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86화
13. 박유성은 못 말려(5)
경기 직후.
사사키 코지는 20만 팔로워가 있는 자신의 SNS에 글을 하나 올렸다.
[비록 나는 일본인이지만, 오늘만큼은 한국의 박유성에게 감사한다. 고마워 박유성.]
마음 같아서는 블로그에 장문의 리뷰 글을 올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몇 없는 광고가 전부 끊길까 봐 겁이 났다.
“욕을 바가지로 먹겠지만. 박유성 덕분에 올라간 건 사실이니까.”
오늘 하루 고생한 컴퓨터에게 휴식 시간을 준 뒤 사사키 코지는 TV 쪽으로 몸을 돌렸다.
쿠지 TV에서 한국과 미국전 녹화 중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악!
경기 시작과 동시에 라이너성으로 담장을 넘기는 박유성의 타격을 보며 사사키 코지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잖아?”
처음에는 그냥 운 좋게 넘어간 줄 알았는데.
마르쿠스 고든의 공을 정확하게 찍어 때려 담장 밖으로 날려 버렸다.
“스즈키 지로와 같은 나이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칠 수가 있는 거지?”
사사키 코지가 멍하니 리플레이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그가 남긴 글을 타고 박유성에 대한 감사 운동이 일어났다.
[비록 나는 일본인이지만, 오늘만큼은 한국의 박유성에게 감사한다. 고마워 박유성.]
박유성의 홈런 전까지 절망에 빠져 있었던 일본 야구팬들이 사사키 코지의 메시지에 반응한 것이다.
미국과의 결승전을 희망하던 대다수 일본 언론들도 냉큼 분위기를 맞췄다.
“마지막까지 치열한 접전이었습니다만 결국 한국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만약에 박유성의 홈런이 나오지 않았다면 곤란했을 텐데요. 박유성까지 기회가 이어져서 정말 다행스럽네요.”
“‘현재 비록 나는 일본인이지만, 오늘만큼은 한국의 박유성에게 감사한다. 고마워 박유성’이라는 메시지가 계속 올라오고 있는데요?”
“우리 일본과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죠.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국민감정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한국에게 도움을 받는 날도 있겠죠.”
“그런 점에서 우리의 국민성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네. 우리는 은혜를 입으면 보답하는 나라니까요. 아, 그렇다고 결승전에서 승부를 양보하는 건 안 됩니다.”
“그럼요. 스포츠는 공정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오늘 하루만큼은 일본의 결승행을 도와준 한국의 박유성을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뒤늦게 일본 언론의 반응을 접한 박유성은 당혹스러웠다.
“얘들 갑자기 왜 이래?”
프로 생활만 40년 해왔지만 일본 언론이 한국의 야구선수를 콕 집어 좋은 쪽으로 언급하는 건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긴장감이 다소 풀어진 청소년 대표팀은 왁자지껄했다.
“그러게.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떨어지라고 난리 치지 않았냐?”
“맞아! 그것 때문에 아침에 아빠한테 전화 왔잖아.”
“오늘 이기라고?”
“아니. 3점 차 이내로 져서 일본 떨어뜨리라고.”
“크흐흐. 우리 아버지하고 똑같은 말씀 하셨네.”
“야. 너두?”
“근데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유성이 때문에 이길 것 같다고.”
“아버지가 야구 잘 보시네.”
“그럼! 트윈스 팬만 30년이신데.”
“오올! 그래서 올해 트윈스 2연패 가냐?”
“뭐야? 싸우자는 거야?”
자신의 푸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선수들을 보며 박유성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김신우에게 다가갔다.
“일본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게 일본이지 뭐. 일본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그건 학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오호. 김신우. 제법 어른스러운데?”
“그러니까 유성이 너는 결승전만 신경 써. 내가 선발인데 지면 알지? 진짜 너 평생 안 본다.”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그냥 결승전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홈런 4개만 쳐줘.”
“그냥 네가 삼진 27개 잡으면 안 되냐?”
“야! 그게 말이 되냐? 투수가 삼진 잡는 게 얼마나 힘든데?”
“타자가 홈런 치는 게 더 힘들어요. 이 멍청아.”
그때 말 걸 사람을 찾아 어슬렁거리던 이관우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뭐야? 또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유성이가 나더러 삼진 27개 잡으란다. 이게 말이 되냐?”
“이야. 박유성. 투수감수성부족 무엇? 넌 진짜 타자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그전에 먼저 신우 이 자식이 홈런 4개 치라고 했거든?”
“그게 왜?”
“……뭐?”
“대만전 때 3개도 쳤잖아? 그럼 4개 칠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맞아. 그래서 좀 쳐보라는 건데 나더러 삼진 27개 잡으라잖아.”
“너무하네. 박유성.”
“암튼 자기밖에 모른다니까.”
투수랍시고 쿵짝이 맞는 김신우와 이관우를 보며 박유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앞선 회차 때는 김신우 하나만 상대하면 그만이었는데.
대표팀에 와서 뭘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잘 던지는 이관우도 조만간 성인 대표팀에 합류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보다 유성이 너 앞으로 미국 못 가는 거 아니냐?”
“뭐? 내가 미국을 왜 못 가?”
“너 때문에 미국 탈락했잖아.”
“맞아. 너만 아니었어도 미국하고 결승전 할 수 있었는데.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야. 둘 다 저리 꺼져. 진짜 유치해서 못 놀아주겠네.”
김신우와 이관우의 헛소리가 계속되자 박유성도 더는 참지 못했다.
“야, 어디 가!”
“방에 간다. 왜?”
“그냥 들어가서 쉰다고? 오늘? 진심이야?”
“그럼 뭐? 클럽이라도 가랴?”
“우리가 무슨 클럽이야. 밖에 기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회의실에서 치킨 시켜 먹을 거면 너희들끼리 먹어. 이 형은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성인 대표팀이었다면 최소 맥주는 마실 수 있었을 테지만.
청소년 대표팀에서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호기는 맥콜라 정도였다.
“빨리 민자 떼야지 원. 그나저나 유신이 놈은 언제 크냐.”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온 박유성은 핸드폰을 충전하기 위해 충전기를 찾았다.
그때 지이잉, 하고 깨톡 메시지가 왔다.
발신자는 송현민.
[레인저스 송 ? 야. 너 또 무슨 사고 쳤냐?]
[박유성 - ??????]
[박유성 ? 무슨 소리예요?]
[레인저스 송 ? 왜 또 다 네 얘기 하냐고. 너 무슨 짓 했어? 빨리 말해 인마!]
이 메시지를 받았을 때 박유성의 표정은 잠시 심각해졌지만.
정작 메시지를 보낸 송현민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헤이, 쏭! 누구야? 여자 친구?”
“여지 친구는 무슨. 내 브라더.”
“오호, 어제 그 리틀 쏭?”
“뭐라고?”
“리틀 쏭. 아니야?”
“맞아. 앞으로 그 별명은 더 크게 말해달라고.”
“하하. 그래. 알았어. 리틀 쏘옹! 됐어?”
“오케이. 아주 마음에 들어.”
“그나저나 리틀 쏭을 어려서부터 키웠다는 게 사실이야?”
“그럼. 사실이지. 내가 이 녀석 똥 기저귀도 갈아줬다니까?”
“똥 기저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흐흐흐.”
실실거리던 송현민의 눈에 표정이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4선발 마이크 고든이 들어왔다.
그러자 송현민이 다급히 통역을 불렀다.
“데이브! 빨리요!”
통역 데이브 킴이 허겁지겁 송현민에게 다가왔고.
송현민은 그 데이브 킴을 데리고 마이크 고든에게 다가갔다.
“고든. 운동 끝났어?”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
이죽거리는 송현민을 보며 마이크 고든이 퉁명스럽게 굴었다.
193㎝의 거구에 성깔 있어 보이는 마이크 고든이 노려보자 데이브 킴이 냉큼 시선을 돌렸지만 송현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마이크 고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피자 내기 한 거 잊지 않았지?”
“내기? 무슨 내기?”
“정말 기억 안 나는 거야? 아니면 머리가 나쁜 거야?”
“왓? 너 뭐라고 했어?”
“데이브 형.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전해요.”
마이크 고든이 언성을 높이자 송현민은 반대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데이브 킴과 마이크 고든만 들을 수 있게 주절거렸다.
“눈 깔아 인마. 아니면 경기 끝나고 한판 뜰래?”
“…….”
“그러게 뭐 하러 어제 와서 시비를 걸어? 네 패거리들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면 내가 겁먹을 줄 알았냐?”
3할이 넘는 퍼포먼스로 레인저스의 핵심 타자로 자리 잡긴 했지만 모두가 송현민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비슷한 또래의 마이크 고든을 비롯해 몇몇은 송현민이 잘나가는 걸 꼴사나워했다.
그러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슈퍼 라운드 경기가 잡히자 마이크 고든이 패거리들을 이끌고 송현민에게 도전장을 냈다.
“이 봐, 쏭. 한국의 1번 타자하고 잘 아는 사이라는 게 사실이야?”
“그럼. 걔는 내가 키우다시피 했지.”
“그렇다면 나하고 내기를 하는 게 어때?”
“내기?”
“내 사촌 동생이 내일 한국전 선발이거든. 만약에 한국의 1번 타자가 내 사촌 동생에게 홈런을 때려낸다면 내가 모두에게 피자를 돌리지. 어때?”
“홈런? 안타도 아니고 홈런?”
“왜? 자신 없어?”
뻔뻔하게 나오는 마이크 고든을 보며 송현민은 헛웃음이 났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타석당 홈런 비율은 3.2퍼센트.
30타석 이상 들어서야 홈런 하나가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5 대 5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 3 대 7 정도는 되어야 내기를 거는 맛이 있는데 3 대 97의 확률에 걸라니.
이건 피자를 뜯어먹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시 계산해 보니 충분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이 놈은 또래 타자들보다 10배는 잘하니까 가능하려나? 어차피 저 멍청한 녀석의 사촌은 저 멍청한 녀석을 닮았을 테고.’
건장한 체격에 98mile/h(≒157.7㎞/h)의 빠른 공을 던지는 마이크 고든은 레인저스 유망주 중에서도 늘 첫손에 꼽혀 왔다.
그래서 구단도 지난해 불펜에서 뛰던 마이크 고든에게 4선발이라는 중임을 맡겼지만 올 시즌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올스타 브레이크가 코앞인 상황에서 4승 6패. 평균자책점 4.50.
레인저스 구단과 팬들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낙관하는 모양이지만 송현민이 보기에는 답이 없었다.
볼카운트 유무와 상관없이 빠른 공만 던지려 드는 스타일을 고치지 못하는 한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마이크 고든이 주제도 모르고 도발을 해왔으니 송현민도 피하지 않았다.
“오케이. 콜. 대신에 100판 내기하자. 어때?”
“뭐? 100판? 그걸 누가 다 먹으라고?”
“우리만 입이야? 우릴 도와주는 스태프들도 챙겨야지.”
“좋아. 100판.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서울과 텍사스의 시차는 14시간.
한국 시간으로 낮 12시에 시작된 경기는 전날 저녁 10시에 열렸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간 송현민은 큼지막한 TV 화면 앞에서 박유성을 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유성아. 형 자존심이 걸렸다. 그러니까 시원하게 하나 때려주라. 응?”
그리고 그 기도에 반응하듯 박유성이 시원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렇지! 이 자식! 이 예쁜 자식!”
경기 시작과 동시에 내기에서 승리한 송현민은 기분 좋게 꿀잠을 잤다.
반면 패거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경기를 지켜봤던 마이크 고든은 아직까지도 속이 쓰렸다.
피자 100판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시아 선수들에게 연달아 당한 게 화가 났다.
그래서 박유성 앞에서 일부러 센 척 굴었던 거지만.
“너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설치고 다니면 진짜 뒤진다. 알았냐?”
송현민이 느와르 영화라도 찍는 것처럼 나직이 으르렁거렸고.
데이브 킴도 최대한 느낌을 살려 통역을 했다.
그러자 겁을 먹었던지 마이크 고든이 송현민의 눈을 피했다.
“짜식이. 별것도 아닌 게 까불긴.”
마이크 고든의 어깨를 툭 치며 송현민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클럽 하우스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오늘 피자는 내가 쏜다!”
그렇게 레인저스 구단은 때아닌 피자 파티를 벌였고.
송현민이 넉넉하다 못해 넘치게 시킨 피자는 프런트는 물론이고 구단 청소부들과 아르바이트 직원들에게까지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