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13화 (113/412)

타자 인생 3회차! 113화

16. 슬기로운 국대생활(11)

임세영 대리가 테이블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해 스타즈 팜에서 좋은 선수들이 대거 나온 건 그만큼 스타즈가 연고 학교들에 투자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선수들을 놔두고 배현우라니.

이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박승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팀장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질문? 말해봐요.”

“김혜성이 아니라 고윤식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아까였다면 다급히 박승철의 이름을 외쳤을 임세영 대리도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김혜성 대신 고윤식을 뽑아야 하는 이유라. 글쎄요. 최 차장. 그 이유가 뭐야?”

안재희 운영팀장이 맞은편에 앉은 최영수 차장에게 공을 넘겼다. 그러자 쓴웃음을 짓던 최영수 차장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박흥선 감독님께 여쭤봐야죠. 박 감독님이 원래 동호 대학교 감독이셨잖아요.”

“50점짜리 대답인데? 조 대리 생각은 어때?”

“어어, 저까지 죽이시게요?”

“야! 조 대리! 치사하게 혼자만 살기냐?”

“그러게 왜 대답을 하셨어요?”

“나도 지금 엄청 후회 중이거든? 그러니까 너도 빨리 말해.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물귀신 작전을 쓰는 최영수 차장을 보며 조명욱 대리가 허탈하게 웃었다.

최영수 차장과 함께 1군 선수단을 직접 서포트하는 입장에서 박흥선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상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에잇! 몰라! 그냥 다 같이 죽읍시다!”

“그래. 조 대리야. 잘 생각했어. 그러니까 어서 말해봐. 박 감독이 고윤식을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고윤식 큰아버지가 동호 대학교 교수잖아요. 개인적으로는 박 감독님 후배고. 박 감독님 동호대 갈 때 알게 모르게 신경 많이 써줬을걸요?”

“그러니까 선수는 실력으로 말해야 한다고 늘 강조해 온 우리의 박흥식 감독님이 철 지난 은혜 갚음이라도 하려는 거라 이거지?”

“솔직히 말해서 박 감독님도 골치 아플 겁니다. 원래라면 고윤식 뽑아도 문제없었잖아요?”

“하긴. 김혜성이 단기간에 이렇게 성장할 줄은 몰랐겠지.”

연초까지만 해도 스타즈 팜 최대어는 고윤식이었다.

일부 팬들은 선인 고등학교 원투 펀치인 김영진과 나해준 중에 한 명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12개 구단 및 양대 리그 체제 전환 이후로 타고투저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쓸 만한 투수를 찾기가 어려워졌고.

같은 값이면 키워 써야 하는 고졸 선수보다 즉시 전력감인 대졸 선수를 뽑자는 게 선수 선발 기조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아직 한창 보여줘야 하는 김영진과 나해준과는 달리 고윤식은 3학년 때부터 팀의 에이스급으로 활약한 전력이 있었다.

“그래도 대졸 선수니까 계약금은 좀 아끼겠네요.”

구단 내부적으로도 고윤식이 우선 지명을 받을 거라는 평가가 우세했는데 갑자기 김혜성이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조 대리. 우리 철 지난 밸런스 게임이나 해볼까?”

“갑자기요?”

“자. 박 감독이 뽑고 싶어 하는 고윤식 대 김혜성. 어느 쪽이야?”

“그야…… 김혜성이죠.”

“좋아. 한 번 더. 박 감독이 뽑고 싶어 하는 고윤식 대 사구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했을지 장담하기 어렵지만 올해 포텐 터진 김혜성. 이번에는?”

“그래도 김혜성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 상태로는 고윤식을 뽑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만큼 김혜성이 미쳤어요.”

“그 정도야?”

“제가 스카우트 팀장이었다면 무조건 김혜성 뽑았을 겁니다.”

“회장님이 고윤식 뽑으라고 한다면?”

“그럼…… 고윤식 뽑아야죠. 회장님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뭐야? 그거밖에 안 돼?”

“대신 언론에 다 터뜨릴 겁니다. 저 혼자서는 절대 안 죽죠.”

작년까지만 해도 김혜성은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 투수에 불과했다.

효명고등학교 시절 160㎞/h까지 찍히는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김혜성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쇼케이스 도중 상대 타자의 머리를 맞히면서 사구 트라우마가 생겼고.

한동안 공을 놓았다가 구속을 낮춘 채로 겨우 마운드에 복귀한 김혜성은 3라운드 이내 지명감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겨울, 단짝인 한대욱과 죽어라 연습한 끝에 구속을 끌어 올리면서 효명고 시절 김혜성이 부활했다.

아직 포심 패스트 볼 최고 구속은 157㎞/h에 머무르고 있지만 지금 추세라면 160㎞/h를 다시 찍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대학교에서 4년을 뛰면서 피지컬도 좋아졌다.

키는 크게 자라지 않았지만 몸무게가 15㎏ 이상 늘면서 호리호리하던 체격이 탄탄해졌고.

올 시즌에는 고윤식과 함께 동호 대학교의 원투 펀치로 활약하며 선발 경험까지 쌓고 있으니 어느 팀에 가더라도 최소 5선발로 시즌을 시작할 거라는 데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최 차장 생각은 어때?”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스카우트 팀에서 김혜성 대신 고윤식 지명하면 아마 욕 바가지로 먹을 겁니다.”

“그래도 김혜성은 올해 반짝하는 거라고 둘러댈 수도 있잖아?”

“그럴 거면 최소한 지명권을 사서라도 1라운드 때 김혜성을 데려오기라도 해야죠. 고윤식 잡자고 김혜성 놓치면 아마 팬들 폭발할걸요?”

“이번에 올림픽 대표팀하고 평가전 하면서 김혜성은 두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쑥 들어갔습니다. 고윤식은 탈탈 털렸지만 김혜성은 6이닝까지 버텼잖아요.”

“그 김혜성을 턴 게 박유성이고.”

“기승전박유성이죠.”

고윤식과 김혜성, 둘 중에 한 명을 뽑아야 한다면 무조건 김혜성이었지만 그렇다고 스타즈 팜의 선수들 중에 김혜성이 최고인 건 아니었다.

“두 분도 박유성 선수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임세영 대리가 이때다 싶어 물었다. 그러자 최영수 차장과 조명욱 대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뭐 우리 청문회장 같은데?”

“그러게요. 우리가 누구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부른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두 분의 의견도 중요하니까요.”

“하아……. 이제 와서 몸을 사려 뭐 해?”

“그렇죠.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눈 대회가 알려지면 저희는 더그아웃 못 들어갈 겁니다.”

“김혜성 대 박유성. 하나 둘 셋?”

“박유성이지.”

“그걸 뭐 하러 물어봐?”

김혜성의 올 시즌 대학 리그 활약상은 눈이 부셨지만.

박유성은 U-18 야구 월드컵 타격 8관왕 출신이었다.

전 세계 또래 중에서도 야구 잘하는 유망주들만 모여 치른 대회에서 격이 다른 실력을 뽐냈다.

게다가 박유성은 연습 경기 때 만난 김혜성을 상대로 3타수 2안타를 때려냈다.

마지막에 잡힌 타구도 좌익수가 미리 길목을 잡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싹쓸이 3루타로 연결될 뻔했다.

오죽하면 김혜성이 올림픽 대표팀에서 가장 까다로웠던 타자로 박유성을 언급했을 정도.

“좌완 파이어볼러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오라고 하는데 그래도 박유성이야?”

“혜성이도 잡아야죠. 그만한 좌완 투수는 리그를 통틀어 몇 안 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혜성이를 데려와도 우승한다고 장담은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박유성은?”

“박유성은 뭐랄까요. 결이 다른 선수입니다. 예전에 김영룡 감독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투수는 선동연. 타자는 이승협. 그리고…….”

“야구는 기종범.”

“전성기 시절 기종범은 야구 그 자체였습니다. 일본 갔다 와서 실력이 줄어들긴 했지만 한창때는 기종범이 루상에 나갔다 하면 상대 투수 눈빛이 요동을 쳤어요.”

“어디 투수뿐이겠어요? 야수들도 정신 못 차렸죠.”

“그런데 기종범 선수 활약하는 걸 보셨어요?”

임세영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최영수 차장은 올해 서른여덟이고 조명욱 대리도 서른넷이었다.

기종범이 활약하던 90년대 초반에 최영수 차장은 어렸고 조명욱 대리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기종범을 기억하는 게 의아하기만 했다.

그러자 조명욱 대리가 혀를 쯧쯧 찼다.

“임 대리는 레전드감수성이 부족하네.”

“무슨 감수성이요?”

“레전드감수성. 레전드는 말이야. 괜히 레전드가 아니야. 꼭 야구도 모르는 것들이 시대 무시하고 요즘 활약하는 선수들하고 비교하면서 예전 선수들을 깎아내리는데 기종범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후배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거야.”

“그렇지. 조 대리가 말 한번 제대로 했네. 우리 아버지가 뼛속부터 라이온즈 팬이거든? 그런데 그 양반이 인정하는 야구 선수가 딱 둘이야.”

“선동연하고 기종범?”

“그래. 우리 아버지가 늘 하는 말이 있지. 기정후는 백날 해도 기종범 못 따라간다고.”

“에이, 그래도 기정후는 메이저리거인데요?”

“이거 봐. 이러니까 레전드감수성이 없다고 하는 거지. 기정후도 잘하지만 기종범은 혼자서 경기를 지배했어. 안타 치고 도루하고 호수비하고 다 했다고.”

“심지어 체력 부담이 가장 크다는 유격수였죠. 저희 아버지도 요즘은 기종범이나 양준석 같은 선수가 없다고 한탄하세요.”

“암튼 말이 좀 샜는데 박유성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부모 세대가 말하던 기종범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으신 거죠?”

“역시 조 대리. 척하면 척이라니까?”

“제가 괜히 차장님 마누라겠습니까?”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안재희 운영팀장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운영팀 직원들 중에서 현장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박유성을 말하는데 운영팀장으로서 회피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안재희 운영팀장의 속내를 읽은 걸까.

“팀장님. 안 돼요.”

임세영 대리가 다급히 말했다.

“뭐가 안 돼?”

“회장님 찾아가시는 거 안 돼요. 사장님 찾아가시는 거 안 돼요.”

“그럼 단장님은?”

“그건…… 제가 못 막죠. 평소에도 자주 찾아가시잖아요.”

마음 같아서는 단장실도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장님한테만 슬쩍 얘기하는 건 괜찮아?”

“하아.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저도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러지 말고 알려줘. 단장님께 말씀드려? 하지 마?”

“알아서 하세요. 저까지 엮지 마시라고요오.”

임세영 대리가 두 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자 조명욱 대리가 한마디 했다.

“야! 임세영!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너만 살겠다 이거야?”

“야! 박승철!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저는 회의실에서 따로 말씀드리겠다는 얘기밖에 안 했는데요?”

“그러게 왜 낄끼빠빠를 못 해서 이 사달을 만들어?”

“그렇다고 우리 구단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박승철의 볼멘 목소리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운영팀 직원이었다.

입사 연도도 다르고 직책도 다르고 연봉도 다르고 하는 일도 조금씩 다르지만 스타즈라는 구단을 잘 운영해 보자는 마음만은 똑같았다.

“그래. 승철이 말이 맞아. 잘못된 걸 아는데 두고 보면 안 되지.”

“승철아. 잘했다. 나중에 형하고 술 한잔하자.”

“잘하긴 뭘 잘해요? 그리고 조 대리님하고 술을 왜 해요? 제가 사수거든요?”

“사수가 칭찬은 안 하고 기만 죽이니까 그렇지.”

“잘하는 게 있어야 칭찬을 하죠!”

“두 사람 서로 사귈 거 아니면 거기까지 하고 팀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로 이번 일에 관여하실 생각이십니까?”

최영수 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안재희 운영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솔직히 말해줬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는 없죠.”

회의를 마친 안재희 운영팀장은 외출 중인 김재식 단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시각.

김재식 단장은 회장실의 호출을 받고 본사에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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