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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237화 (237/412)

타자 인생 3회차! 237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9)

1회 말 미국 대표팀은 대한민국 대표팀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안타를 때려냈다.

선두 타자 대니 존슨이 우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를 치고 출루했고.

3번 타자 마크 스테리가 펜스를 직격하는 장타를 때려냈다.

단순히 기록만 놓고 보자면 1 대 1 동점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1회 공방이 끝난 이후에도 전광판의 스코어는 변하지 않았다.

두 개의 안타성 타구 모두 박유성이 처리했기 때문이다.

따악!

임찬기가 바깥쪽으로 던진 빠른 공을 대니 존슨이 타이밍에 맞춰 걷어냈을 때 박유성은 오늘 경기가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한국의 크리스 반스라 불릴 만큼 공격적인 피칭을 선호하는 임찬기의 빠른 공이 저렇게 쉽게 방망이에 걸려버리면 원하는 대로 경기를 풀어나가기 힘들었다.

그나마 박경호가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버티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외야 쪽으로 타구가 많이 뻗어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박유성은 타자들의 유형에 따른 맞춤 수비에 들어갔다.

‘대니 존슨은 몸 쪽 바깥 쪽 가리지 않고 잡아당기니까.’

임찬기의 구위가 좋지 않다는 걸 파악한 박경호가 무리해서 몸쪽 승부를 걸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방망이에 공이 걸렸을 때 우중간 쪽으로 날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박유성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기정후도 라인 쪽으로 붙어 움직였고.

감백호도 정위치에서 센터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벤치의 지시가 없었지만 기정후와 감백호는 박유성에게 맞춰 움직이기로 사전에 조율을 한 상태였다.

아직 프로에 데뷔조차 하지 않은 루키의 판단을 믿고 따라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외야 수비의 핵인 박유성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약속했다.

“만약에 시프트가 실패하면 욕은 우리가 대신 먹자.”

“유성이는 앞으로 10년 이상 대표팀을 이끌어야 하는데 선배들이 대신 막아 줘야죠.”

덕분에 박유성도 자신의 판단대로 수비 위치를 가져갈 수 있었다.

-2구는 볼. 볼 카운트가 원 볼 원 스트라이크로 바뀝니다.

-초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로 빠른 공이 들어갔는데요. 구심이 잡아주질 않았습니다.

-앞서 크리스 반스 선수는 저 코스를 잡아줬던 것 같은데요.

-심판 판정도 경기의 일부분이니까요.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트라이크 콜을 기다리며 한참 동안 공을 쥐고 있었던 박경호는 3구째 비슷한 코스의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앞서 조이 패런트가 박유성을 상대로 프레이밍을 선보였던 것처럼.

임찬기가 비슷하게만 던져 준다면 스트라이크 존으로 밀어 넣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이 미트에 도착하기 전에 대니 존슨의 방망이가 먼저 움직였다.

따악!

팔을 쭉 뻗어 타구를 건져 올린 대니 존슨은 방망이를 내던지고 1루로 내달렸다.

방망이 끝에 걸려서 제대로 힘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코스가 좋으니 잘하면 2루까지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스프린터처럼 치고 나갔던 대니 존슨은 1루 베이스에서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박유성이 어느새 달려와 원바운드로 타구를 처리해버렸기 때문이다.

-대니 존슨 선수의 빠른 발이라면 2루도 노려볼 만한 코스였습니다만 박유성 선수가 잘 처리했습니다.

-정타가 되지 못한 게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한 느낌인데요.

-만약에 타구가 제대로 맞아서 뻗어 나갔다면 아마도 박유성 선수의 글러브에 걸렸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에 이어 미국 대표팀에서도 발 빠른 선두 타자가 출루에 성공했습니다만 득점으로 이어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니 존슨이 출루하자 에릭 지터 감독은 마이크 영 벤치 코치를 바라봤다.

“작전을 거는 건 어때?”

“번트 말입니까?”

“왜? 아닌 거 같아?”

“아직 경기 초반인데 케빈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2번 타자 케빈 모랄은 파이어리츠에서 톱타자로 뛰는 선수였다.

정확도와 주력은 대니 존슨보다 살짝 아쉽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대신 장타력은 한 수 위였다.

“케빈이 좌투수의 공을 잘 공략하니까요. 한 번 지켜보시죠.”

마이크 영 벤치 코치는 케빈 모랄이 최소 진루타는 때려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임찬기도 그렇게 만만한 투수가 아니었다.

케빈 모랄이 좌완 킬러라면 임찬기는 오른손 타자 킬러였다.

특히나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과감하게 찌르는 슬라이더는 알려줘도 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우…….”

박경호의 몸쪽 사인을 받은 임찬기는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대표팀은 임찬기가 흔들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일본전에서 예방 접종을 맞은 임찬기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박유성이 대니 존슨의 2루타를 막아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래. 편하게 맞춰 잡자. 욕심부려봐야 투구 수만 늘어.”

1루 주자를 눈으로 견제하며 뜸을 들이던 임찬기가 빠르게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고.

따악!

몸쪽으로 빠르게 꺾여 들어오는 공을 케빈 모랄이 기다렸다는 듯이 잡아당겼다.

방망이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울렸지만 타구는 하필 수비 요정 김하선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3루 강습! 아, 타구가 김하선 선수의 글러브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바로 2루로 던져야죠!

-김하선 선수가 다시 공을 잡아 2루로! 2루수 송현민 선수가 공을 받고 1루로! 5-4-3으로 이어지는 더블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지금 에릭 지터 감독이 나와서 항의를 하고 있는데요.

-고의낙구라고 판단하는 걸까요?

-김하선 선수야 메이저리그 시절에도 수비를 잘하기로 유명한 선수였으니까요. 에릭 지터 감독 입장에서는 김하선 선수가 일부러 공을 놓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하.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강습 타구를 매번 잡아낼 수 있는 내야수가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게다가 1루 주자가 대니 존슨 선수였지 않습니까.

-공을 놓친 상황에서 대니 존슨 선수가 2루로 들어간다면 결국 진루타를 내준 꼴이나 다름없게 되겠죠.

-아마 구심도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을 할 겁니다.

-오늘 구심이 캐나다 구심이라 살짝 불안하긴 한데…… 아, 판정의 번복은 없습니다. 에릭 지터 감독이 짜증을 내며 더그아웃으로 되돌아갑니다.

“젠장할!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자리로 돌아와서도 에릭 지터 감독은 한참 동안 열불을 냈다.

메이저리그 레전드 유격수의 눈으로 봤을 때 방금 전 타구는 김하선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김하선의 캐칭 동작이 늦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공이 날아오기가 무섭게 얼굴 쪽으로 글러브를 들어 올려놓고 뒤늦게 떨어뜨린다는 건 고의낙구로 봐야 했다.

하지만 구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1루 주자가 대니 존슨이었기 때문이다.

김하선이 포구 직전에 대니 존슨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공을 떨어뜨린 거라면 고의낙구를 받아들였겠지만 타구는 빨랐고 김하선은 타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찰라의 순간 김하선에게 대니 존슨의 움직임을 알려 준 내야수도 없었다.

공을 떨어뜨리고 난 다음에 유격수 박찬희가 2루를 향해 손짓했지만 그건 낙구 이후의 상황.

이걸 가지고 고의낙구를 주장하는 건 억지에 불과했다.

김하선도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구심의 판정을 유도했다.

그러나 박유성의 눈에는 철저한 연기처럼 보였다.

“역시 하선이 형. 메이저리그 짬은 무시 못 한다니까?”

뒤에서 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방금 전 타구는 김하선의 얼굴 높이로 빠르게 날아갔다.

평소 김하선이었다면 엉거주춤한 자세에서라도 잡아냈을 것이다.

대니 존슨이 타구의 방향을 보고 다시 1루 베이스 쪽으로 몸을 돌린 것도 김하선이 강습 타구에 강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하선은 영리하게 타구를 떨어뜨렸다.

만약에 정말로 타구가 글러브를 맞고 튕겨 나온 거라면 공을 찾느라 두리번거렸겠지만.

포구를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힘을 빼서 발 앞에 떨어뜨리고는 그걸 곧바로 잡아 2루로 송구했다.

그리고는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만약 김하선이 전성기였다면 구심도 고민이 들었겠지만 현재 김하선은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복귀한 상태.

기량이 예전만 못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까다로운 대니 존슨을 치웠으니까 찬기 형도 마음이 편하겠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보며 박유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국 대표팀의 3번 타자는 2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MVP에 빛나는 마크 스테리.

언제든 한 방을 때려낼 수 있는 강타자였다.

“후우…….”

마크 스테리가 나오자 임찬기도 길게 숨을 고르며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박경호의 요구대로 침착하게 공을 던졌다.

초구에 바깥쪽 빠지는 공으로 시선을 잡아 끌고.

2구는 초구보다 공 하나 정도 안쪽으로 집어 넣어 스트라이크 콜을 이끌어낸 뒤에 3구째 몸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을 던져 마크 스테리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4구는 과감하게 몸쪽 높은 코스.

따악!

이 공을 마크 스테리가 건드리면서 볼 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뀌었다.

“좋아, 좋아. 일단 투 스트라이크까지 잡았어.”

박유성이 글러브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마크 스테리는 상황에 맞게 타격을 하는 영리한 타자였다.

투 스트라이크 이전까지는 장타를 노리고 크게 스윙하지만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출루 쪽에 초점을 맞춘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런 마크 스테리의 타격 스타일을 두고 샌님이라고 비웃기도 하지만.

스윙이 큰 타자들만 득실거리는 양키즈 타선에서 마크 스테리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오히려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어떻게든 공을 맞혀내는 투 스트라이크 이후의 마크 스테리를 더 두려워할 정도.

“자, 찬기 형. 날 믿고 편하게 던져요.”

박유성이 다시 한번 주절거렸다.

그러자 임찬기가 과감하게 몸쪽으로 포심 패스트 볼을 찍어 던졌다.

따악!

마크 스테리는 그 공을 놓치지 않고 잡아당겼고.

“아이구야.”

타구는 박유성의 머리 뒤쪽으로 뻗어 나갔다.

-아, 이 타구가 중견수 키를 완전히 넘겼습니다.

-다행이 펜스를 맞고 떨어질 것 같은데요.

-마크 스테리가 1루를 돌아 2루로! 2루에서…… 다행이 멈춤 지시가 나왔습니다!

마크 스테리가 타구를 퍼 올리기가 무섭게 에릭 지터 감독은 홈런을 예상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타구가 그대로 담장 밖으로 넘어가준다면 이 지긋지긋한 분위기를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던지 타구는 생각만큼 뻗어가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에 힘을 잃고 펜스 앞에서 원바운드로 튀어 올랐다.

그래도 잘 하면 3루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마크 스테리는 2루 베이스에서 한 발도 떼지 못했다.

“젠장할. 또 언제 저기까지 가 있었던 거야?”

에릭 지터 감독을 짜증 나게 만든 건 이번에도 박유성이었다.

외야가 넓은 다저스 파크의 특성상 센터 뒤로 넘어가는 타구는 빠르게 처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박유성은 어느새 펜스 앞까지 달려가 있었다.

물론 마크 스테리의 주력 상 3루는 애당초 무리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앞서 박유성의 환상적인 주루 플레이를 본 관중들의 입에서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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