첩이잖아.”

“그 때도 내 공을 제대로 치는 놈이 없었거든? 근데 저 녀석은 내 공을 받쳐 놓고 치더라.”

“받쳐놓고?”

“그래. 스플리터까지 얻어맞았어. 게다가 눈도 좋아서 빠지는 공은 속질 않아.”

“그 정도야?”

한대욱이 혀를 내둘렀다.

효명고등학교 시절 김혜성은 요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이관우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와일드한 투구폼에 공도 어찌나 빠른지 한복판으로 던져도 타자들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정도였다.

한대욱 역시 김혜성을 상대로 공의 그림자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연거푸 삼진만 당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비록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해 메이저리그 행이 물 건너가고 잠시 방황하긴 했지만.

현재의 김혜성은 고등학교 시절보다 더 성장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김혜성의 공을 완벽하게 받아쳤다니.

이건 이미 아마추어 레벨을 뛰어넘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겉모습에 속지 말고 제대로 리드 해. 이번에도 얻어맞으면 다 네 탓이니까.”

“야, 그건 좀······.”

“자신 없으면 빠지던가.”

“누가 자신 없대? 걱정 마. 저 녀석, 질질 짜게 만들어 줄 테니까.”

동호 대학교 주전 포수 한대욱은 대학리그 최고의 수비형 포수로 꼽혔다.

본래 주전 포수였던 김영배에게 밀려 백업 포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구속 제한을 풀고 와일드한 투구폼을 되찾은 김혜성과 호흡을 맞추다보니 어느새 프로 야구 스카우트들이 주목하는 포수가 되어 있었다.

“프로 스카우트들이 지켜본다고 생각하자.”

“오케이.”

김혜성과 주먹을 맞부딪친 뒤 한대욱이 포수석으로 돌아갔다.

타석에는 미리 준비를 마친 박유성이 들어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한대욱의 시선을 느낀 박유성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테스트 중이라 딱히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겠지만

프로 야구 판에서 40년간 뒹굴며 얻은 교훈은 인사성 좋은 선수가 연봉도 더 받는다,였다.

“나 네 선배 아닌데?”

“학교 선배님은 아니지만 야구 선배님이시잖아요.”

“짜식이 넉살좋은데?”

한대욱이 피식 웃었다. 김혜성이 하도 겁을 줘서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일줄 알았는데 먼저 살갑게 인사를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요?”

“네 흉 좀 봤지.”

“혜성이 형이 단단히 벼르고 있나 보네요.”

“아닌데? 삼진 세 개 잡고 요 앞에 해장국집 가서 밥 먹자고 하던데?”

“삼진 세 개 잡으려면 백 타석 승부 가야겠네요.”

“······?”

“저 올 해 삼진 하나도 안 먹었거든요.”

프로 40년차 경력에 3회차를 사는 주제에 고등학교 선수들의 공에 삼진을 당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박유성은 뻔뻔스럽게 입을 털었다.

‘선구안이 좋다더니 정말인가보네.’

한대욱은 굳이 대응하지 않았다. 앞서 김혜성에게 당부를 받았으니 대단할 게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첫 타석이 시작되고 박유성이 바깥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슬라이더를 골라내자 한대욱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걸 골라 낸 건가? 에이, 아닐 거야. 그냥 하나 지켜 본 거겠지.’

잠시 공을 잡고 있던 한대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혜성에게 공을 돌려주었다.

그런데 자신만큼이나 아쉬워해야 할 김혜성이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야, 저 반응은? 설마······ 이걸 진짜 골라냈다고? 고등학생이?’

방금 전 한대욱이 낸 사인은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지는 볼이었다.

예전처럼 릴리즈 포인트를 높인 이후 코너워크 능력이 떨어진 김혜성에게 까다로운 코스를 요구한 게 결코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면 좋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한복판으로 몰려서 어이없게 얻어맞지만 않는다면 이 공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공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잘 들어왔다.

거의 스트라이크처럼 파고들다가 마지막 순간에 살짝 꺾여 나가는.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고서야 방망이가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코스였다.

요행이나마 이런 공을 던졌다면 투수는 아까워해야 하는 게 당연하고.

타자도 어떻게든 반응하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박유성은 물론이고 김혜성까지 방금 전 공을 그냥 넘겨버렸다.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한대욱은 길게 숨을 골랐다.

박유성을 프로 레벨 선수처럼 상대해 달라는 주문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과대 망상을 한 것 같았다.

‘그냥 공을 치고 싶지 않았나보지. 빠른 공을 노리고 있었거나.’

눈높이를 낮춘 한대욱이 2구째 몸 쪽 낮은 코스의 빠른 공을 요구했다.

초구가 볼이었으니 원활한 승부를 위해서는 2구 째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했다.

“후우······.”

고개를 끄덕인 김혜성이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한대욱의 미트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로진 가루 속을 빠져나온 새하얀 공이 눈에 빨려들 듯 날아왔지만.

박유성은 이번에도 허리를 멈췄고.

퍼엉!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공 하나 차이로 빠져 나갔다.

“괜찮아! 공은 좋아!”

또 다시 치미는 잡념을 억누르며 한대욱은 김혜성에게 냉큼 공을 던져주었다.

고교 리그의 스트라이크 존이 넉넉하다 해도 방금 공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기 어려웠다.

억지로 프레이밍을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구심이 없이 진행되는 테스트에서 그렇게까지 하는 건 대학 선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방금 공은 아슬아슬했던 거 알지?”

대신 한대욱은 박유성에게 말을 걸었다.

블러핑까지는 아니지만 박유성의 히팅 존을 살짝 흔들려는 생각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방금 공은 그냥 넘긴 건데요?”

“······?”

“제가 원하는 공이 아니었어요.”

“······!”

순간 한대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하는 공이 아니라 치지 않았다는 말은 타자가 자신 있는 투수를 상대로 지껄여대는 소리였다.

볼카운트에 상관없이 어떤 공이든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지 않고서야 방금 전 공을 흘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무슨 공을 던져 줄까?”

“스플리터요.”

“뭐?”

“혜성이 형 스플리터가 그렇게 좋다면서요? 스플리터 좀 보여주세요. 현기증나니까.”

“······.”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 박유성을 매섭게 한 번 째려본 뒤 한대욱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 쪽.

낮은 코스.

스플리터.

글러브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한대욱의 가랑이 사이를 보던 김혜성은 순간 헛웃음이 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볼 카운트가 원 볼 원 스트라이크라면 또 모르겠지만.

투 볼로 몰린 상황에서 낮은 코스의 유인구를 던지라는 건 타자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였다.

막말로 제정신이 박힌 타자라면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낮게 깔려 들어오는 빠른 공은 건드리지 않을 터.

그렇다면 바깥 쪽 빠른 공이나 슬라이더를 통해 볼 카운트를 잡아나가는 게 정석인데 곧바로 몸 쪽 승부라니.

“저 녀석. 유성이한테 잡아 먹혔네.”

괜히 박유성에게 트래쉬 토크를 걸 때부터 찜찜했는데 역으로 말린 것 같았다.

하지만 김혜성은 투구판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박유성에게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성아. 작년의 형이 아니야. 그러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제대로 봐라.”

잠시 뜸을 들이던 김혜성이 덤벼들 듯 투구판을 박찼고.

후앗!

김혜성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은 정확하게 한대욱의 미트 쪽으로 날아갔다.

‘코스 좋아!’

한대욱은 팔을 쭉 뻗어 공을 반겼다.

내내 잠잠하던 박유성이 허리를 끌어당겼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저건 절대 못 쳐.’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은건지 모르겠지만 김혜성의 스플리터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리던 코스 그대로 날아오고 있었다.

피칭 터널을 통과한 직후 가라앉기 시작한 공은 홈플레이트 코앞에서 타자의 발목 높이까지 떨어질 터.

몸 쪽 낮은 공을 노리고 덤벼들었다면 시원하게 헛스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따악!

전혀 예상치 못한 파열음이 고막을 후려쳤다.

“······!”

화들짝 놀란 한대욱이 벌떡 일어나 타구를 쫓았다.

다행이 방망이 끝에 걸렸는지 타구는 1루 쪽 파울 라인 밖으로 휘어져나갔지만 만약 조금만 안쪽에 걸렸다면?

우익선상 안쪽에 예쁘게 떨어졌을 것 같았다.

‘뭐야, 이 녀석!’

한대욱이 놀란 눈으로 박유성을 바라봤다. 그러자 박유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형. 한 번 더요. 오케이?”

“······뭐?”

“이번에는 진짜 잘 칠 자신 있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던져 주세요.”

“······.”

순간 한대욱은 박유성이 무서워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까불까불한 고등학생처럼 느껴졌는데.

말 하는 게 꼭 요즘 유행하는 전 프로들의 미튜브를 보는 것 같았다.

각 분야에서 최고 소리를 듣던 선수들이 은퇴 후에 아마추어 선수들 상대로 살살 놀아주다가 결국에는 양학하는.

정확하게 맞는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개망신을 당할 것 같았다.

“타임.”

한대욱은 서둘러 마운드에 올라갔다. 그리고 김혜성의 어깨를 감싼 뒤에 외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저 녀석 뭐야?”

“내가 말 했지? 장난 아니라고.”

“저 정도였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했잖아. 프로 선수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리드하라고.”

“쟤는 프로 선수들보다 더 잘 하는 거 같은데?”

“이거 벌써 유며드셨고만.”

“뭘 들어?”

“유성이 녀석한테 스며들었다고.”

김혜성이 피식 웃었다.

한대욱에게는 철전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굴었지만 신성 고등학교의 황금사자기 조기 탈락을 누구보다 아쉬워한 게 다름 아닌 김혜성이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이제부터 전력을 다 하자.”

“······?”

“왜?”

“난 아까부터 전력을 다 하고 있었는데?”

“뭐?”

“난 이미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머리는 네가 써. 난 공 하나하나 신경 써서 던지는 것도 벅차니까.”

“······.”

이제부터 대학 야구의 힘을 보여주자고 말하려 했던 한대욱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요즘 대학 리그에서 가장 핫 하다는 김혜성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데 여기서 파이팅을 외친들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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