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57화
22. 어메이징 썬(1)
1
에릭 지터 감독이 미국 대표팀의 1선발로 게릿 벌렌더를 낙점했을 때.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크리스 반스는 기분이 나빴다.
“대체 내가 부족한 게 뭐예요?”
“크리스. 진정해. 에릭은 양키즈의 레전드잖아. 그래서 그런 것뿐이야.”
크리스 반스의 에이전트 제롬 하트가 달래듯 말했다.
지난해 17승 5패 2.12라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을 거머쥔 크리스 반스는 미국 대표팀의 실질적인 에이스나 다름없었다.
비록 올 시즌에는 승운이 따르지 않아서 아직까지 9승에 그치고 있지만.
2.11의 평균 자책점은 유력한 사이영상 후보라는 게릿 벌렌더보다 0.17이나 낮았다.
운이 따라줘야 하는 다승이 아니라 평균 자책점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미국 대표팀의 1선발은 크리스 반스가 되는 게 당연했다.
“아마 에릭은 결승전을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일본이나 베네수엘라가 우리의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결승전 선발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4강에서 질 수도 있다고요.”
“그런 끔찍한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마. 화가 나는 건 알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골치 아파진다고.”
“후우…….”
“결국 올림픽이 끝나면 누가 최고의 투수였는지 가려질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제롬 하트의 말처럼 게릿 벌렌더는 대한민국과의 예선 1차전에서 패전의 멍에를 썼다.
피칭은 나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루키에게 한복판에 빠른 공을 던졌다가 투런 홈런을 얻어맞았다.
“게릿. 1선발이라면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경기가 끝나고 크리스 반스가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게릿 벌렌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그 친구를 상대하게 된다면 내 대신 복수를 해줘. 크리스.”
대한민국과 일본이 4강에서 격돌했을 때.
크리스 반스는 당연히 일본이 올라올 거라 여겼다.
일본 대표팀의 선발 투수는 마츠다 유이토.
라이벌 구단인 양키즈의 2선발이었다.
리그에서 여러 번 맞붙어본 경험이 있는 크리스 반스는 마츠다 유이토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시아 투수라는 이유만으로 양키즈의 에이스, 제임스 모이아에게 가려져 있지만 실력만큼은 제임스 모이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도 피칭으로는 마츠다 유이토에 미치지 못했다.
“한국이 마츠다를 상대로 점수를 뽑아낼 수 있을까?”
운 좋게 안타는 때려낼지 몰라도 다양한 구종을 던지는 마츠다 유이토를 쉽게 공략하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게릿 벌렌더를 무너뜨렸던 그 슈퍼 루키가 다시 한번 사고를 쳤다.
“뭐야, 이 녀석은.”
크리스 반스는 그제야 박유성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게릿 벌렌더에게 홈런을 때려냈을 때만 해도 운이 좋았다 여겼는데.
마츠다 유이토를 상대로 3루타를 3개나 뽑아냈으니 실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크리스 반스는 경기 전에 포수 조이 패런트에게 주문을 했다.
“한국의 그 루키하고 제대로 붙어보고 싶어.”
“제대로?”
“그 녀석이 날뛰면 한국이 이긴다면서? 그러니까 사전에 기세를 꺾어 놔야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박유성에게 기습적인 홈런을 얻어맞고 미국 야구팬들에게 콩이 되도록 까였던 조이 패런트도 복수를 다짐했다.
“크리스 반스의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1할대 중반이었나? 어쨌거나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야. 썬.”
1회 초.
박유성의 연이은 호수비로 득점이 삭제되자 크리스 반스와 조이 패런트는 더 열을 냈다.
“저 녀석. 무조건 삼진으로 잡아야겠어.”
“걱정하지 마. 저 녀석은 네 공을 절대 치지 못할 거니까.”
포수 마스크를 쓰며 조이 패런트는 포심 패스트 볼과 커터로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크리스 반스 하면 앤디 존슨을 연상시키는 슬라이더로 유명했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넘어간 분위기를 가져오려면 박유성을 힘으로 찍어누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앞선 두 번의 회차에서 이런 경험을 수없이 해본 박유성은 미국 대표팀 베터리가 어떻게 나올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몸쪽에 하나 붙이고 시작하겠지? 박유성. 겁내지 마. 현 메이저리그 최고 좌완의 공이야. 당분간은 구경하고 싶어도 구경할 수가 없다고.”
바로 내년 초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열리지만.
박유성이 성인 대표팀에 합류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올림픽이야 아마추어 교체 조항 때문에 운 좋게 참여한 거고 프로 데뷔 전에 열리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는 프로 야구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선발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 올림픽의 활약을 인정받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나가더라도 크리스 반스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8개국이 두 개의 조로 나뉘어 4강 토너먼트를 치른 올림픽과 달리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대회 규모부터 달랐다.
본선에 오른 20개국을 4개 조로 나누어 조별 풀리그를 진행하고 각 조 1, 2위가 8강 토너먼트에 올라가 자웅을 겨루는 방식이었다.
‘토너먼트에서 미국을 만나더라도 다른 선발이 나올지 몰라. 크리스 반스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불참할지도 모르고.’
미국 언론은 이번 올림픽 야구 대표팀을 가리켜 사상 최강이라 추켜세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타자들의 이야기였다.
미국 타선은 벤치 선수들까지 거를 타선이 없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 만큼 타자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그에 비해 투수 쪽에서는 시즌 중반에 치러지는 올림픽에서 부상을 당할지도 모른다며 차출을 거부한 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이야기가 달랐다.
투구수와 휴식일까지 규정하며 투수들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데다가 출전 보상도 상당해서 참가하겠다는 투수들이 줄을 섰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내 이름 석 자는 기억하게 해줘야지. 안 그래, 조이?”
박유성이 방망이를 들어 올리며 자신을 호명하자 조이 패런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바로 몸쪽 깊숙이 미트를 가져다 댔다.
그 순간.
후앗!
크리스 반스의 손에서 총알처럼 공이 날아왔고.
“어이쿠.”
박유성은 다급히 상체를 젖히며 몸에 붙는 공을 피해야 했다.
-초구 빠른 공이 몸쪽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몸이 덜 풀린 걸까요? 하마터면 박유성 선수를 맞힐 뻔했습니다.
-박유성 선수도 영리하게 잘 피했는데요.
-제가 항상 하는 얘기지만 맞아도 되는 공은 없습니다. 느린 공도 관절 부위에 잘못 맞으면 부상을 당하니까요. 저렇게 빠른 공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전광판에는 97mile/h(≒156.1㎞/h)이 찍혔고 S존상으로는 157㎞/h가 나왔습니다.
-코스도 지금 옆구리 쪽이었으니까요. 박유성 선수도 지금처럼 무리하지 말고 타석에 섰으면 좋겠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박유성은 제 몸을 끔찍이 아꼈다.
1회차와 2회차를 통틀어 박유성이 얻어맞은 공은 무려 320개.
사구 판정을 받은 것만 그 정도고 위협구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기껏 올림픽 나와서 사구로 교체될 수는 없지.”
박유성이 아까보다 반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나 자리를 잡자 조이 패런트가 씩 웃었다.
‘그래. 코리안 루키. 그게 네 자리라고.’
조이 패런트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몸쪽 커터 사인을 냈다.
보통 우타자들 상대로 바깥쪽 스트라이크를 잡을 때 주문하는 공이었지만 박유성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으니 몸쪽으로 던져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 반스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좌타자를 상대로 몸쪽 깊숙이 빠른 공을 붙인 뒤에 연달아 커터를 던져 재미를 보는 건 레드삭스에서 종종 써먹던 레퍼토리였다.
몸쪽 공에 정신이 팔린 좌타자에게 비슷한 코스로 커터를 던지면 열에 아홉은 볼인 줄 알고 타격을 포기하다 스트라이크를 먹는다.
나머지 하나는 뒤늦게 방망이를 휘둘러보지만 히팅 포인트를 잡지 못해 대부분 파울이 났다.
심지어 대표팀의 3번 타자이자 양키즈의 간판타자인 마크 스테리에게도 종종 써먹을 정도였다.
그래서 당연히 통할 줄 알았는데.
따악!
박유성이 느닷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쳤습니다! 이 타구가 쭉쭉 뻗어 날아갑니다!
-제대로 찍힌 것 같은데요.
-중견수 뒤로! 중견수 뒤로! 이 타구는 중견수가 잡을 수가 없는 곳으로 날아갑니다! 홈런! 박유성! 대한민국 대표팀의 슈퍼 루키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사고를 쳤습니다!
장호영 캐스터가 악에 가까운 샤우팅을 내지르는 동안 박유성은 터지려는 웃음을 삼키며 그라운드를 돌았다.
‘완전히 얻어걸렸어.’
빠른 공에 타이밍을 맞춰보자는 생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던 건데 마지막 순간에 공이 꺾이면서 스위트 스폿 한가운데에 맞아줄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국 관중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지금 한국의 루키에게 홈런을 맞은 거야?”
“젠장! 말도 안 돼! 홈런이라니?”
“내가 한국의 루키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잖아!”
“크리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크리스 반스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초구로 기세를 꺾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크리스. 괜찮아. 어차피 한 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조이 패런트가 다급히 마운드 위로 올라와 크리스 반스를 달랬다.
비록 지난해 사이영상을 받긴 했지만 크리스 반스는 구위만큼 메이크업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마운드 위에서 쉽게 흥분하고 타자들과 과도하게 신경전을 벌이는 스타일 때문에 안티 팬들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 사이영상 투표에서 1위 표를 절반밖에 받지 못한 것도 에이스에 어울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크리스 반스도 완벽하게 던진 공을 얻어맞은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 공이 몰렸던 거야?”
“공은 제대로 들어왔어. 무브먼트도 좋았고.”
“그럼 저 녀석이 잘 친 거라는 거지?”
“몸쪽 빠른 공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잊어버려.”
조이 패런트가 훌훌 털어내라고 말했지만 크리스 반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온 기세등등한 루키들을 만나면 크리스 반스는 일부러 빠른 공으로 승부를 걸었다.
마이너리그에는 비록 제구는 안 되지만 100mile/h(≒160.9㎞/h)이 넘는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즐비하고 그들을 상대하다 보니 마이너리그 타자들이 빠른 공에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칠 테면 쳐보라며 빠른 공을 찍어 던졌다.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의 공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제대로 느끼게 해줘야 시건방진 눈빛이 꺾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메이저리그 루키들을 사납게 물어뜯은 끝에 루키 학살자라는 별명까지 얻어냈는데.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타자들도 쩔쩔매는 몸쪽 빠른 공을 노리고 있었다니.
그건 처음부터 자신의 공을 때려낼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박유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 모두 빠른 공을 노리고 들어올지도 모를 일.
“조이. 아무래도 한국에서 나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을 한 것 같아.”
“그야 당연하지. 결승전이잖아.”
“아무튼 조금 더 신중하게 리드해 줘. 여기서 더 점수를 내주면 곤란하니까.”
조이 패런트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했지만 자신감이 꺾인 크리스 반스는 3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풀타임 2년차 때 타자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 슬라이더를 남발하던 그 시절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