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59화
10. 저 선수가 바로 박유성입니다! (2)
2번 타자 티라스 캠프가 타석에 들어오자 대한민국 대표팀 외야수들이 다시 수비 위치를 조정했다.
좌익수 고우일이 정위치로 돌아갔고
우익수 홍상철은 앞선 타석 그대로 자리를 지켰으며
중견수 박유성이 우익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저하게 잡아당기는 티라스 캠프를 겨냥한 맞춤 수비에 들어간 것이다.
“흥! 이까짓 시프트. 뚫어버리면 그만이야.”
티라스 캠프는 코웃음을 쳤다. 딱히 대단해 보이지 않는 아시아 투수의 공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담장 밖으로 넘겨 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김신우는 괜히 대한민국 대표팀의 에이스가 아니었다.
퍼엉!
초구에 몸쪽 빠른 공을 찔러넣어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뒤.
따악!
2구 째 비슷한 코스로 체인지업을 던져 파울을 유도해냈다.
그리고 3구는 좌타자의 밖으로 돌아들어 가는 백도어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아웃!”
티라스 캠프가 너무 멀다며 항의했지만 대만 구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신우 선수가 오늘 경기 첫 번째 탈삼진을 솎아냅니다.
-바깥쪽으로 정말 예리하게 파고드는 슬라이더였는데요. 티라스 캠프 선수가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구속이 138km/h나 찍혔는데요. 정말 대단합니다.
-김신우 선수. 올 시즌 들어 구속이 더 빨라지고 있거든요. 이러다 160km/h를 던지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중계석에서는 김신우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지만 정작 네덜란드 벤치는 외야 수비를 조율하는 박유성을 신경 썼다.
“저 녀석이 그 녀석이지?”
“그렇습니다. 한국의 키 플레이어입니다.”
“타격만 좋은 줄 알았는데 수비까지 잘하는 줄 몰랐어.”
마르코 반바스텐 감독이 혀를 내둘렀다.
그라운드에 내보내면 동물적인 감각으로 공을 쫓기 바쁜 네덜란드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박유성의 플레이는 확실히 레벨이 달라 보였다.
“한국 벤치에서도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한국도 우리를 꼭 잡고 싶을 테니까.”
네덜란드와 대한민국, 일본, 대만, 이탈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A조에 속한 6개 나라 중에 슈퍼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는 건 상위 3팀뿐이었다.
본국 협회에서 기대하고 있는 4강 이상의 성적을 내려면 일단은 슈퍼 라운드에 올라가는 게 먼저였다.
일단 이탈리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잡는다고 가정했을 때 슈퍼 라운드까지 필요한 승수는 단 1승.
주최국인 대한민국보다는 대만이 조금 더 수월할지도 모르겠지만 에이스 카드를 뽑아 든 이상 가능하면 대한민국을 잡고 편한 마음으로 일본과 대만을 상대하고 싶었다.
“일단은 선취점이 중요해.”
마르코 반바스텐 감독의 시선이 다시 홈플레이트 쪽으로 움직였다.
잠깐 사이에 타석에는 네덜란드 청소년 대표팀의 간판스타, 루세텐 얀센이 들어와 있었다.
“얀센이라면 해 줄 겁니다.”
토비 메니에르 수석 코치가 말을 받았다.
다른 선수들이라면 몰라도 메이저리그 빅마켓의 관심을 받고 있는 루세텐 얀센이라면 한국의 까다로운 타자를 상대로 안타를 때려내 줄 것 같았다.
그 기대대로 루세텐 얀센은 2구째 몸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중견수 앞 안타를 때려냈다.
루세텐 얀센의 장타력을 대비해 뒤쪽에 물러서 있던 박유성이 재빨리 대시해 봤지만.
“쳇.”
타구는 박유성이 슬라이딩을 해도 잡을 수 없는 공간으로 떨어졌다.
“괜찮아. 투 아웃이야.”
무표정한 김신우를 대신해 포수 송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파이팅을 외쳤다.
하지만 루세텐 얀센은 괜히 네덜란드의 키플레이어가 아니었다.
도루는 하지 않을 것처럼 1루 베이스 쪽에 붙어 있다가 김신우가 견제 없이 공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2루를 훔쳐냈다.
-공 2루로 갑니다. 2루에서······ 아아, 세이프입니다. 유격수 채준영 선수가 공을 놓쳤습니다.
포수 송산아의 송구는 비교적 정확했지만.
포구를 하는 과정에서 채준영의 글러브가 꺾이면서 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미안.”
채준영이 제 잘못이라며 손을 들었지만 박유성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저 자식 일부러 송구가 들어오는 길목으로 슬라이딩을 했어.”
1루에서 2루를 훔칠 때는 자연사를 피하기 위해 베이스 라인 바깥 쪽을 파고드는 게 기본이지만 방금 전 루세텐 얀센은 달랐다.
리드와 스킵 동작을 만회하기 위해 거의 최단 거리로 내달렸고.
여차하면 채준영을 들이받겠다는 심정으로 슬라이딩했다.
전근우 수석 코치에게 인정받을 만큼 수비 실력이 좋은 채준영도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덩치 큰 흑인 선수 앞에서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을 터.
“딱 기다려. 배로 갚아 준다.”
3루 쪽 더그아웃을 향해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는 루세텐 얀센을 노려보며 박유성이 이를 갈았다.
루세텐 얀센이 경기 분위기를 빼앗아 간 만큼 대한민국 대표팀의 1번 타자로서 최대한 빨리 되찾아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되갚아 줄 기회가 더 빨리 찾아왔다.
따악!
네덜란드 대표팀의 4번 타자 다릴 콜린이 잡아당긴 타구가 또 다시 중견수 앞에 떨어진 것이다.
2사 이후라 타격음과 함께 루세텐 얀센은 스타트를 끊었고.
“돌아! 돌아!”
타구 위치를 확인한 3루 베이스 코치가 팔을 돌리면서 그대로 홈까지 내달렸다.
경기 초반인 만큼 무리하지 않고 타자 주자의 추가 진루를 막는 게 나았지만.
“죽어랏!”
박유성은 공을 낚아채기가 무섭게 홈을 향해 다이렉트로 내던졌고.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뻗어나간 공은 그대로 포수 송산아의 미트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송산아는 미트를 꼭 움켜 쥔 채로 자신을 향해 선 채로 달려드는 루세텐 얀센을 들이받았다.
쿠웅!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루세텐 얀센과 송산아가 둘 다 쓰러졌지만 송산아의 미트 속에 꽉 틀어박힌 새하얀 공을 확인한 구심은 단호하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웃!”
그렇게 선취점을 올릴 수 있었던 네덜란드 대표팀의 1회 초 공격이 무위에 그쳤다.
“고맙다. 유성아!”
홈플레이트 뒤에서 모든 걸 다 지켜본 김신우는 박유성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먹을 내밀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가볍게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치킨 사라.”
“치킨에 피자까지 살게.”
“피자는 저녁에 먹으면 부대껴서 안 돼. 그냥 치킨 두 마리 쏴.”
“그래.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시킬게.”
박유성은 고작 보살 하나에 한 달 용돈이 십만원 뿐이라는 김신우를 뜯어먹기 미안했지만.
김신우는 치킨 두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라도 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이 경기를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관중석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관우처럼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김신우도 메이저리그 직행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국내 잔류를 선택하더라도 최소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김신우의 목표였다.
하지만 루세텐 얀센을 보기 위해 온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김신우보다 박유성에게 관심을 보였다.
“한국의 7번 이름이 뭐야?”
“유썬 팍?”
“유썬이 아니라 유썽 아니야?”
“그게 그거지. 그나저나 이 녀석 수비가 제법인데?”
“그러게. 다이렉트로 어시스트를 성공시킬 줄은 몰랐어.”
4번 타자 다릴 콜린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 박유성은 거의 정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다릴 콜린의 장타력보다 김신우의 구위가 한 수 위라고 판단한 것이다.
머리 뒤로 넘어가는 장타에 대한 부담감이 없지 않을 텐데 박유성은 루세텐얀센의 득점을 막는 데 집중했다.
결과는 대성공.
만약에 홈 송구가 빠졌다면 선취점을 내준 것으로도 모자라 2사 2루 상황이 이어졌겠지만 박유성의 송구는 노바운드로 포수 송산아의 미트 속에 꽂혔고.
포수 송산아도 견고하게 홈플레이트를 지켜냈다.
하지만 모든 스카우트들이 박유성의 플레이를 좋게 본 건 아니었다.
“조금 전 송구는 무리였어. 저 송구가 빠졌다면 네덜란드가 그대로 승기를 잡았을 거라고.”
자신이 눈여겨보던 루세텐 얀센의 첫 득점이 무산되어서일까.
컵스의 스카우트 조지 벨로가 불평을 터트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어슬레틱스의 레지 로빈슨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점수를 주고 싶어 하지 않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위험한 선택이었지. 저건 팀을 위한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려워.”
메이저리그에서 수비의 중요성은 몇 번을 언급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 수비 속에는 기본적인 수비 기술뿐만 아니라 연계 플레이가 포함되어 있는데 방금 전 박유성은 앵커맨을 무시하고 곧바로 포수에게 송구를 쏘았다.
비록 송구가 제대로 날아갔으니 망정이지 방향이 틀어졌다면 선발 투수의 멘탈이 흔들렸을 터.
결과적으로 운이 따랐다고 해서 잘 했다고 칭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조나단은 어떻게 생각해요?”
주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다저스의 신입 스카우트 미셸 라슨이 선배조나단 짐머맨의 팔꿈치를 쳤다.
그러자 조나단 짐머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뭘?”
“저 선수 말이에요. 한국의 7번.”
“이 봐, 미셸. 우리는 루세텐 얀센을 보기 위해 온 거야. 그러니까 쓸 데 없는데 정신 팔지 마.”
루세텐 얀센과 연결된 빅마켓 구단 중에는 다저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U-18 야구 월드컵이 예년보다 일찍 시작하는 바람에 계약은 하지 못했지만.
경쟁팀들보다 보너스 풀이 넉넉한 만큼 계약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쯤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다저스의 미래라는 생각으로 루세텐 얀센의 플레이를 지켜봤는데.
‘형편없어.’
타격은 몰라도 안이한 베이스 러닝은 처음부터 다시 뜯어고쳐야 할 것 같았다.
처음 2루 베이스를 훔칠 때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슬라이딩도 하지 않고 홈으로 뛰어드는 모습은 야구선수가 맞나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스카우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셸 라슨은 조나단 짐머맨처럼 디테일한 것들까지 보지 못했다.
“루세텐 얀센이 죽어서 그래요? 한국의 중견수 송구가 좋았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한국의 중견수 수비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루세텐 얀센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마지막 순간에 슬라이딩을 했다면 최소한 태그 상황까지 이어졌을 테고 그러다 보면 앞서 2루를 훔쳤을 때처럼 공이 빠지는 행운이 나왔을지 모른다고.”
“하긴. 저도 포수를 몸으로 들이받는 거 보고 무식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무식한 게 아니라 생각이 없는 거야. 실력 좀 있다고 야구를 대충하는 거라고.”
조나단 짐머맨이 짜증을 냈다. 고작 이런 플레이를 보려고 바다를 건너 한국까지 날아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미셸 라슨은 조나단 짐머맨이 너무 예민하게 군다고 여겼다.
“그래도 오늘 경기에서 제일 눈에 띄는 선수는 루세텐 얀센일 걸요? 아니면 도니오 브릭이거나.”
공수가 바뀌고 네덜란드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왔다.
김신우가 내려간 마운드도 주인이 바뀌었는데 마치 삼손처럼 머리를 기른 체격 좋은 투수가 씩씩하게 연습구를 던지고 있었다.
“도니오는 메츠에 가겠죠?”
“그야 나도 모르지.”
“이미 메츠와 구두 계약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우리 팜에는 도니오 브릭보다 나은 투수들이 차고 넘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