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25화
28. 황소개구리(6)
지오반니 페레즈가 가랑이 속으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신중하게 사인을 낸 뒤에 제 미트를 두 번 두드렸다.
‘바깥쪽 슬라이더라.’
잠시 고민하던 호세 로페즈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첫 타석 때 바깥쪽 체인지업을 밀어 넣었다가 홈런을 얻어맞긴 했지만 초구에 몸 쪽 투심 패스트 볼로 스트라이크를 잡았으니 하나 찔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던 호세 로페즈가 한참 만에 투구판을 박찼고.
후앗!
호세 로페즈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바깥쪽으로 움직였다.
‘슬라이더.’
구종을 파악한 박유성은 타격을 포기했다.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날아오는 슬라이더라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긴 어려울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 공이 꾸역꾸역 안쪽으로 말려 들어오더니 지오반니 페레즈의 프레이밍이 더해지면서 바깥쪽 꽉 찬 스트라이크로 변해 버렸다.
“와, 이걸 스트라이크로 만드네.”
박유성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지오반니 페레즈를 바라봤다.
그러자 지오반니 페레즈가 웃는 얼굴로 까불어댔다.
“메이저리그에서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썬.”
지오반니 페레즈는 박유성이 영어를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김찬혁 팀장에게 꾸준히 영어를 배워온 박유성은 거의 대부분의 단어를 알아들었다.
“친구야. 그런 얘기는 주전부터 되고 해줄래?”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오반니 페레즈를 뒤로하고 박유성은 천천히 루틴을 실행했다.
전광판 하단의 노란색 램프와 빨간색 램프에 전부 불이 들어왔지만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프로 40년 차 짬이 있는데 이 정도로 쫄리면 안 되지.’
1회차 시절.
박유성은 2스트라이크 이후의 승부에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을 맞히는 데 나름 일가견이 있다 보니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들어오는 유인구들을 침착하게 골라내지 못했다.
그래서 2회차로 넘어오면서 인내심을 길렀다.
중장거리 타자로 끝났지만 거포로 변신했다고 착각하던 시절이라 거포답게 유인구에 최대한 속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시즌당 30개도 되지 않았던 1회차 시절 평균 볼넷(28.5개)이 3배 가까이 늘어났다.(69.6개)
3회차에 접어든 박유성은 스스로를 하이브리드형 타자라고 말했다.
투 스트라이크에 몰리기 전까지는 1회차 때처럼 적극적으로.
투 스트라이크가 된 이후에는 2회차 때처럼 침착하게.
3구째 호세 로페즈가 몸 쪽으로 체인지업을 떨어뜨렸지만 박유성은 그대로 공을 흘려보냈다.
4구도 마찬가지.
후앗!
2구째와 거의 비슷하게 날아든 포심 패스트 볼을 가볍게 때려 파울로 만들었다.
-이번에는 파울! 박유성 선수가 5구 승부까지 끌고 갑니다.
-호세 로페즈 선수가 다시 한번 바깥쪽을 공략했습니다만 박유성 선수가 가볍게 커트해 냈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프로 야구를 중계하실 때 투 스트라이크 이전과 이후의 대처는 달라야 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하셨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그 모범 답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건 모범 답안 그 이상입니다. 앞서 들어온 체인지업까지는 골라내더라도 방금 공을 저런 식으로 커트하기란 쉽지 않거든요. 중계 화면으로 보기에는 빠진 공처럼 보이지만 타석에서 보면 또 다릅니다.
-게다가 거의 비슷한 코스의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걷어내지 못하고 범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박유성 선수는 힘들이지 않고 파울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러면 투수 입장에서도 난감해질 것 같은데요.
장호영 캐스터의 말처럼 호세 로페즈는 5구 사인에 몇 번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오반니 페레즈는 다시 한번 유인구로 박유성을 속여보자고 제안했지만 호세 로페즈는 방금 전 공보다 더 완벽한 유인구를 던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지오반니 페레즈와 호세 로페즈는 단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공을 던지는 데 합의했다.
바로 커브.
그것도 한복판에서 낮게 떨어지는 커브라면 엉겁결에 방망이가 끌려 나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박유성은 호세 로페즈의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가는 순간 커브인 걸 눈치챘다.
호세 로페즈가 구사하는 구종 중에 평소보다 공이 일찍 빠져나오는 건 커브뿐이었다.
게다가 급하게 던지느라 공을 제대로 채지 못했다.
-이번에는 볼. 지오반니 페레즈 선수가 가까스로 공을 잡아냅니다.
-지금 커브를 던진 거 같은데요. 제대로 제구가 되지 않으면서 하마터면 포수 가랑이 사이로 빠질 뻔했습니다.
-다행히 홈플레이트 앞쪽에서 바운드가 되면서 블로킹이 됐는데요. 홈플레이트를 맞았다면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포수도 제대로 된 동작으로 블로킹을 한 게 아니거든요. 만약에 홈플레이트를 맞고 굴절이 됐다면 3루 주자가 홈을 밟았을 겁니다.
하마터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지만.
“괜찮아! 괜찮아!”
포수 지오반니 페레즈는 오히려 호세 로페즈를 독려했다.
경기 중에 거의 던지지 않는 커브 볼을 긴박한 순간에 요구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더라도 투수를 탓할 수가 없었다.
“후우…….”
호세 로페즈도 애써 숨을 골랐다.
커브가 손에서 빠지는 순간 아차 싶었는데 자오반니 페레즈가 블로킹으로 잘 막아준 걸 보니까 야구의 신이 돕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방금 전 공에 필요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호세 로페즈가 한복판으로 떨어지는 커브를 던지려다가 제구 실수로 공을 빠뜨렸고.
하마터면 가랑이 사이로 빠질 뻔한 공을 포수 지오반니 페레즈가 잘 잡아냈다.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은 손쉽게 추가점을 얻을 기회가 날아갔다며 아쉬워할 수도 있겠지만 타석에 선 타자는 다음 공을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방금 전 승부에서 손해만 본 것도 아니었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던 볼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뀌었고.
뜬금없이 커브를 던질 만큼 호세 로페즈가 심리적으로 몰려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
호세 로페즈가 던질 수 있는 모든 구종을 전부 봤다는 것도 희소식이었다.
투구 직전에 양 팔꿈치가 제자리에 있으면 포심 패스트 볼.
오른쪽 팔꿈치가 살짝 쳐지면 체인지업.
왼쪽 팔꿈치가 살짝 들리면 투심 패스트 볼.
슬라이더는 던지는 순간에 어깨가 좀 더 열리고 커브는 일찍 공을 놓으니까 호세 로페즈가 무슨 공을 던지더라도 전부 분별해 낼 수 있었다.
‘이제 내 차례야.’
한결 상기된 얼굴로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루틴을 펼쳤다.
그리고 왼쪽 어깨에 방망이를 걸치며 호세 로페즈의 공을 기다렸다.
그 순간, 오랫동안 공을 잡고 있던 호세 로페즈가 벼락같이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고.
후앗!
호세 로페즈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한복판을 지나 몸 쪽으로 파고들었다.
어지간한 좌타자들은 흠칫 놀라 몸을 피할 만한 코스였지만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호세 로페즈가 공을 던지기 전부터 투심 패스트 볼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이겨낸 박유성은.
따악!
다시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려는 공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건…… 넘어갈 것 같은데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이 타구는…… 우익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갑니다! 호옴런! 투런!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분위기를 가져옵니다!
유유히 베이스를 돈 박유성이 홈플레이트를 밟자 박준수와 송현민이 동시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이스 배팅!”
“잘했어. 유성아!”
두 사람과 가볍게 손뼉을 부딪친 박유성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선배들에게 축하를 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홈런이나 안타를 칠 때마다 손바닥 세례를 받으니까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예쁜 후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대표팀 선배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파요! 아파요! 아파요!”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호들갑을 떨며 박유성은 늘 앉던 자리로 도망쳤다.
대표팀 막내라 선배들이 잘 앉지 않는 더그아웃 끝에서 두 번째 벤치를 애용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박유성의 지정석이 되어버렸다.
그런 박유성의 옆으로 박준수가 냉큼 붙어 앉았다.
“유성아. 고맙다.”
“뭐가요?”
“네 말대로였어. 눈 부릅뜨고 보니까 다른 게 보이더라.”
박준수는 첫 타석 안타의 영광을 박유성에게 돌렸다.
박유성의 조언대로 호세 로페즈의 오른팔을 유심히 살핀 덕분에 안타를 때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유성은 자신의 조언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 박준수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헷갈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집중이 더 잘되던데?”
“그래요?”
박유성이 고개를 돌려 경기장을 바라봤다.
타석에서는 앞서 땅볼로 물러났던 민병규가 호세 로페즈와 두 번째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병규 형은 어떨까요?”
박유성은 민병규에게도 자신의 조언이 효과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박준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병규는 네 말 안 들을걸?”
“아무래도 그렇겠죠?”
“추 코치님이 맨날 하시는 말씀 있잖아.”
“병규 형 고집 조금만 내려놓으면 타율이 3푼은 올라간다는 거요?”
“추 코치님이 병규 엄청 아끼시는 거 알지? 그래서 나도 가끔 뭐라고 하나 궁금해서 엿듣는데 병규 저 녀석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더라.”
“왜요?”
“자기 스타일하고 결이 다르대. 아니 전직 메이저리거가 있으면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하나라도 얻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때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민병규의 방망이가 돌아갔고.
타구는 2루수 프란시스코 코레아의 정면으로 굴러갔다.
“내가 말했지? 저 녀석 네 말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고.”
타격의 결과를 확인한 박준수가 저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을 쳤다.
푸에르토리코 배터리가 박유성과 승부를 해줬으니 망정이지 박유성을 거르고 민병규를 상대했다면 잔루만 쌓일 뻔했다.
“아, 씨. 왜 거기서 체인지업이 들어오냐.”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민병규가 보란 듯이 투덜거렸다.
내심 몸 쪽 빠른 공을 기다렸는데 초구부터 몸 쪽 체인지업이 들어올 줄은 예상 못 했다.
그러자 글러브를 챙겨 들고 나가려던 박준수가 한마디 했다.
“너 유성이가 시키는 대로 안 했지?”
“뭐? 팔꿈치? 야, 그걸 어떻게 해?”
“난 그래서 안타 쳤는데?”
“뭐? 진짜?”
“야, 유성이 말 잘 들어. 유성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자다가도 안타가 나온다.”
“X발.”
민병규를 약 올리고 1루 베이스 쪽으로 걸어가던 박준수는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송현민에게 붙잡혔다.
“준수야. 아까 했던 말 다시 해봐.”
“네? 뭐, 뭐가요?”
“유성이가 뭘 어쨌다고?”
“그게…… 그냥 유성이한테 물어보시면 안 될까요?”
“유성이한테도 물어볼 건데 그전에 네가 아는 걸 전부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박준수와 송현민은 고작 한 살 차이였다.
보통 한두 살 차이면 또래 그룹으로 인식되게 마련이지만.
박준수는 물론이고 민병규가 가장 무서워하는 선배가 다름 아닌 송현민이었다.
대표팀의 다른 선수들이 송현민의 고교 리그 활약상을 기사나 언론으로 접한 반면 박준수와 민병규는 자신들의 선배들을 박살 내고 포효하는 송현민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송현민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덕우 고등학교는 2년간 전국 대회 우승 트로피를 쓸어 담다시피 했다.
박준수와 민병규도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지만 차원이 다른 괴력을 뽐내던 송현민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게…… 유성이가 호세 로페즈 상대하는 팁을 알려줬는데요.”
“뭐?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형은 알아서 잘하시니까…….”
“이거 웃긴 놈이네? 너 아시안 게임 때 내가 조언해 줬냐 안 해줬냐?”
“……해주셨죠.”
“지난 올림픽 때도 내가 좋은 얘기 많이 해줬지? 그런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
“…….”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거야. 하아……. 그래서? 유성이가 뭐래?”
“팔꿈치를 잘 보면 된다고…….”
“육하원칙에 맞게 똑바로 말 안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