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58화
22. 어메이징 썬(2)
-헛스윙 삼진 아웃! 크리스 반스 선수가 송현민 선수에 이어 박준수 선수까지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이번에도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슬라이더였는데요. 저 공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크리스 반스의 투구 패턴에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정후 형. 크리스 반스가 원래 이렇게 슬라이더를 많이 던졌어요?”
“커터에 맛 들인 이후로는 슬라이더 확 줄였잖아. 타석당 하나나 던질걸?”
“그런데 갑자기 왜 저래요?”
“그러게.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하다.”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 중에서 크리스 반스를 가장 많이 상대한 건 레드삭스와 같은 지구 소속인 오리올스에서 뛰는 기정후였다.
그래서 대표팀 타자들이 경기 전에 기정후에게 크리스 반스를 상대할 팁을 구했고.
기정후는 포심 패스트 볼과 커터를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만큼 빠른 공에 타이밍을 맞춰 대처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박유성에게 홈런을 얻어맞은 이후 크리스 반스는 슬라이더만 7개를 던졌다.
2번 타자 감백호를 상대로 슬라이더만 연속 3개를 던져 좌익수 플라이를 유도했고.
3번 타자 송현민과 4번 타자 박준수에게는 바깥쪽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에 투 스트라이크 이후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크리스 반스가 2회에도 슬라이더 위주의 피칭을 이어가자 강기태 감독이 코치들을 불러 모았다.
“벤치에서 작전이 나온 걸까?”
“저도 미국 벤치를 유심히 봤는데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슬라이더가 늘어난 거야?”
“아무래도 유성이한테 홈런을 맞은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충격이 큰 것 치고는 너무 잘 던지는데?”
“마츠다 유이토도 포크 볼을 꺼내 들었지 않습니까. 4강도 아니고 결승인 만큼 크리스 반스도 이기고 싶을 겁니다.”
“하아……. 도대체가 쉬운 경기가 없어.”
강기태 감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대교체를 선언한 이상 팀 성적만큼이나 개인 성적도 중요하지만 기대만큼 해주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결승전을 앞두고 ESPM에서 발표한 대한민국 대표팀 개인 성적표에서 A등급 이상을 받은 건 아마추어 선수인 박유성(A+) 한 명뿐이었다.
미국전과 일본전에서 승리를 따낸 송찬우가 평균 이상이라는 B+를 받았고.
메이저리그 3인방을 포함해 나머지 선수들은 C등급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단순히 선수 개인 평가만 놓고 보자면 4강 탈락을 한 도미니카 공화국이나 푸에르토리코가 더 나을 정도였다.
덕분에 섣부른 세대교체를 지적하는 기사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올림픽에서 맹활약 중인 박유성도 세대교체를 통해 들어갔다는 반론도 적지 않았지만 이대로 올림픽이 끝나 버리면 박유성 혼자 야구했다는 주홍글씨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강기태 감독은 전략분석팀을 들들 볶아 크리스 반스의 약점을 찾으라 주문했고.
전략분석팀도 최근 3년간 경기 영상들을 탈탈 털어 최적의 공략 자료를 만들어왔다.
거기에 기정후의 조언까지 가미가 됐으니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여겼는데 크리스 반스가 갑자기 레퍼토리를 바꿔 버리면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다 또 유성이만 안타 치는 거 아냐?”
지난 일본과의 4강전 때도 박유성을 제외한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은 마츠다 유이토에게 안타를 때려내지 못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마츠다 유이토의 변칙 투구 때문에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이 말렸다고 옹호했지만 강기태 감독은 내심 자신의 잘못이라 자책하고 있었다.
마츠다 유이토가 워낙에 던질 수 있는 구종이 많다 보니 사전 미팅에서 포크볼은 머릿속에서 지우자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박유성이 마츠다 유이토의 포크볼을 연달아 공략해 내면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 경기에서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코칭스태프의 지도력을 의심받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추신우 수석 코치는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1회부터 앞서 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그래도 유성이가 잘해줘서 다행입니다. 만약에 1회 초에 대량 실점을 했다면 지금쯤 경기가 기울었을지 모릅니다.”
지난 예선전에서는 미국 대표팀에 끌려다니다가 박유성의 역전 홈런이 터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박유성이 시작부터 홈런을 때려내 준 덕분에 더그아웃 분위기가 밝아졌다.
경기 초반에 흔들렸던 임찬기도 정신을 차리고 크리스 반스 못지않은 호투를 펼치고 있었다.
-케빈 모랄 선수가 친 공이 높게 솟구쳤습니다만 중견수 박유성 선수가 제자리에서 공을 기다립니다.
-체인지업이었는데요. 케빈 모랄 선수가 제대로 맞혀내질 못했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깔끔하게 타구를 처리하면서 세 번째 아웃 카운트가 만들어집니다.
-박유성 선수의 안정감 있는 수비를 보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거 같습니다.
-임찬기 선수는 어떻습니까?
-1회 초에는 확실히 공이 날리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2회부터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한 점의 리드가 생기니까 공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던지는 게 눈에 보여요.
-그래서 임찬기 선수의 별명이 선득불패가 아니겠습니까?
-팀이 선취점을 뽑아낸 경기에서 승률이 90퍼센트가 넘죠?
-네. 이상하리만치 팀이 이기고 있을 때 더 강해지는 투수입니다.
국가대표 원투 펀치라 불리고 있지만 송찬우와 임찬기는 성향이 정반대였다.
다양한 구종을 바탕으로 타자들을 요리하는 송찬우는 점수와 상관없이 제 할 일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임찬기는 상당한 기분파였다. 동점이나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내키는 대로 던지지만 한 점이라도 팀이 리드를 가져간 순간 초집중 상태가 된다.
타이거즈의 대투수라 불리는 양현중에게 에이스의 책임감을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에이스는 빡센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어. 많은 득점 지원을 기대해서는 안 돼! 한 점이 어디냐? 그 한 점만 잘 지키면 승리투수가 되는 거야. 타자들이 만들어준 점수를 지켜내야 진짜 에이스야. 줄 점수 다 주고 퀄리티 스타트 했다고 쪼개지 마. 그건 2류들이나 하는 짓이야.’
“후우…….”
2회에 이어 3회도 삼자범퇴로 틀어막은 임찬기가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더그아웃 앞쪽에서 박유성이 오길 기다렸다.
“유성아. 고맙다.”
“에이. 이건 그냥 잡은 거죠.”
“내가 너 믿고 과감하게 승부 보는 거 알지?”
“걱정 말고 편하게 던져요. 형. 뒤는 저하고 정후 형, 백호 형이 맡을게요.”
말도 예쁘게 하는 막내의 엉덩이를 툭 때린 뒤 임찬기는 뒤늦게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송찬우가 슬그머니 다가와 옆에 앉았다.
“오늘 좀 던진다?”
“그럼. 결승전 선발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4강 선발?”
“준결승전 선발이라고 해줄래? 그리고 내가 못 이겼으면 넌 결승전 오지도 못했거든?”
“네. 다음 4강 선발.”
“와, 임찬기 많이 컸네. 예전엔 내가 결승 선발이었는데.”
송찬우가 웃으며 말했다.
타이거즈 우선 지명은 임찬기가 받았지만 실력은 송찬우가 조금 더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4번의 전국 대회 결승전에서 송찬우가 3번을 등판했고 임찬기는 1경기만 선발 출전했다.
광일 고등학교 감독은 단순히 로테이션의 문제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전문가들은 광일 고등학교 감독조차 투구에 안정감이 있는 송찬우를 더 신뢰하는 거라고 해석했다.
그러자 임찬기가 코웃음을 쳤다.
“많이 큰 건 너지. 고등학교 땐 내가 더 컸거든?”
임찬기의 키는 189㎝.
고등학교 2학년 때 찍은 이후 지금껏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데뷔 전까지는 190㎝로 알고 있다가 입단 신체검사에서 1㎝가 깎였다.
반면 고교 시절 임찬기보다 살짝 작았던 송찬우는 지금 196㎝까지 자라 있었다.
“뭘 먹고 이렇게 큰 거야?”
“파이터즈 탈출하려고 죽어라 먹었다.”
“좋겠다? 소원성취해서?”
“그러게. 1년 더 고생할 줄 알았는데 스타즈로 가게 될 줄은 몰랐네.”
아직 프로 야구 협회에서 트레이드 관련 입장 정리를 한 건 아니지만 송찬우를 비롯해 대표팀 선수들은 트레이드가 승인될 거라 예상했다.
요즘은 구단들도 빠꼼이라 안 될 트레이드는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론에서는 추첨제를 운운하며 드래프트 제도 개선까지 요구하고 있지만 박유성이라는 천재 선수 한 명 때문에 수십 년간 이어온 제도를 뜯어고친다는 것도 우스운 일.
“암튼 지금 많이 즐겨둬라.”
“뭔 소리야?”
“우리 유성이 말이야.”
송찬우가 놀리듯 말했다. 그러자 임찬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미국 스파이냐? 내 사기 떨어뜨리려고 작정했어?”
“스파이는 무슨. 그리고 오늘 한 점도 유성이가 뽑은 거거든?”
“하아……. 유성이가 타이거즈로 왔어야 했는데.”
“응. 아니야. 못 가. 유성이는 스타즈 우선 지명이야.”
“그거 확실한 거야?”
“언론에서 지금 난리잖아. 준수 말이 스타즈는 유성이 무조건 뽑자는 분위기래. 팬들도 유성이 지켜야 한다고 청원 운동 중이고.”
“타이거즈 팬들은 뭐 하냐.”
“아무나 청원 운동하냐? 스타즈는 애당초 우선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가능한 거지.”
“그런데 만약에 유성이 우선 지명으로 뽑히면 너 스타즈 못 가는 거 아니냐?”
임찬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라이벌로 살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송찬우가 좋은 팀에서 야구를 하게 되길 바랐다.
그러자 송찬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유성이 우선 지명하면 트레이드는 100퍼라고 봐야지.”
“왜?”
“우리 구단은 유성이 지명할 권리를 판 거거든. 그런데 스타즈에서 유성이를 우선 지명으로 뽑아버리면 너무 비싸게 부른 꼴이 되잖아. 절대 못 물러. 승인 안 해주면 단장님이 프협에 큰대자로 누울걸?”
“그럼 다행이긴 한데 참……. 앞으로 스타즈 만날 거 생각하니까 막막하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유성이 타석이다.”
“뭐? 벌써?”
임찬기가 그라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박유성이 타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경호 형하고 찬희 형 둘 다 초구를 쳤어.”
“미친. 진짜 내 생각 안 해주냐?”
대표팀 동료이기 이전에 야구 선배였지만 임찬기는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자신은 어깨가 빠져라 공을 던지는데 타자들이 쉴 시간조차 주지 않으니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자 송찬우가 걱정할 것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유성이 타석이잖아. 최소한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거야. 크리스 반스도 쉽게 승부 못 걸 테고.”
송찬우의 예상대로 박유성이 등장하자 크리스 반스가 갑자기 투구 판에서 팔을 풀더니 로진백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박유성과의 승부를 준비했다.
“크리스가 너무 신경 쓰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릭 지터 감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박경호와 박찬희를 상대로 공이라도 많이 던졌다면 모르겠지만 공 2개로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아놓고 저러는 건 박유성에게 겁을 먹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타석에 선 박유성도 치미는 웃음을 되삼켰다.
“얻어걸린 거라니까 그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