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2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4)
사실 박유성의 설명은 대단할 게 없었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를 상대로 히팅 타이밍을 빠르게 가져가는 건 타격의 기본이었다.
다만 크리스 반스라는 이름값에 눌려 다들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그걸 박유성이 간단하게 풀어주었다.
크리스 반스의 공을 어떻게 치느냐의 문제를 어깨 회전이 느린 투수의 공을 어떻게 치느냐의 문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크리스 반스의 공이 빠른 건 그만큼 앞으로 나와서 던지기 때문이라는 거네요.”
“선동연 감독님 느낌인 건가?”
“선동연 감독님도 마운드 앞에서 공을 던지는 느낌이었다잖아.”
“크리스 반스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대신에 체격 조건이 좀 많이 좋죠. 키도 크고 팔도 길고. 거기에 투구폼도 유연하고요.”
“난 크리스 반스 투구폼이 깨끗해서 쉽게 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안 되더라.”
“형. 그게 함정이에요. 차라리 디셉션이 있는 투수라면 타이밍 계산하기가 쉽잖아요? 그 동작 이후로 공이 나올 테니까요. 그런데 크리스 반스는 투구폼이 메이저리그 투수치고는 깨끗한 편이죠. 대신에 공은 끝까지 안 보여줘요. 어깨 회전도 늦고 디딤발도 약간 사선으로 밟기 때문에 공이 보이자마자 바로 날아드는 느낌?”
“오오, 그래! 맞아. 딱 그거야.”
“그런 공을 치려면 키킹을 최소화하고 정타를 맞히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현재 방에 모인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은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대부분 중장거리형 타자였다.
김하선과 기정후, 감백호는 물론이고 2027년 45개의 홈런을 때려낸 송현민과 작년에 각각 45개와 39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긴 박준수, 민병규까지.
메이저리그의 거포들에 비해 힘이 부족했다.
그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대부분의 타자들이 키킹을 크게 가져갔다.
디딤발을 높게 차올렸다가 단단히 내디딘 뒤에 그 힘을 바탕으로 역동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러 부족한 힘을 만회하는 것이다.
문제는 크리스 반스의 딜리버리 타임이 메이저리그에서도 톱 클래스 수준이라는 점이다.
딜리버리 타임이 짧은 투수들의 공은 그만큼 빨리 대처를 해야 한다.
더욱이 크리스 반스는 공을 끝까지 끌고 나왔다가 던지기 때문에 평소대로 대처했다간 타이밍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마크 스테리 말이야. 크리스 반스를 상대할 때는 미리 스트라이드를 해놓더라고.”
“원래 그랬던 거 아니에요?”
“아냐. 원래는 키킹을 해.”
때마침 기정후가 부연 설명을 곁들이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2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한 마크 스테리도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간결한 스윙을 하는데 자신들만의 타격 스타일을 고수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민병규가 손을 들었다.
“쌤! 질문있습니다.”
“안 받아요.”
“에이, 그러지 말고 질문하게 해주세요. 네?”
보나마나 쓸데없는 소릴 할 것 같아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민병규가 끝내 손을 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아주었다.
“뭔데요?”
“미리 스트라이드를 해놓고 치면 밸런스가 안 맞아서 타구가 내야에서 놀 가능성이 높은데 괜찮을까요?”
민병규의 질문에 옆에서 눈치를 주던 박준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리스 반스의 공을 공략하기 어려운 건 구위가 좋아서였다.
그리고 구위가 좋은 공은 단순히 맞히는 것만으로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기 어려웠다.
“최대한 배트 중심에 맞히도록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그게 말처럼 쉬울까요? 크리스 반스가 던지는 구종이 한두 개가 아닌데요.”
감백호가 대안을 제시했지만 민병규가 바로 반박했다.
결승전에서 보란 듯이 안타를 때려내고 싶은 마음이 큰 민병규로서는 키킹을 최소화하라는 조언이 타격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자 박유성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병규 형. 형 내일 몇 번 타자예요?”
“2번 타자잖아.”
“2번 타자는 테이블 세터 맞죠?”
“난 강한 2번 타자 느낌인데?”
“그럼 내일 홈런 하나 치겠네요. 기대할게요.”
“야, 갑자기 무슨 홈런이야? 너 이런 식으로 부담 주기 있냐?”
민병규가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민병규를 포함해 젊은 선수들 상당수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무대에서 뭔가를 보여줄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렇게 개인 플레이를 하다 보면 크리스 반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선이 형. 결승전 때도 투구수 제한 있죠?”
“있지. 95구. 그래서 크리스 반스가 8강전 때 일찍 내려갔잖아.”
“4강전 때 게릿 벌렌더도 6회를 겨우 버텼잖아요.”
“일본 타자들이 진짜 이 악물고 버티더……. 어? 그러니까 네 말은……?”
“제가 크리스 반스라면 결승전 때 최대한 오래 버티고 싶을 거예요. 올림픽 결승전 때도 일찍 마운드를 내려갔잖아요. 우릴 상대로 두 번이나 그러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 크리스 반스 자존심이 있는데.”
“아마 볼 낭비를 줄이면서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해 오겠죠. 하지만 우리가 한 명당 투구수를 하나씩만 늘린다는 각오로 버티면 크리스 반스도 당황하지 않을까요?”
박유성의 말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올림픽 때처럼 투구수 제한이 없는 것도 아니고 95구 이상 던지지 못하는 대회 규정이 존재하는 만큼 얼마든지 일찍 끌어내릴 수 있었다.
“제가 방금 계산해 봤는데요. 그냥 편하게 유성이 말고는 다 죽는다고 치고 1인당 공 5개씩만 보면 유성이 세 번째 타석 전에 무조건 교체입니다.”
“그럼 6회 교체야?”
“네. 6회 1사 이후 교체인데 우리중에 한 명만 안타를 치면 5회 끝내고 강판시킬 수도 있습니다.”
박경호의 보충 설명에 다들 표정이 달라졌다.
지난 올림픽 때처럼 박유성 버스를 탔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싶지 않아서 박유성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던 건데 꼭 안타가 아니더라도 제 몫을 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안타를 못 쳐도 된다는 거죠?”
“안타를 칠 수 있으면 쳐야지. 다만 크리스 반스를 일찍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경기 후반에도 기회가 생길 거라는 거야.”
“미국도 불펜 투수들은 해볼 만해. 크리스 반스만큼 까다로운 투수는 없어.”
“크리스 반스만큼 까다로운 투수였으면 선발로 갔겠죠. 불펜에 있겠어요?”
메이저리그 불펜 투수들의 대우가 많이 좋아지긴 했다지만.
어지간한 선발 투수가 최고 레벨의 불펜 투수보다 많은 돈을 받는 게 사실이었다.
붙박이 셋업이나 마무리가 아니고서야 구단에서도 불펜 투수에게 큰돈을 쓰지 않으니 선수들도 불펜 투수보다 선발 투수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병규 형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맞히는 데 주력하라는 게 아니에요. 크리스 반스의 공을 공략할 준비를 하자는 거예요. 지난 올림픽 때도 첫 타석에서 홈런 치고 나니까 크리스 반스가 엄청 신경 써서 던지더라고요. 만약에 형들이 크리스 반스의 공에 대응하면 크리스 반스도 머릿속이 복잡해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투구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 피로도도 커질 테고.”
“그러다 보면 실투도 나오겠죠?”
“당연히 나오지. 크리스 반스도 사람이잖아.”
“유성이 얘기 듣다 보니까 갑자기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지난 올림픽 때는 우리가 이겼잖아. 최근 대회만 따지자면 우리가 챔피언이야. 미국이 도전자고.”
“에이, 그래도 대회가 다른데요?”
“야, 누가 병규 저 녀석 입 좀 꼬매 버려라. 진짜 왜 저렇게 말이 많냐?”
박유성과 송현민의 방에서 이루어진 선수단 긴급 미팅은 민병규 앤딩으로 끝이 났다.
“넌 나 좀 보자.”
김하선이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입을 나불거린 민병규를 끌고 나가자 다른 선수들도 하나둘 방을 나섰고.
15명의 덩치 큰 선수들이 가득 채웠던 방은 다시 박유성과 송현민만 남게 됐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그러게요. 아까 우르르 들어올 때는 무슨 영화 찍는 줄 알았어요.”
“왜? 너도 찬수 형처럼 영화배우가 꿈이냐?”
“저는 최소 마흔 살까지 야구 할 건데요?”
“와, 독한 놈. 20년이나 해 먹겠다고?”
“보통 다 그 정도 하지 않나요?”
박유성의 너스레에 송현민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보통 박유성처럼 재능 있는 선수들은 제 잘난 맛에 살아줘야 인간적인데 박유성은 무슨 야구를 위해 태어난 녀석 같았다.
“암튼 이제부터 심화 학습 하자.”
“무슨 심화 학습이요?”
“기초반 보냈잖아. 나한테는 제대로 된 팁을 알려줘야지.”
“방망이로 얼마나 우려먹는 거예요?”
“그 방망이로 홈런을 2개나 때렸으면서 말이 많다?”
“그렇게 따지만 전부 형이 협찬해 준 방망이에요.”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너 인마, 나한테 잘해야 해.”
“그래서 열심히 밥상 차리고 있잖아요.”
“중간에 병규 녀석 꼈잖아.”
“그럼 형이 2번으로 오든가요.”
“그럴까? 내가 병규만큼 빠르진 않지만 그래도 병규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그러다가 계속 2번 치게 되면 어쩌려고요?”
박유성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민병규보다 송현민이 뒤를 받쳐준다면 더 든든하겠지만 국가 대표 4번 타자 노릇을 하던 타자를 테이블 세터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암튼 빨리 꺼내봐.”
“없어요. 그런 거.”
“없긴. 있잖아.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빨리 말해봐.”
“진짜 없어요. 그런 게 있었으면 아까 말했죠.”
송현민은 호세 로페즈를 상대했을 때처럼 확실한 팁을 원했지만 박유성이라고 두 번째 만나는 상대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호세 로페즈야 워낙에 익숙해서 여유를 가지고 상대하다 보니 버릇 같은 게 부각됐지만 크리스 반스는 달랐다.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투수에게 티 나는 투구 버릇 같은 게 있다면 진즉에 물어뜯겼을 것이다.
하지만 송현민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뭐라도 좋으니까 하나만 줘봐.”
“형은 크리스 반스 상대할 만하잖아요?”
“상대할 만하긴 인마. 아까 정후 형 하는 얘기 못 들었어?”
“마크 스테리요?”
“그래. 마크 스테리 같은 타자도 크리스 반스 상대로 맞춤 타격하는데 내가 감당이 되겠냐?”
“저는 그럭저럭 칠 만하던데요?”
“너는 예외지 인마. 솔직히 말해서 까다로운 투수가 있긴 하냐?”
“많죠. 그런데 치다 보니까 익숙해지더라고요.”
“무슨 애늙은이 같은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암튼 형은 내일 빠른 공을 노려봐요.”
“빠른 공?”
“크리스 반스도 100퍼센트 컨디션이 아니잖아요. 크리스 반스가 부담스러운 형들은 맞히는 데 주력하더라도 형은 제대로 쳐야 해요. 그래야 크리스 반스도 긴장하죠.”
“대신에 키킹은 가볍게 가고?”
“크리스 반스의 공이 눈에 보이는 순간에 먼저 키킹을 해봐요. 그럼 대응하기 조금 더 편할 거예요.”
박유성이 송현민에게 맞춤 팁을 주자 송현민이 그제야 씩 웃었다.
“오케이. 네 말대로 한번 해볼게.”
“그렇다고 무작정 휘두르면 안 되는 거 알죠?”
“알지. 내가 병규냐?”
타격 템포를 빨리 가져가면 빠른 공에 대응하기 편하지만 반대로 변화구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박유성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데뷔 첫해에 3할을 친 송현민이라면 그 정도 허들쯤은 알아서 넘을 것 같았다.
“암튼 우리 내일 꼭 이기자.”
“이겨야죠. 여기까지 왔는데.”
박유성과 송현민이 기분 좋게 주먹을 부딪쳤다.
그렇게 대한민국 대표팀도 만전의 준비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