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17화 (217/412)

타자 인생 3회차! 217화

27. 다시 만난 일본(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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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성이 스타즈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다저스의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에게 몰려갔다.

메이저리그 구단들 중에 가장 먼저 적극적인 영입 의사를 밝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기자들 앞에서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썬이 스타즈에 입단한 건 개인적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봐요. 4년 후에 썬이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한다면 다저스는 편하게 지갑을 열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시 이 의견을 두고 다저스 팬들은 호구스러웠다는 비판을 쏟아냈고.

박유성에 대한 올 인 전략에 힘을 실어주었던 지역 언론들조차 빅마켓 구단주다운 태도를 보였다며 메이저리그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는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발언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도 한동안 SNS를 끊은 채 자숙 아닌 자숙의 시간을 가졌건만.

“봤지? 내가 뭐랬어? 썬은 더 성장할 거라고 했지?”

기습 번트로 2루를 파고드는 박유성을 보니까 다시 기가 살아났다.

옆에서 함께 경기를 지켜 보던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1회 초 박유성이 3루타를 쳤을 때도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현 시점에서 박유성의 최대 장점은 정확한 타격과 폭발적인 베이스러닝이었다.

메이저리그 평균을 상회하는 수비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박유성의 공격 능력은 훌륭했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빠른 발을 이용해 2루타를 3루타로 만들어내는 것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박유성이 박유성 한 정도?

애당초 저 정도 실력이 아니었다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조별 리그 경기를 지켜볼 일도 없었다.

물론 유격수 앞 땅볼 때 홈을 파고드는 건 살짝 감탄했다.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유격수가 펌블을 하는 바람에 홈을 쉽게 파고들었지만.

일본의 유격수를 조급하게 만든 플레이 자체는 확실히 지능적이었다.

다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처럼 책상을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 정도로 대단했던 건 아니었다.

지난 LA 올림픽 때도 3루에서 투수의 폭투를 유발하는 플레이를 선보였으니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방금 전 플레이만큼은 로이 홀랜드 보좌역도 부정을 할 수가 없었다.

“왜 말이 없어?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거야?”

“앤드류. 벙어리라니요. 단어 선택에 주의해 주세요.”

“이제야 말을 하네. 그래서 당신은 방금 전 썬의 플레이를 어떻게 봤나요, 로이 씨?”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짓궂게 굴자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박유성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싶어도 매번 저런 식이니 자신도 모르게 반감이 생겼다.

그러자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씩 웃었다.

“왜? 내 앞에서 썬의 칭찬을 하려니까 알러지 반응이 온 거야? 하하하. 그렇다면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 자네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으니까.”

“…….”

박유성이 다저스가 아닌 스타즈를 선택했을 때.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 이상으로 실망했다.

박유성을 잡기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다저스를 고작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도구로 써먹은 것 같아서 짜증이 났다.

거기에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바보같은 대답까지 더해지니까 박유성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렸다.

“썬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치가 있는 선수야. 4년 후? 그 때의 썬은 필요 없어. 보나마나 불필요한 버릇들만 잔뜩 들어서 지금의 반짝거림이 전부 사라지고 없을텐데 그런 선수에게 큰 돈을 쓰자고? 그건 미친 짓이야!”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철저하게 다저스의 입장에서 박유성에게 접근했다.

500만 달러 전후의 계약금으로 박유성을 데려온 뒤에 마이너리그에서 2년 정도 적응기를 갖게 하고, 이후 메이저리그에 올려 최소 2년 이상 최저연봉으로 굴려 구단의 초기 투자금을 회수한 뒤에 박유성의 활약 여부를 냉정하게 판단해 장기 계약을 논의하는.

북중미 시장의 특급 유망주들을 위한 성장 플랜을 그대로 적용했다.

하지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박유성이야말로 구심점이 없는 다저스 타선의 심장이 되어 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지켜봤지만 저렇게 야구를 재미있게 하는 선수는 처음이었다.

박유성의 플레이는 한 마디로 보는 맛이 있었다.

같은 포즈를 취해도 프로 모델은 뭔가 다른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처럼.

박유성의 플레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플레이가 신선하고 창의적이라는 건 아니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이제 막 만들어진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메이저리그만 해도 벌써 128년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선수들이 출현했고.

그들을 통해 수많은 씬들이 만들어졌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박유성이 펼치는 퍼포먼스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먼저 선보여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스탯 쌓기에 열중하는 요즘 선수들 중에 박유성처럼 열정적이고 창의적이며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선수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박유성은 경기의 흐름을 바꿀 줄 아는 선수였다.

-일본 대표팀 감독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니키타 쇼우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방금 전 타구는 단타로 끝냈어야 했어요.

-지금 카메라가 관중석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도쿄 돔을 찾은 모든 관중들이 거의 다 넋이 나가 있습니다. 대체 이게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라는 표정인데요.

-지난 올림픽에서 보여준 썬의 플레이에 여러번 감탄을 터트렸지만 방금 전 보여주었던 베이스러닝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리플레이 화면이 다시 나오는데요. 바깥 쪽 슬라이더가 들어오자 썬은 망설이지 않고 3루 쪽으로 번트를 댔습니다. 하지만 베이스 라인 뒤쪽에서 수비를 하고 있던 3루수는 썬의 기민한 플레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죠.

-그래서 포수인 구와하라 세이지가 마스크를 벗고 뛰쳐나온 겁니다. 가이 호타카가 타구를 처리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고 판단한 거죠.

-타구의 코스도 기가막혔습니다.

-베이스라인에 거의 붙어 움직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딱 멈췄는데요. 타구를 이렇게 굴려내려면 말 그대로 방향만 바꿔줘야 합니다. 불필요한 기교가 들어가면 회전이 걸리면서 파울 라인 밖으로 휘거나 포수가 처리하기 쉬운 위치로 구르게 되는 거죠.

-아마 썬은 타구의 방향을 보고 안타라고 확신했을 겁니다. 썬을 잡아내려면 투수인 니키타 쇼우가 팔로우 스루와 동시에 타구를 쫓아서 역동작으로 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건 만화 속에서나 가능할 테니까요.

-썬이 1루에서 2루를 돌 때의 장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1루에 거의 다 도착한 상태에서 타구를 확인했다면 2루로 움직이는 데 시간이 걸렸겠지만 썬은 세이프인 걸 확신한 순간 바로 타구가 어디 있는지 체크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수비수들이 공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곧장 2루로 내달렸죠.

-2루 송구를 포수인 구와하라 세이지가 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가이 호타카가 공을 잡아서 던졌다면 2루에서 접전이 펼쳐졌을텐데 구와하라 세이지에게 미뤄버렸죠.

-주변에서 썬이 2루로 뛴다는 얘기를 빨리 해줬어야 했는데 선수들의 반응을 보면 타구에 정신이 팔려 뒤늦게 알아챈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썬의 마법이 일본의 모든 내야수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린 셈이죠.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은 니키타 쇼우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마운드를 내려갔다.

차라리 박유성에게 성급하게 승부를 걸다가 또 다시 정타를 얻어맞았다면 교체를 했겠지만.

기습 번트 타구를 수비수들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일어난 사고이다 보니 니키타 쇼우에게 책임을 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 관중들은 투수를 바꾸지 않은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야? 계속 니키타로 가는 거야?”

“투수를 바꿔! 이대로 가다간 다시 점수를 내줄 거라고!”

“한국도 투수를 바꿨는데 왜 우리는 계속 니키타를 고집하는 거야?”

“니키타는 메이저리거야. 1회에 실점했다고 해서 무작정 끌어내릴 수는 없다고.”

“메이저리거가 뭐? 그게 뭐라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어! 오늘 경기를 잡아내려면 투수를 바꿔야 해!”

술렁이는 관중석을 올려다보며 박유성은 씩 웃었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사실 기습 번트 안타로 2루를 파고드는 건 무리수였다.

과거 기대형이 기습 번트를 댄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는 걸 보고 2루까지 내달린 전례가 있지만.

내야에 타구를 떨어뜨려 놓고 2루로 뛰는 건 본헤드플레이에 가까웠다.

물론 박유성에게는 뛸 만한 근거가 있었다.

유격수 우헤바야시 마사유키의 2루 커버가 늦었고.

3루수 가이 호타카는 송구를 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하고 타구를 구와하라 세이지에게 떠넘겼다.

심지어 경험이 많은 1루수 야마카와 겐스케도 1루로 던지지 말라고 소리쳤다.

무리해서 송구를 하다 실책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박유성이 자신의 등 뒤를 크게 돌아 2루로 뛰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타구 판단은 타구 주변에 모여 있는 선수들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다들 공이 그대로 파울 라인 밖으로 굴러 나가기만을 바란 것이다.

덕분에 박유성은 너무나도 손쉽게 2루를 파고들었다.

좀 뛴다는 선수들에게 빈 베이스를 훔치는 건 도루보다 쉬운 일이었다.

투수가 공을 잡고 있어도 진루하려는 베이스에 수비수가 없으면 타자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베이스러닝에 자신이 없는 선수들은 그 찰나의 빈틈을 포착하지 못하지만,

박유성처럼 여러 차례 도루왕을 차지한 선수들은 뭔가 빈 공간이 생기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후우…….”

마운드 아래에서 몇 번이고 숨을 고른 니키타 쇼우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방금 전 야수들의 멍청한 행동에 분노가 폭발했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이 먼저 타구를 잡지 말라고 소리쳤으니 야수들만 탓할 수도 없었다.

그런 니키타 쇼우를 향해 일본 대표팀의 정신적인 지주 야마카와 겐스케가 크게 소리쳤다.

“괜찮아, 괜찮아! 차근차근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면 돼!”

일본어를 거의 모르는 박유성이지만 야마카와 겐스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괜찮다고? 글쎄. 이제 다시 안 괜찮아질 예정인데?”

니키타 쇼우가 투구판을 밟자 박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리드를 넓혔다.

한 발.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순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니키타 쇼우와 눈이 마주쳤지만.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니키타 쇼우를 노려봤다.

그러자 니키타 쇼우가 짜증스럽게 투구판에서 발을 뺐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견제구를 던져 박유성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우에바야시 마사유키가 제 자리로 돌아가버린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녀석. 적당히 해.”

박유성이 니키타 쇼우의 성격을 긁자 우에바야시 마사유키가 다가와 한마디 했다.

하지만 박유성에게 일본어로 떠든들 들릴 리 없었고.

설사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박유성이 적당히 할 리 없었다.

니키타 쇼우가 다시 투구판을 밟고 투구 준비에 들어가자 박유성은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마치 세 발까지는 괜찮다고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공인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당당하게 리드를 벌리자 니키타 쇼우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뒤쪽으로 빠졌던 우에바야시 마사유키가 다급히 2루 베이스 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 경기를 잡기 위해서라도 박유성을 멋대로 풀어줘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자 니키타 쇼우도 곧바로 투구판에서 발을 빼고 몸을 돌렸다.

익숙하지 않은 2루 견제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박유성에 대한 짜증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박유성은 바보처럼 2루로 귀루하지 않았다.

니키타 쇼우가 2루를 향해 몸을 돌리는 걸 확인하기가 무섭게 3루를 향해 내달렸다.

-아아, 박유성 선수가 3루로 뜁니다! 3루에서…… 3루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일본 대표팀을 농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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