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26화
18. 슈퍼 썬(5)
3
-지금 중계 카메라가 다저스 파크의 전경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오늘은 미국 경기가 아니라서 관중석이 많이 빌 것으로 예상했습니다만 생각보다 많은 관중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서 미국 대표팀의 셈법도 달라질 테니까요. 아마 그것 때문에 관심을 끌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조편성 결과가 나왔을 때 오늘 이 경기가 4강 진출의 분수령이 될 거라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단순히 전력만 놓고 봤을 때 미국 대표팀이 가장 강했고 대만 대표팀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으니까요. 우리와 도미니카 공화국, 두 팀 중에 한 팀이 조 2위를 차지할 거란 예상이 많았죠.
-하지만 A조 예선 첫 경기와 두 번째 경기의 결과가 예상을 빗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을 상대로 1승을 챙긴 대한민국은 도미니카 공화국과 대만, 두 나라 중에 한 나라만 잡아도 4강 진출이 확정됩니다. 반면 도미니카 공화국은 오늘 경기를 무조건 잡고 미국과의 마지막 경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고요.
-미국 대표팀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도미니카 공화국 대표팀 선수들의 면면도 만만치가 않은데요. 이선철 해설위원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결국 야구는 팀 스포츠입니다. 개인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팀이 점수를 뽑지 못하면 이길 수가 없죠. 어제 미국 대표팀의 클린업 트리오가 무려 4개의 안타와 2개의 볼넷을 얻어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고작 1득점에 그쳤습니다. 반면 대한민국 대표팀은 실책과 홈런을 묶어서 두 점을 뽑아내지 않았습니까?
-안타는 미국이 더 많이 때렸지만 결국 승리는 대한민국이 챙겼는데요.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야구의 묘미죠.
그때 중계 카메라가 도미니카 공화국의 벤치를 잡았다.
경기 시작을 앞두고 도미니카 공화국 선수들이 선글라스를 낀 감독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혹시 이 선수를 기억하십니까? 한때 블루제이스의 강타자로 유명했던 호르세 바티스타 선수입니다. 은퇴 후 이번에 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선입이 됐는데요.
-저도 그 기사를 보고 상당히 반가웠습니다. 요즘 메이저리그를 보시는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호르세 바티스타 선수 하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홈런 타자거든요.
-40홈런 이상만 3번에 2010년에는 54개의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으니까요.
-이번에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대거 합류시키면서 레전드인 호르세 바티스타 선수에게 중임을 맡긴 것 같은데요. 어제 경기를 패배하면서 부담감이 클 것 같습니다.
-만약에 도미니카 공화국이 오늘 경기까지 패배하게 된다면 4강 진출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마지막 경기에서 미국을 잡고 우리가 대만을 잡아준다면 미국과 도미니카 공화국, 대만이 1승 2패로 TQB를 따지게 되겠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3팀 중에 1팀만 4강에 올라가게 되니까요.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며 도미니카 공화국의 스타팅 라인업이 공개됐다.
-먼저 선공을 맡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타선입니다. 1번 타자 중견수 호세 페레즈. 2번 타자 2루수 제이슨 누메스. 3번 타자 3루수 에릭 구스만.
-자이언츠에서 클린업을 치는 강타자죠.
-4번 타자는 구스타프 고리스. 오늘 지명 타자로 출전했습니다.
-에릭 구스만 선수와 함께 도미니카 공화국 공격을 이끄는 선수입니다.
-5번 타자 좌익수 호세 고리스. 6번 타자 1루수 훌리오 메세나. 7번 타자 포수 카를 베드윈. 8번 타자 유격수 에밀리 카브레라. 마지막으로 우익수 제프리 보나파시오 선수가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호세 고리스 선수와 훌리오 메세나 선수까지 소속 팀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는 선수들이거든요. 이 네 명의 선수들과 어떤 승부를 펼치느냐에 따라 오늘 경기 승패가 갈릴 것 같습니다.
-이에 맞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수비 위치를 알려드립니다. 1루에 박준수. 2루에 송현민. 3루에 김하선. 유격수 자리는 박찬희 선수가 채웠습니다. 좌익수는 감백호. 우익수 기정후. 포수는 박경호. 그리고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던 중견수 자리에 박유성 선수가 선발 출전했습니다.
-하하. 보통은 배터리를 가장 마지막에 언급하는데 오늘은 박유성 선수가 대미를 장식했네요.
-그만큼 요즘 가장 핫한 선수 아니겠습니까?
장호영 캐스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현지 중계 카메라가 박유성을 클로즈업 했다.
박유성과 함께 올림픽에 참가한 스즈키 지로는 하늘 같은 선배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카메라에 잡힌 박유성의 표정은 더없이 여유로웠다.
“꼭 홈구장이라도 온 얼굴이로군.”
대형 TV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저스의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피식 웃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상대적으로 외야가 넓은 다저스 파크에 오면 긴장하게 마련인데 박유성은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경기에서 여러 차례 호수비를 선보이지 않았습니까. 역전 홈런도 때려냈고요. 지금의 썬에게는 홈구장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맞장구를 쳤다.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좋은 성적을 낸 구장에서는 마음이 편해지는 법.
이틀 전 인생 경기를 펼친 박유성이라면 다저스 파크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아마추어 교체를 허락한 것도 저 녀석을 보기 위해서라지?”
“몇몇 구단에서 썬에 대한 관심을 내비쳤다고 합니다. 아마추어 대회이긴 하지만 U-18 야구 월드컵에서 타격 타이틀을 쓸어 담았으니까요.”
“요즘 중남미 유망주들의 몸값도 너무 올랐어. 실력은 점점 줄어드는데 계약금 타령만 하잖아.”
“반면 아시아 쪽은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습니다.”
“썬을 200만 달러 정도에 데려올 수만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가격으로는 어림없을 겁니다. 혼자서 미국을 잡아버렸으니까요.”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 대표팀의 총연봉은 4억 8천만 달러.
선수당 평균 연봉은 2천만 달러에 달했다.
반면 박유성은 정식 연봉이 없는 아마추어 선수.
그런 선수가 실점 위기를 막는 호수비를 연거푸 펼치고 역전 투런 홈런까지 때려냈으니 골리앗을 잡은 다윗에 비견될 정도였다.
“다윗은 결국 왕이 됐는데 저 녀석은 어떨까?”
“일단 수비가 좋으니까요. 40인 로스터에는 충분히 들어갈 것 같습니다.”
“타격은?”
“글쎄요. 첫 타석에서는 홈런을 때려냈지만 두 번째 타석에서는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으니까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조금 더 근력을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언론을 비롯해 대다수 야구팬들은 게릿 벌렌더를 상대로 때려낸 홈런만 기억하지만.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9회 초 두 번째 타석에 포커스를 맞췄다.
앞서 초구를 잡아당겨 홈런을 때려낸 게 어느 정도 운이 따른 결과라면 두 번째 타석에서는 진짜 실력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1사에 주자 없는 가운데 등장한 박유성은 바뀐 투수의 초구와 2구를 고른 뒤에 3구째 들어온 바깥쪽 빠른 공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지만 힘에서 눌렸는지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굴렀고.
유격수 케빈 모랄이 빠른 템포로 타구를 처리해 박유성을 1루에서 잡아냈다.
그 타석을 따로 수십 번 돌려 본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힘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제 9회에 올라온 투수가 누구였지?”
“크리스 윈터입니다.”
“그래. 맞아. 포심 패스트 볼이 빠르고 묵직해서 브레이브스가 마무리 투수로 점찍은 녀석이지.”
“상대가 나빴다는 겁니까?”
“메이저리그 단장 중에서 썬이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적응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썬뿐만 아니라 중남미에서 비싸게 주고 데려온 선수들도 적응기가 필요해. 한국과 일본에서 건너온 프로 선수들도 마찬가지고.”
같은 선상에서 봤을 때 박유성은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뛰기에 여러모로 부족해 보일지 몰랐다.
하지만 박유성의 나이와 재능, 그리고 여러 장점을 고려했을 때 기다려 주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저스 팜에서 썬보다 나은 유망주가 있어?”
“솔직히 없습니다.”
“올해 노리고 있는 중남미 선수 중에서는?”
“피지컬적으로 썬보다 나은 선수는 많습니다. 하지만 썬처럼 증명한 선수는 없죠.”
“그래. 바로 그거야. 썬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어. 그것도 다저스 파크에서 말이지. 작년에 쏭을 영입해야 한다고 말했던 거 기억해?”
“쏭은 레인저스에서 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에는 형편없었지. 만약에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그랬다면 팬들이 나부터 죽이려고 들었을 거야. 그때 내가 반대했던 이유, 기억해?”
“한국에서 잘하는 선수일지는 몰라도 다저스 파크에서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했죠.”
“그래. 쏭은 분명 좋은 타자지만 한국과 메이저리그는 달라.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해서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어.”
“게다가 몸값도 비쌌고요.”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
송현민의 영입전에서 다저스가 발을 뺀 가장 큰 이유는 몸값 때문이었다.
연평균 100만 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다저스에게 송현민의 에이전트가 요구한 1,500만 달러는 받아들이기 힘든 금액이었다.
“부정하진 않겠어. 다저스는 메이저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사치세를 내는 구단이야. 난 그 사치세를 어떻게든 줄여야 하는 단장이고. 다저스 파크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모르는 선수에게 연평균 1,500만 달러를 쓸 수는 없었어.”
“하지만 쏭은 레인저스에서 3할을 치고 있습니다.”
“그건 결과론이야. 쏭과 레인저스가 궁합이 잘 맞는 거라고. 시즌 초만 해도 실패가 유력했잖아.”
“그건 앤드류의 예상일 뿐입니다. 결과는 성공으로 내달리고 있고요.”
“쏭이 다저스에 왔더라도 지금처럼 활약하긴 어려웠을 거야. 내야 교통정리가 되지 않았잖아. 아무튼 쏭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지금 내 관심은 온통 저 녀석에게 쏠려 있으니까.”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 상당수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FA 계약을 통해 더 좋은 구단으로 이적하기를 바랐고 이미 빅마켓 구단에서 뛰는 선수들 역시 자신의 몸값을 한 푼이라도 높이기 위해 열을 올렸다.
하지만 오버페이를 지양하는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에게 최고의 매물은 게릿 벌렌더도 마크 스테리도 아닌 박유성이었다.
“썬을 데려오면 아마추어 계약을 맺는 거지?”
“네. 드래프트를 통해 입단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FA까지 6시즌을 채워야 합니다.”
“1년쯤 마이너리그에서 뛰게 했다가 슈퍼 2 조항을 피해서 메이저리그로 올린다면 지출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5년 차 때 적당한 금액으로 장기 계약을 한다면 나쁘지 않겠죠. 하지만 그 계획은 모든 유망주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거 아닌가요?”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다시 웃었다.
실력 있는 유망주를 싼값에 계약해 최소한의 연봉을 주고 부리는 건 메이저리그 모든 단장들의 희망 사항이나 다름없었다.
해마다 수백여 명의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로 유입되고 그중 극소수만이 살아남지만 구단마다 유망주 영입에 심혈을 기울이는 가장 큰 이유도 언제 터질지 모를 로또에 당첨되길 바라서였다.
“썬은 분명 재능 있는 선수입니다. 기본적인 실력도 좋고 잠재력도 상당하죠. 하지만 그 잠재력이 언제 폭발할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짧으면 1년. 길어도 3년 안에는 메이저리그에 올라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좋겠죠. 1년이 아니라 3년이 걸리더라도 팬들은 만족할 겁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다저스에는 썬의 자리가 없습니다. 썬의 자리를 만들려면 잘하고 있는 선수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 썬이 주전으로 뛰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그 시간 동안 공존할 방법을 찾으면 돼.”
“그때가 되면 썬은 FA가 되겠죠. 결국 비싼 값을 치르고 쓰게 될 겁니다.”
“젠장. 한마디를 안 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