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66화
11. 원더 보이 (1)
1
2028년 U-18 야구 월드컵의 경기 일정이 발표됐을 때.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하나같이 볼멘 목소리를 늘어놓았다.
“동시 진행?”
“이러면 우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볼 경기만 찾아봐야 하는 거지.”
“가뜩이나 스카우트 인력이 부족해서 난리인데 참.”
“주최 측에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전화해서 뭐? 쿠바 대신 경기 치러준 한국한테 쓴소리라도 하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런데 동시 경기가 가능한 거야?”
“한국에 아마추어 야구선수들을 위한 경기장이 있어. 나도 예전에 가 봤는데 시설은 어지간한 마이너리그 경기장보다 좋아.”
“그런 경기장이 몇 개나 되는데?”
“4개. 네잎클로버 형태로 야구장을 지은 거라고. 이런 식으로.”
“오호, 그러니까 동시에 최대 4경기까지 치를 수 있다는 얘기로군?”
U-18 야구 월드컵 본선에 올라 온 팀은 총 12개.
A조와 B조로 나뉘어 조별 풀리그를 진행하는 만큼 경기 수가 적지 않았지만 신성 고교 야구 전용 경기장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이상 소화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실력 있는 유망주들을 수급하려는 메이저리그 각 구단 스카우트팀이 급해졌다.
“톰도 부르고 제리도 불러.”
“두 명으로 될까요? 하루에 세 경기인데요.”
“세 경기 중 한 경기는 쓸모없는 경기잖아.”
“아닐 수도 있죠. 슈퍼 라운드도 동시 진행이고요.”
“미치겠네, 진짜. 그럼 맥과이어도 불러.”
다저스도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조나단 짐머맨을 돕기 위해 빌리 게스파노와 네일 램포드를 한국으로 보냈다.
그 중 제 2경기장을 찾아갔던 빌리 게스파노는 일본 대표팀과 이탈리아 대표팀의 경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뭐야?”
“뭐가요?”
“너희들이 왜 호텔에 있는 거야? 경기 안 봤어?”
“경기 20분 전에 끝났는데요?”
“뭐? 거짓말 마!”
먼저 와서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한 뒤에 맥주를 즐기며 뒤늦게 오는 녀석들을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한국과 대만의 경기가 진즉 끝이 나버렸다니!
몰래 카메라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그러자 미셸 라슨이 씩 웃으며 되물었다.
“오히려 2경기장 경기가 너무 늦게 끝난 거 아니에요?”
“말도 마. 이탈리아 감독이 미쳤다고.”
“이탈리아 감독이요?”
“이미 끝난 경기였는데 투수를 몇 명을 바꾸는지 원. 일본도 7회가 되어서야 겨우 열점 차를 만들었다고.”
“그럼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감독의 작전이 통한거네요?”
“젠장할. 그럼 뭘 해? 어차피 콜드 게임으로 졌는데.”
조나단 짐머맨이 가져다준 맥주를 들이키며 빌리 게스파노가 계속 투덜댔다.
객관적인 전력 상 이탈리아 대표팀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본 대표팀을 이길 수가 없었다.
유럽 쪽에서 아시아 야구로 대표되는 한국과 일본, 대만을 괴롭힐 수 있는 건 아직까지 네덜란드 뿐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은 모든 경기에서 최선을 다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듯 위기 때마다 마운드를 올라왔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일본 대표팀의 공격 흐름이 자주 끊겼고.
1시간 일찍 끝났을 경기가 1경기장보다 20분 늦게 끝나 버렸다.
“최종 점수가 몇 대 몇이에요?”
“어디? 일본? 11대 1.”
“와우. 이탈리아가 한 점 뽑은 거에요?”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데 아무튼 누군가가 홈런을 때렸어.”
“아니 경기를 보러 가서 그걸 기억 못하면 어떻게 해요?”
“우리 팀에서 데려올 일은 없는 선수니까 신경 꺼. 그보다 1경기장은 어땠는데?”
겨우 화를 삭인 빌리 게스파노가 조나단 짐머맨을 바라봤다.
그러자 조나단 짐머맨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끝내줬죠.”
“그래? 그 정도야? 점수는?”
“3대 1이요.”
“뭐야? 끝내줬다며?”
“네. 썬이 명품 투수전을 끝냈거든요.”
“썬? 저거?”
빌리 게스파노가 호텔 창문을 타고 쏟아지는 햇살을 가리켰다.
그러자 미셸 라슨이 이때다 싶어 선배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휴, 무슨 태양이에요. 썬이요. 썬. 이름이 유썽 팍인데 조나단 선배가 마음에 들었나봐요. 갑자기 썬이라 부르는 거 있죠?”
“한국에서 팍은 흔한 성이야. 이 호텔에만 팍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100명은 넘을 걸?”
“오케이. 거기까진 이해했어. 그러니까 오늘 경기에서 잘 했던 선수가 썬이라는 거잖아. 그렇지?”
“참고로 어제 경기에서도 잘 했어요.”
“어제? 잠깐만. 한국에서 어제 잘 했던 선수는······ 그 원더보이잖아?”
“네. 맞아요. 팍. 원더 보이. 썬. 다들 제멋대로 부르지만 결국 한 사람이죠.
그 선수가 오늘도 일을 냈어요.”
“와우.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빌리 게스파노가 다시 조나단 짐머맨을 바라봤고.
조나단 짐머맨은 손에 든 맥주캔까지 내려놓으며 본격적인 썰을 풀려 들었다.
그런데 그 때 지이잉, 하고 조나단 짐머맨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네일 램포드.
“여보세요?”
-조나단! 큰일났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빨리 나 좀 데리러 와 줘. 나 길을 잃었다고.
스카우트 주제에 너무도 당당하게 소리치는 네일 램포드의 목소리에 빌리 게 스파노와 미셸 라슨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저 녀석. 또 시작이군.”
“네일이 소문난 길치라면서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택적 길치지.”
“선택적 길치요?”
“또 예쁜 아가씨가 눈에 들어 온 거야. 그 녀석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집에 가는 법을 잊어버리거든.”
“아아, 그래서 선택적 길치?”
“참고로 너 같은 스타일은 절대 안 통하니까 꿈 깨.”
“뭐래요? 저도 네일 같은 스타일 딱 질색이거든요?”
옆에서 빌리 게스파노와 미셸 라슨이 떠드는 동안 조나단 짐머맨은 길을 알려 주기 위해 몇 번이고 노력했다.
“그 옆에 뭐가 있다고요?”
-옆에? 오오, 지져스! 한국 여자들은 왜 이렇게 예쁜거야? 헤이! 아가씨! 술한잔 할래요?
“네일. 자꾸 이러면 전화 끊습니다.”
-그러니까 나 좀 데리러 오라고! 나 여기서 평생 살게 될지도 몰라!
“하아. 그럼 차라리 택시를 타세요.”
-놉! 내게 있어 교통비는 근사한 레이디와 함께 하룻밤을 즐기기 위한 요금이지 숙소를 찾아가는 용도가 아니라고.
“팀장님께 다 보고해야겠네요.”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와. 빨리.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옆에 있는 자이언츠 놈들 따라간다?
자이언츠는 다저스와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소속이다.
리그 최강의 투수진을 앞세워 3년 연속 지구 1위를 독식한 탓에 다저스 스카우트 팀에 자이언츠와 어울리지 말라는 경고가 떨어진 상태였다.
“알았어요. 그럼 미셸을 보낼게요.”
더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조나단 짐머맨이 부사수인 미셸 라슨을 바라봤다.
그러자 미셸 라슨이 양팔로 엑스자를 그렸고.
-미셸? 하하. 그래, 어디 한 번 보내 봐. 그럼 내가 자이언츠 놈들에게 내부 정보를 팔아먹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
네일 램포드도 한껏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선배인 빌리 게스파노를 고생시킬 수도 없어서 조나단 짐머맨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빌리. 30분만 기다려요.”
“오케이. 샤워하고 나오면 딱 맞겠네.”
빌리 게스파노가 엉덩이를 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나단 짐머맨이 호텔방을 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의자에 주저 앉았다.
“샤워 안 해요?”
“샤워보다 급한 게 있잖아.”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와이프는 학창 시절에 배구를 했어.
그래서 장난삼아 사람을 때리면 피멍이 들지.”
“헉. 결혼하신 줄 몰랐어요.”
“설사 결혼을 안 했어도 직장 동료와 붙어먹을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시답잖은 망상은 제발 침대에 가서 해.”
“넵. 죄송합니다.”
“암튼, 말해 봐.”
“······?”
“그 원더 보이가 오늘은 또 어떤 원더풀한 짓거리를 했는지 말해 보라고.”
선수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경력이 짧은 미셸 라슨보다 조나단 짐머맨이 정확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빌리 게스파노는 미셸 라슨의 평가를 먼저 듣고 싶었다.
도대체 스카우트 팀에 누가 뽑았을지 모를.
시험 성적은 1등이라지만 보나 마나 다저스 임원 중에 누군가를 친인척이나 혹은 정부로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미셸 라슨이 뭐라고 떠들어댈지 몹시도 궁금했다.
하지만 미셸 라슨도 3년차에 접어든 스카우트였다.
“제가 보고 느낀대로 말씀드려요?”
“당연한 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컴 온!”
“음······. 처음에 봤을 땐 그저 그랬어요. 아시잖아요. 아시아 선수들은 다 비슷하게 생긴 거.”
“너 그거 인종 차별적인 발언인 거 알고 떠드는 거야?”
“이게요? 이게 왜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너와 만나기로 한 아시아 남자가 너한테 그러는 거지. 서양 여자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못 알아봤어요.”
“그걸 그냥 놔둬요?”
“그러니까 그런 X신 같은 소리는 혼자 있을 때 떠들어대라고.”
“제가 보고 느낀대로 말 하라면서요.”
“그렇다고 X신 같은 소리를 해도 된다는 얘기는 안 했어.”
“칫.”
미셸 라슨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럴 거면 조나단 짐머맨이 돌아올 때 물어보지 뭐 하러 자신을 괴롭힌담?
하지만 빌리 게스파노는 조나단 짐머맨이 금방 돌아오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던 길에 네일 램포드가 여자를 꼬셨는데 짝이 부족해서 미혼인 조나단 짐머맨을 불러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해서 말해 주지. 스카우트로서 평가를 해. 인종차별적 표현 쓰지 말고. 알았어?”
“네에.”
“자, 아까 말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처음부터 다시.”
빌리 게스파노가 마치 면접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자 미셸 라슨이 크게 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일단 첫 타석 때 썬이 홈런을 쳤어요.”
“오늘도 1번 타자로 나온 거야?”
“네.”
“어떤 공이었는데?”
“몸쪽 빠른 공이었는데 마치 몰린 공처럼 받아 치더라고요.”
“몰린 공처럼 받아 쳤다라. 네 의견이야?”
“아뇨. 조나단이 그렇게 말 했어요.”
“그럼 조나단이 그렇게 말 했다고 덧붙여.”
“넵.”
선두 타자 홈런에 대해서는 미셸 라슨도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잠시 딴청을 부리는 사이 타격음이 울렸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전광판 상단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인상 깊게 본 두 번째 타석을 꺼냈다.
“다음 타석은 3회 초였어요.”
“음? 뭔가 얘기가 많이 생략됐는데?”
“그 전까지 안타가 나오지 않았거든요. 한국은 썬의 홈런 이후 8연속 범타.
대만도 6연속 범타.”
“오케이. 그럼 2사 이후에 원더 보이가 나온 거로군?”
“네. 일단 대만 배터리는 바깥 쪽 승부를 걸었어요.”
“앞서 몸 쪽 공을 얻어맞았으니까 조심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초구는 물론이고 2구도 다 볼 판정을 받았어요. 스트라이크를 줘도 될 만한 공 같았거든요? 그런데 구심이 꿈쩍을 안하더라고요.”
“국제 경기에서는 왕왕 있는 일이야. 그래서?”
“볼카운트가 몰리니까 대만 투수가 싱커를 던졌거든요?”
“싱커?”
“네. 몸쪽으로 잘 들어간 공이었는데 그걸 썬이 또 다시 담장 밖으로 날려버렸어요.”
“오호, 그러니까 우리 원더 보이가 한 경기에 두 개의 홈런을 친 건가?”
“아뇨. 세 개요.”
“······!”
“다음 타석에서도 또 때렸어요. 홈런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