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24화
28. 황소개구리(5)
민병규와 사적으로 깨톡을 주고받을 만큼 친해지긴 했지만 아직 프로 데뷔조차 못 한 후배가 홈런 하나 때렸다고 선배를 가르치는 건 선 넘는 짓이었다.
그래서 대충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민병규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지 말고 같이 좀 살자.”
“그냥 운 좋게 하나 걸린 거예요.”
“너 진짜 이럴래? 내가 대기 타석에서 다 봤거든?”
“보긴 뭘 봐요? 내 등 뒤에 있었잖아요.”
오늘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홈 팀이라 1루 쪽 더그아웃을 쓰게 됐다.
당연하게도 1루 쪽 대기 타석에서는 좌타자인 박유성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도 들으면서 뭔 소리인가 했다.”
옆에 있던 박준수도 핀잔을 주었다. 거짓말을 해도 좀 성의 있게 해야 속아줄 텐데 민병규는 늘 저런 식이었다.
하지만 민병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암튼 너 체인지업 던질 줄 알고 있었잖아. 아니야?”
“그냥 찍은 거예요.”
“아니야. 박준수 저 곰탱이는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뭐 인마?”
“넌 좀 빠져 있어. 테이블세터끼리 얘기하는데 왜 자꾸 끼는 거야?”
순간 박준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이러다 진짜 서로 감정 상할까 봐 박유성이 냉큼 말을 받았다.
“그래요. 체인지업 들어올 줄 알고 있었어요. 됐죠?”
“이거 봐 이거. 뭔가 아는 게 있으면 형들하고 공유를 할 생각을 해야지 너만 혼자 홈런 치니까 재밌냐? 즐거워?”
“네. 재밌고 즐거운데요?”
“어휴. 진짜 랜더스로 왔어야 했는데.”
민병규는 박유성이 자신의 팀 후배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쉬웠다.
팀 후배였다면 매일같이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하면서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을 텐데.
대표팀에서만 보다 보니 선배 무서운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박준수가 박유성을 감싸고 나섰다.
“왜 또 유성이한테 시비야?”
“시비는 무슨 시비. 체인지업 타이밍 좀 알려달라는 게 시비야?”
“넌 생긴 거 자체가 시비야.”
“그건 네 얘기고.”
“둘 다 똑같으니까 1절만 해요.”
“야, 똑같긴 뭐가 똑같아? 엄연히 레벨이 다른데.”
“레벨은 무슨 레벨?”
“너 여자 친구 없잖아? 하지만 난 소정이가 있지.”
“나는 여자 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여자를 안 만나는 거거든?”
“꼭 여자 못 만나는 애들이 그렇게 말하더라.”
박준수와 민병규가 티격태격거리자 주변에 앉아 있던 선수들의 시선이 몰렸다.
“쟤들 또 시작이네.”
“내버려 둬.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한동안 침체했었던 고교 야구에 송현민이라는 스타가 등장하면서 언론에서는 송현민의 뒤를 이어줄 후계자 찾기에 나섰고.
박준수와 민병규, 송찬우, 임찬기라는 재능 있는 투타 4인방을 발굴하며 스타로 키워냈다.
같은 학교 소속이었던 송찬우와 임찬기보다 학교가 달랐던 박준수와 민병규가 조금 더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시작된 라이벌 구도는 프로에 와서 더 심화되었다.
지난 5년 동안 박준수와 민병규는 토종 1루수 홈런왕부터 시작해 나눔 리그 1루수 부분 골든 글러브와 연차 최고 연봉 등을 두고 계속해서 맞붙게 된 것이다.
특히나 작년에는 스타즈가 창단 첫 포스트 시즌을 노리면서 트윈스와 막판까지 치열하게 싸웠는데 언론은 박준수와 민병규의 성적을 매일같이 언급하며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해댔다.
이쯤 되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서로 얼굴 보기 거북해지게 마련이지만 박준수와 민병규는 달랐다.
인터뷰 때 서로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자신이 더 낫다고 떠들어대다가도 대표팀에서 만나면 지금처럼 지지고 볶으며 잘 지냈다.
오죽하면 둘이 전생에 부부였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박유성도 박준수와 민병규의 애증(?) 관계를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에 이미 겪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3회차 때도 별생각 없이 지내려고 했는데 요즘 들어 자신을 사이에 두고 이러니까 슬슬 짜증이 났다.
“형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울래요?”
“싸우는 거 아니거든?”
“그리고 경기 중인데 나가긴 뭘 나가 인마.”
“그럼 경기에 집중 좀 하든가요. 이제 겨우 1 대 0이에요. 일본전처럼 박빙이 될지도 모른다고요.”
대한민국 대표팀은 조별 풀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과 혈전을 치렀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예상한 3점 차 승부는 맞아떨어졌지만 양 팀 모두 두 자릿수 득점(13 대 10)을 만들어내며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박유성은 장차 대한민국 대표팀 타선의 기둥이 되어야 할 박준수와 민병규가 조금 더 듬직해지길 바랐다.
그렇다고 송현민처럼 일부러 분위기를 잡으라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입씨름을 하는 건 경기 후반에 한 열 점 차쯤 앞서고 있을 때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자 민병규가 이때다 싶어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까 알려줘. 넌 알고 있잖아.”
“아는 거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알려줘, 이 치사한 놈아.”
“괜히 알아봐야 더 헷갈린다니까요?”
“이것 봐. 내 말이 맞지? 유성이 이놈 뭔가 알고 있다니까?”
박유성의 말에 꼬투리를 잡으며 민병규가 열을 올렸고.
박준수도 슬쩍 숟가락을 얹었다.
“유성아. 형은 알려줄 거지?”
“형은 그냥 치면 돼요.”
“그러지 말고 나만 몰래 알려주라. 병규야 랜더스지만 우린 같은 스타즈잖아.”
“국대에서 누가 소속팀으로 편 가르기를 해? 친한 기자 누나들한테 다 이른다?”
“친한 기자 누나들? 소정 씨는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냐?”
“여기서 소정이 이야기가 왜 나와?”
두 사람이 다시 언성을 높이자 박유성은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말해줄 테니까 대신에 경기 끝날 때까지 두 사람 10미터 간격 유지. 오케이?”
“오케이. 콜! 나 준수 저놈 보러 온 거 아니다?”
“10미터 말고 100미터 안 되겠냐? 아니면 병규 저놈 푸에르토리코 벤치에 박아놔도 되고.”
“가려면 네가 가 인마. 난 유성이 옆에 있을 거니까.”
“유성이 옆은 내 자리거든?”
“둘 다 스톱!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이번 대회 끝날 때까지 형들하고 말 안 합니다.”
박유성이 으름장을 놓자 박준수와 민병규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야수들 중에서 두 사람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막내인 박유성뿐이었다.
“후우……. 일단 대충 참고만 해요. 괜히 타석에 서서 눈 부라리고 티 내지 말고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꺼내봐.”
“이번엔 또 뭘 알아낸 거야?”
“오른팔이요.”
“오른팔?”
“정확하게는 오른팔 근육.”
“와. 씨……. 하아. 욕 나올 뻔. 이제 하다 하다 남자 팔근육까지 봐야 하는 거야?”
민병규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며 몸서리를 쳤다.
한소정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며 해외 진출을 포기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하는 민병규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팁이었다.
하지만 박준수는 달랐다.
“팔근육이 뭐가 어떻게 다른데? 그립마다 모양이 달라져?”
“모양도 모양이지만 팔꿈치 위치가 좀 달라요. 이건 직접 보면 아는데 포심을 던질 때보다 아무래도 변화구를 던질 때 조금 더 팔꿈치가 내려와요. 근데 그 차이가 그렇게 티가 나는 건 아니라서 볼카운트까지 고려해야 하고요.”
설명을 마치자 민병규와 박준수는 성격대로 반응했다.
“뭐야, 그게. 결국 끼워 맞추라는 거잖아?”
확실한 정답을 원했던 민병규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박준수는 뭔가 알 것 같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 포인트 레슨의 효과는 2회 말에 바로 이어졌다.
선두 타자로 나선 박준수가 3구째 몸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퍼 올려 좌중간을 깨끗이 갈라 버린 것이다.
1회에 추가 득점에 실패했던 터라 강기태 감독은 곧바로 희생번트를 주문했고.
딱.
8번 타자 박경호가 3루 쪽으로 기가 막히게 타구를 돌리며 박준수를 3루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찬희야! 편하게 쳐! 편하게!”
9번 타자 박찬희를 타석으로 보내며 강기태 감독이 크게 독려했다.
박찬희가 부담을 갖지 않고 공을 제대로 때려내기만 한다면 3루 주자가 홈을 밟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발 삼진하고 유격수 땅볼만 피하자.’
강기태 감독은 박찬희가 1, 2루 쪽으로 타구만 굴려도 좋다고 여겼다.
워낙에 발이 빠르다 보니 박찬희가 뛰기 시작하면 수비수도 함부로 홈 승부를 걸지 못할 터.
그렇게 한 점만 따내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는데.
따악.
박찬희가 힘껏 잡아당긴 타구가 하필이면 유격수 정면으로 굴러갔다.
-유격수 카를로스 마틴이 잡아 1루로. 3루 주자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바깥쪽 투심 패스트 볼이었는데요. 박찬희 선수의 방망이 끝에 걸렸습니다.
-볼카운트가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만 결과가 아쉽습니다.
-2구째 몸쪽으로 들어온 빠른 공을 놓친 게 컸어요. 그 공을 왜 치지 않았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웃 카운트가 하나 늘어난 상황에서 이제 대한민국의 톱타자, 박유성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앞선 첫 타석에서는 선두 타자 홈런을 때려낸 바 있는데요.
-여기서 박유성 선수가 하나 해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푸에르토리코 벤치에서 승부를 지시하지는 않겠죠.
-박유성 선수가 어떤 선수인지는 1회 초에 겪었으니까요. 박유성 선수를 거르고 민병규 선수와 승부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대한민국 중계석은 볼넷을 예상했다.
첫 타석에서 바깥쪽 높은 체인지업을 퍼 올려 전광판 상단을 때려내는 괴력을 선보인, 이번 대회 10할 타자에게 다시 승부를 거는 건 여러모로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은 호세 로페즈가 흐름을 탔다고 판단했다.
박유성에게 홈런을 허용하고 송현민에게 2루타를 맞은 뒤에 기정후를 볼넷으로 내보낼 때까지만 해도 투수를 바꿔야 하나 싶었지만.
투심 패스트볼 비중을 높이고 난 다음부터 다시 안정감을 되찾았으니 이번 타석도 한번 맡겨보고 싶었다.
‘여기서 썬을 잡아내면 호세를 7회까지 끌고 갈 수 있어.’
타선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의 선발진은 화려한 편이었다.
블루제이스에서 기사회생한 호세 로페즈를 필두로 브루어스에서 뛰는 호세 히메네스, 레이스에서 맹활약 중인 올랜도 디아즈까지 이름값으로는 미국을 제외한 그 어떤 팀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불펜은 믿을 만한 투수가 없었다.
매리너스에서 뛰는 알렉스 레온을 제외하고 전부 마이너리그 투수들이다 보니 박빙의 상황에 내보내기가 불안했다.
지난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8강전에서도 7 대 0으로 크게 앞서서 선발 투수를 뺐다가 하마터면 경기가 뒤집힐 뻔했다.
타자들이 추가점을 뽑아줘서 13 대 9로 이기긴 했지만 이날 경기 이후 푸에르토리코 언론에서도 투수 교체 타이밍에 대한 쓴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은 호세 로페즈를 최대한 길게 끌고 가고 싶었다.
짧으면 7회. 길면 8회까지.
그리고 마지막을 알렉스 레온에게 맡긴다면 5회 연속 결승 진출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의 의지를 확인한 포수 지오반니 페레즈는 초구부터 과감한 사인을 냈다.
‘몸쪽 투심이라.’
호세 로페즈도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타석에서 투심 패스트볼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충분히 먹힐 것 같았다.
투심 패스트볼도 투수마다 무브먼트가 다르지만 호세 로페즈의 투심 패스트볼은 일반적인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좌타자의 몸쪽을 파고들다가 다시 바깥쪽으로 꺾여 나가는.
빈볼을 의식하고 몸을 사리는 좌타자의 허를 찌르기 좋은 공이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초구를 칠 생각이 없었다.
박준수의 선제 2루타가 잔루 위기에 처한 지금 경기 분위기는 푸에르토리코가 쥐고 있었다.
이럴 때는 테이블 세터답게 최대한 오래 공을 지켜봐 줘야 했다.
한 번 흐름을 타면 무섭게 몰아치는 푸에르토리코 타자들의 진을 빼기 위해서라도 수비 시간을 늘려야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유성의 몸쪽에 초구부터 투심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으니 데이터만 헌납한 꼴이었다.
“투심을 던질 때는 왼팔이 들리네?”
만약 지오반니 페레즈가 한국어를 알아들었다면 화들짝 놀라 타임을 부르고 마운드로 뛰어갔겠지만.
박유성이 초구에 꼼짝 못 했다고 생각한 지오반니 페레즈는 제멋대로 박유성의 말을 해석했다.
‘포심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 같은데…… 바깥쪽으로 하나 뺐다가 다시 한번 찔러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