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71화 (71/412)

타자 인생 3회차! 71화

11. 원더 보이 (6)

스카우트들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선수들을 평가한다.

어떤 스카우트는 알파벳으로 등급을 매기고.

또 어떤 스카우트는 유명한 선수들에 빗대어 포장하곤 한다.

20-80 스케일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단순히 숫자와 간략한 코멘트만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보니 저마다의 수식어를 붙이는데 경력이 오래된 스카우트일수록 그 수식어는 단출해진다.

데이터가 쌓이고 편차가 줄어들면서 결국 그 선수가 그 선수라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빌리 게스파노도 처음 스카우트를 시작했을 때는 온갖 수식어를 가져다 썼지만 지금은 단 하나의 표현만 고집했다.

원더 보이.

자신을 놀라게 만든 선수.

나아가 메이저리그와 팬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선수.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20-80 스케일을 떠나 일단 원더보이라는 애칭을 쓰는데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할 것 같은 선수에게는 진짜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그냥 원더 보이는 눈여겨볼 만한 선수.

진짜 원더 보이는 메이저리그에서 경쟁이 가능한 재능을 가진 선수.

그리고 지금처럼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댄 원더 보이는.

‘메이저리그 주전급 재능.’

조나단 짐머맨이 피식 웃으며 빌리 게스파노를 바라봤다.

빌리 게스파노와 1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이 정도로 흥분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빌리 게스파노는 지금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조나단. 말해 보라고. 왜 썬의 보고가 누락된 거야?”

“누락된 게 아니라 데이터가 부족했습니다.”

“부족해? 저게? 저기서 뭘 더 얼마나 잘해야 보고가 올라오는 거야?”

“썬의 재능이야 충분했죠. 다만 기간이 짧았습니다. 알잖습니까. 윗선은 꾸준하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아시아 쪽을 전담하는 조나단 짐머맨이 작년 한 해 보고한 선수만 무려 50명에 달한다.

하지만 그들 중에 구단에서 적극적으로 반응한 건 3명에 불과했고.

구단의 관심을 받은 이들 중에 몇 개월 반짝 활약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핑계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어필했어야지!”

“봐주세요. 저도 일개 스카우트일 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모르긴 몰라도 오늘 이후로 썬에 대해 알아보는 구단들이 늘어날 거야. 저런 재능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야. 타고나야 하는 거라고!”

“베이스 러닝이요?”

“어디 베이스 러닝 뿐이야? 첫 타석에서 침착하게 공을 골라낸 거 못 봤어?

애송이들처럼 움찔움찔거리며 공을 쫓아다니지 않았다고. 자신만의 스트라이 크 존을 명확하게 가지고 간 게 틀림없어!”

“그랬나요?”

“장난치지 말고 말해 봐. 지금 다저스 팜에서 썬보다 눈이 좋은 타자가 과연 존재할까?”

“아마 없을 겁니다.”

“아마가 아니라 없어! 단 한 명도 없다고! 빌어먹을. 전 세계 유망주들을 긁어모았는데 공을 제대로 보는 녀석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

빌리 게스파노는 타자라면 모름지기 공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혹자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뚫어져라 보는 게 뭐가 어렵겠냐고 반문하겠지만.

마이너리그에서 히팅 순간까지 공을 보는 타자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대부분은 적당히 날아왔다 싶으면 감으로 방망이를 휘둘렀고.

더 심각한 경우는 냅다 휘두른 방망이에 공이 와 부딪쳐주길 바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자신이 원하는 공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는 일찌감치 메이저리그 콜업을 예약받았다.

물론 더 따지고 들면 기본적인 선구안을 갖춘 타자 중에서도 레벨이 갈리겠지만.

빌리 게스파노가 보기에 다저스 팜의 타자들은 나뭇가지에 달린 감이 익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진정해요. 빌리.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듣습니다.”

“들으라면 들으라지. 다른 팜은 뭐 다를 거 같아? 어쩌다 한 번 큼지막한 장 타가 나오면 호들갑을 떠니까 다들 공을 볼 생각을 하지 않잖아!”

“어쨌거나 너무 나갔어요. 진정하고 본론으로 돌아오라고요.”

조나단 짐머맨이 웃으며 빌리 게스파노를 달랬다.

파트너로 움직이던 시절에는 매일 저녁 빌리 게스파노의 타자학개론을 듣는 게 고역이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또 감회가 새로웠다.

“왜? 너도 타자는 펀치력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주의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썬을 누가 먼저 찾아냈는지 까먹은 거 아니죠?”

“그러니까 빨리 보고서를 만들어서 올리라고. 멍청한 인간들은 내가 설득할 테니까.”

빌리 게스파노가 채근하듯 말했다.

네덜란드 전 히트 포 더 사이클은 가벼운 놀라움 정도로 넘겼고.

대만 전 3연타석 홈런은 타격감이 절정에 다다른 날이라고 포장할 수 있지만.

첫 타석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 볼넷을 고른 것과 연이어 베이스를 훔쳐내는 건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사흘 연속 각기 다른 장기를 뽐내고 있으니 여기서 더 늦었다간 다른 구단에서 침을 바를 것 같았다.

하지만 박유성의 활약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7구는 바깥 쪽 볼! 박유성 선수에 이어 김현중 선수까지 볼넷을 얻습니다.

-지금 하라구치 유타 선수가 완전히 말린 느낌인데요. 등 뒤에서 알짱거리는 박유성 선수 때문에 피칭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현중 선수도 아슬아슬하게 빠지는 공을 잘 골라 냈는데요.

-원래 김현중 선수 하면 고교 야구에서 출루율이 좋기로 유명했거든요. 순수하게 골라 낸 볼넷은 박유성 선수보다 많을 겁니다.

-하지만 출루율 자체는 박유성 선수가 훨씬 높죠.

-하하. 네. 출루율에 합산되는 타율은 박유성 선수가 훨씬 높으니까요.

-어쨌거나 테이블 세터가 연달아 출루하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경기 초반에 무사 1,3루라는 천금 같은 기회를 잡게 됐습니다.

-지금 상황이 재밌는게 일본의 선택이 중요하거든요? 우리 입장에서는 이동엽선수가 안타나 최소 외야 플라이를 때려주길 바라겠지만 하라구치 유타 선수는 철저하게 땅볼을 유도하려 들 테니까요.

-만약에 땅볼이 나온다고 가정했을 때 정석은 더블 플레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한일전이고 오늘 경기에서 이기는 쪽이 결승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감안하면 홈 승부가 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와 홈 승부라. 이거 갑자기 기대되는데요?

-아니죠. 최고의 시나리오는 안타가 나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안타 없이 박유성 선수가 홈을 밟거나요.

한윤재 해설 위원은 머릿속으로 폭투를 그렸다.

박유성에게 가려져 있지만 어제 경기에서 안타를 때려냈을 만큼 타격감이 좋은 이동엽에게 정면 승부를 걸지는 않을 터.

등 뒤의 박유성에 김현중의 도루를 신경 쓰면서 낮은 코스의 유인구를 던지다 공이 빠지면 박유성을 편하게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방용택 감독과 전근우 수석 코치는 지난 대회 때 일본 대표팀과 대만 대표팀의 스퀴즈 플레이에 농락을 당했던 걸 잊지 않았다.

“근우야. 더블 스틸 어떠냐?”

“오오! 나도 지금 딱 그 생각 했어요!”

“그렇지? 역시 이 상황에선 더블 스틸이지?”

“그럼요! 남자는 더블 스틸이죠.”

뒤쪽에서 그 대화를 듣던 이동헌 투수 코치가 김태윤 타격 코치를 바라봤다.

그러자 김태윤 타격 코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 쿵짝이 잘 맞잖아. 내버려 둬.”

“더블 스틸을요?”

“성공하면 경기 초반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올 수 있잖아?”

만약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코칭스테프라면 더블 스틸의 더자가 나왔을 때 방용택 감독의 입을 틀어막으려 들었을 것이다.

설사 병살타가 나오더라도 3루 주자가 홈을 밟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무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잘 만들어놓은 분위기가 뒤집혀 경기를 내주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는 단순히한 경기 패배한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태윤 타격 코치는 방용택 감독과 전근우 수석 코치의 판단을 믿고 싶었다.

“괜찮을 거야. 설마하니 그냥 더블 스틸을 시키겠어?”

김태윤 타격 코치의 말처럼 전근우 수석 코치는 타석에 들어가려는 이동엽을 불러 특별 지시를 내렸다.

그 사이 방용택 감독은 직접 루상에 나가 있는 박유성과 김현중에게 사인을냈다.

‘헐, 바로 뛰라고?’

김현중에게는 초구에 2루로 뛰라고 주문했고.

박유성에게는 검지로 제 머리를 두드리며 생각하는 플레이를 요구했다.

평소 베이스 러닝이 아쉬운 선수들에게는 경각심을 갖게 하는 제스쳐였지만.

‘홈으로 뛰어도 된다는 거죠?’

그 시그널을 한 번에 알아먹은 박유성은 씩 웃었다.

“젠장할. 또 뭐야?”

대한민국 더그아웃이 분주해지자 나가타 유이 감독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스퀴즈 아닐까요?”

“스퀴즈? 이 상황에서?”

“이동엽은 발이 빠른 편이 아닙니다. 땅볼이 나오면 병살이나 홈 승부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은 선취점이 급할 겁니다. 무사 1,3루에서 득점에 실패하면 분위기를 내주게 될 테니까요.”

코치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한 나가타 유이 감독은 미즈시마 게이에게 스퀴즈를 조심하라는 사인을 냈다.

‘이 상황에서 스퀴즈?’

딱히 이해가 가는 지시는 아니었지만 포수 미즈시마 게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깥 쪽으로 살짝 빠지는 공을 주문했다.

연달아 볼넷을 허용한 하라구치 유타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차라리 몸 쪽으로 떨어지는 포크 볼 사인이 났다면 그러려니 할텐데.

이 공은 타자가 건드려주지 않으면 버리는 공이나 다름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투구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젠장할. 나도 모르겠다.’

벤치에서 사인이 난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하라구치 유타는 1루 베이스를 바라봤다.

1루 주자 김현중의 리드 폭은 크지 않았다.

앞서 2루를 훔쳤던 박유성보다도 소극적이었다.

반면 등 뒤의 박유성은 눈에 거슬릴 만큼 리드 폭을 넓혔다.

‘어디까지 나가는 거야?’

재빨리 몸을 돌려 견제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하라구치 유타는 공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후앗!

하라구치 유타의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이동엽이 번트 자세를 취하자 미즈시마 게이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걸렸어.’

처음부터 번트 준비했다면 모를까.

저런 식으로 덤벼들 듯 방망이를 내밀어봐야 십중팔구 파울이었다.

그런데 이동엽이 공을 끝까지 쫓아가지 않고 중간에 방망이를 빼 버렸다.

‘스퀴즈가 아니야!’

공을 잡은 미즈시마 게이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2루를 향해내달리는 김현중을 보며 총알처럼 공을 쐈다.

후앗!

하라구치 유타의 머리 옆을 지난 공이 단숨에 유격수 다케오카 류헤이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미즈시마 게이가 원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홈! 홈!”

2루수 모리타니 게이토의 외침에 다케오카 류헤이가 다시 홈으로 공을 뿌렸고.

미즈시마 게이가 뒤늦게 공을 돌려받았을 때는 이미 박유성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미끄러진 뒤였다.

-미즈시마 게이가 공을 2루에 뿌립니다! 아! 그 사이 박유성 선수가 홈을 파고듭니다! 백 홈! 홈에서! 홈에서······! 홈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홈을 훔칩니다!

-진짜 미쳤네요. 미쳤습니다. 박유성 선수 미쳤어요!

-지금 일본 벤치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는데요.

-저건 세이프입니다. 더 볼 것도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여기서······ 박유성선수의 발이 한참 먼저 들어갔네요. 이건 더 볼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박유성입니다. 저 선수가 대한민국의 에이스, 박유성이에요!

-정말이지 박유성 선수를 선발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했죠. 박유성 선수를 추가 선발한 협회도 칭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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