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60화 (60/412)

타자 인생 3회차! 60화

10. 저 선수가 바로 박유성입니다! (3)

U-18 야구 월드컵에 출전했다고 해서 모두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해마다 국제 아마추어 계약을 통해 데려오는 선수만 수십여 명.

그렇게 구매한 선수들이 각 구단 팜마다 쌓여 있는 만큼 경쟁을 이겨낼 만한 무언가가 없으면 계약할 이유가 없었다.

네덜란드의 에이스 도니오 브릭도 좌완 투수라는 이점을 빼면 특별한 매력이 없는 선수였다.

일단 186cm의 키에 87kg의 몸무게는 메이저리그 평균 체격에 비해 왜소한 느낌이었다.

190cm 이상의 투수들이 흔한 메이저리그에서 도니오 브릭이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체격이 아쉬우니 덩달아 구속도 아쉬웠다.

요즘 메이저리그 유망주치고 100mile/h(≒160.9km/h) 근처를 찍지 못하는 선수는 드물지만 도니오 브릭은 최고 구속이 95mile/h(≒152.9km/h)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고 동양 선수들처럼 제구가 좋거나 밸런스가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투구자세가 매번 틀어지니 릴리스 포인트도 들쑥날쑥.

좌완 투수가 부족한 일부 구단들은 싼값에 데려올 만하다고 군침을 흘릴지 모르겠지만.

투수 왕국이라 불리는 다저스에 도니오 브릭 같은 투수는 필요 없었다.

“그래도 한국의 선발 투수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스카우트로서 네 눈을 의심해 봐야 할 거야.”

“선배는 한국의 선발 투수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최소한 도니오 브릭보다는 더 완성된 투수야. 공도 빠른 편이고 세컨 피치와 써드 피치도 나쁘지 않지. 무엇보다 딜리버리가 깔끔하잖아?”

“하지만 연속 안타를 맞고 실점할 뻔 했잖아요?”

“안타를 맞지 않고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 줄 투수는 소설 속에서나 찾으라고. 이 세상에 안타를 맞지 않는 투수는 없으니까.”

조나단 짐머맨이 미셸 라슨과 잠시 입씨름을 하는 사이 비어 있던 좌타석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국의 1번이 누구야? 유쏜 팍?”

“어라? 아까 그 중견수잖아?”

눈에 잘 띄는 검은색 방망이를 들고 나타난 박유성이 프로 선수들처럼 루틴을 선보이자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재밌네. 누구의 루틴을 따라 한 거지?”

“글쎄. 이곳저곳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그래도 제법 그럴싸해. 단순히 겉멋만 든 게 아니라 타격 위치를 세팅하는 거잖아.”

“아시아 선수들은 얌전하다고 들었는데 다 그런 건 아닌가 봐?”

메이저리그에서 동양 선수는 실력에 비해 재미없다는 평가가 많았다.

전 세계 최고의 무대라 불리는 메이저리그에서 단순히 야구를 잘 하는 정도로는 인기를 끌기 어려웠다.

야구 실력이 압도적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개성을 갖춘 선수가 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선수 고유의 캐릭터를 인정받으려면 일단 야구를 잘해야 했다.

“루틴은 멋지지만 안타를 치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을걸?”

“맞아. 잘하는 선수의 루틴은 훌륭한 퍼포먼스지만 못하는 선수의 루틴은 꼴사나운 코메디나 다를 바 없으니까.”

마운드에 선 도니오 브릭도 일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가 본데 어디 그만한 실력이 되나 보자.’

도니오 브릭이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그리고는 포수 레안드로 아가스티가 몸 쪽 사인을 내자 타자를 맞출 듯한 기세로 공을 내던졌다.

후앗!

도니오 브릭의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박유성은 타격을 포기하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퍼엉!

예상대로 공은 어깨 앞쪽을 스치고 사라졌는데 구심은 물론이고 투수조차 아무런 리액션이 없었다.

“국제 대회라 이거지?”

구심의 반응을 보고 어필을 하려 했던 박유성은 멋쩍게 웃어 넘겼다.

국제 대회 룰은 아무래도 로컬 룰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메이저리그 방식을 최대한 따르려 노력하긴 하지만 국가마다 세부 룰이 다르다 보니 단순히 어깨 쪽으로 날아든 위협구는 별 것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좋아. 나도 쫄 수는 없지.”

다시 타석으로 돌아 온 박유성은 보란듯이 루틴을 펼쳤다.

평소보다 진득하게 타석 앞쪽을 다지고.

평소보다 더 요란스럽게 오른쪽 타석 안쪽 선을 긁은 뒤에 한 번만 돌리던 방망이를 두 번 돌리고 어깨에 안착시켰다.

“저 자식이?”

당연하게도 도니오 브릭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퍼엉!

다시 한번 몸쪽으로 위협구가 날아왔다.

-이번에도 몸쪽 높은 코스로 빠른 공이 들어왔습니다.

-도니오 브릭 선수와 박유성 선수 간의 신경전이 치열한 느낌인데요. 박유성선수도 조심해야죠.

-다소 고의성이 느껴지는데요. 구심이 한 번 경고를 줄 만 하지 않나요?

-아무래도 아마추어 선수들인 것을 감안한 것 같습니다. 프로 선수들처럼 제 구가 좋을 수가 없으니까요.

-박유성 선수. 다시 타석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특유의 루틴을 선보이 는데요.

-어쩌면 저 동작들이 투수를 자극하는 것 같은데요. 벤치에서는 별 다른 반응이 없네요.

-코칭스테프들이 자제를 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우리 나라에서 치르는 대회이니 만큼 굳이 경기를 과열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윤재 해설 위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유성의 스타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저러다 정말로 빈볼에 얻어맞기라도 할 까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다시 타석으로 돌아 온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보란 듯이 루틴을 선보이며 도니오 브릭을 헛웃음 치게 만들었다.

“제정신이 아니네. 정말 머리통이 박살 나고 싶은 거야?”

도니오 브릭은 포심 패스트 그립으로 공을 꾹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몸쪽 사인이 나온다면 정말로 박유성을 맞춰버리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레안드로 아가스티의 생각은 달랐다.

‘멍청아. 벌써 투 볼이야.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낼 생각이야?’

레안드로 아가스티가 연달아 위협구 사인을 낸 건 박유성의 호수비로 득점을 날려 먹었기 때문이다.

사실 박유성의 루틴 따위는 아무 상관 없었다.

투수들이 멋대로 피칭 템포를 조절하며 타자들을 약올리는 것처럼 타자들도 자신만의 루틴으로 호흡을 고를 권리가 있었다.

2구째 위협구를 던진 것도 초구를 너무 쉽게 피해서지 도니오 브릭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바깥쪽 공에 연달아 고개를 흔드는 도니오 브릭을 보니까 짜증이 났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난 레안드로 아가스티는 3루 쪽 더그아웃으로 고개를 돌렸다.

벤치에서 도니오 브릭을 말려주길 바랐건만.

토비 메니에르 수석 코치는 레안드로 아가스티보다 메츠의 관심을 받고 있는 도니오 브릭의 손을 들어주었다.

-투수에게 맞춰 줘.

“쳇.”

벤치의 사인을 확인한 레안드로 아가스티는 마지못해 몸쪽 사인을 냈다.

대신 구종을 슬라이더로 바꿨다.

연달아 빠른 공을 던졌으니 환기를 시킬 차례였다.

“소심한 녀석.”

포수의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도니오 브릭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척 굴어도 초구와 2구에 바짝 겁을 먹었을 테니 몸쪽으로 공을 붙이면 일단 피할 생각부터 할 터.

그때 공이 꺾여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한다면 박유성을 제대로 엿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니오 브릭의 기대와 달리 박유성은 일찌감치 오른발 끝을 열고 몸쪽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더 위협구를 던져 봐. 그때는 평생 야구 못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프로에서만 40년을 뛰면서 박유성이 얻어맞은 공은 무려 320개.

연평균 8번은 맞아서 1루로 걸어 나갔고 그보다 몇 배는 많은 빈 볼들을 피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협구가 두렵지 않은 건 결코 아니었다.

1회차 보다 조금 장타력이 좋아졌다는 이유로 2회차 시절 2배 이상의 사구를 얻어맞았는데 3회차 시작부터 이래 버리면 나중에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터.

‘맞추기만 해. 진짜 안 참는다.’

이번에도 몸쪽으로 공을 붙인다면 요령껏 얻어맞고 마운드로 내달릴 생각까지 했는데.

후앗!

도니오 브릭의 손 끝을 빠져나온 공이 밋밋하게 몸쪽으로 말려 들어왔다.

‘뭐야?’

순간 당황해서 공을 놓칠 뻔 했지만.

40년 간 방망이를 휘둘러 온 몸뚱이가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가볍게 들린 오른 다리가 지면에 닿기가 무섭게 발에서 무릎으로, 다시 대퇴부 관절을 거쳐 허리로 힘이 전달되면서 방망이가 빠져 나왔고.

히팅 포지션에서 정확하게 스트라이크 존으로 파고드는 공을 때려냈다.

따아악!

요란한 타격 소리와 함께 타구가 우중간 쪽으로 쭉 뻗어 날아갔다.

“뭐야?”

“이거 큰데?”

박유성이 빈 볼에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어대던 메이저리그 에이 전트들의 두 눈이 똥그래졌고.

그들을 놀리듯 타구는 쭉쭉 뻗어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이 타구는 우익수가 잡을 수가 없습니다! 홈~런!

박유성! 대한민국의 1번 타자 박유성 선수가 선두타자 홈런을 때려 냅니다!

-몸쪽으로 몰려들어 온 슬라이더였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정확하게 받아 때려냈습니다.

-도니오 브릭 선수. 망연자실한 얼굴인데요.

-아마 네덜란드 벤치에서도 박유성 선수에 대한 경계령을 내렸을 텐데요. 초구와 2구 무의미한 위협구에 이어 너무도 허무하게 점수를 내주고 말았네요.

빠르게 그라운드를 돈 박유성은 당당하게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대표팀 선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박유성의 헬멧과 등을 때려댔다.

“미쳤다. 미쳤어!”

“와, X발. 첫 타석부터 홈런이야?”

“진짜 대단하다 박유성!”

“나이스 나이스!”

선발로 나선 김신우도 박유성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고맙다. 유성아.”

“내가 말 했지? 내가 선취점 뽑아 준다고 말 했지?”

“그래. 진짜 너 밖에 없다.”

“고마우면 치킨 사라.”

“배 터지도록 사 줄테니까 걱정 마.”

박유성이 씩 웃으며 김신우와 주먹을 맞부딪쳤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나단 짐머맨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뭐야, 저 녀석. 리더였어?”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미셸 라슨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몰랐어요? 박이 캡틴이에요.”

“그래?”

“주최 측에서 나눠 준 자료에 나온 내용인데 안 읽었나봐요?”

미셸 라슨은 조나단 짐머맨이 실수를 한 것이라 여겼지만.

조나단 짐머맨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주장을 의미하는 캡틴이 아니라 리더.

완장과 상관없이 팀 전체를 이끄는 클럽 하우스 리더 말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클럽 하우스 리더가 주장 완장을 차는 경우가 흔하지만 모든 클럽 하우스 리더가 주장인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개인 성향에 따라 갈리는데 주장을 맡아 솔선수범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주장을 거절한 채 뒤에서 선수들의 멘탈 케어를 하는 선수도 있었다.

“방금 팍이 마지막으로 주먹을 부딪친 선수가 누구인 줄 알아?”

“선발로 나온 킴 아니에요?”

“그래. 킴이야. 팍이 더그아웃에 들어오기도 전에 킴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팍을 기다리고 있었어.”

“아무래도 선취점을 뽑아 줬으니까 고마운 거 아닐까요? 앞서 호수비도 펼쳐줬고요.”

“그래서 내가 리더라고 말 한 거야. 원래 팀의 에이스들은 자존감이 높아서 저렇게까지 반응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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