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48화
30. 주가 폭등(7)
송광철 대표의 말에 김찬혁 팀장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유성이라면 정확도의 일부를 포기하고 중장거리 타자로 전향해도 잘하겠지만.
다른 타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타격 능력을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무리해서 스타일을 바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연평균 0.250의 타율에 120개의 안타와 40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타자보다는 연평균 0.320의 타율에 160개의 안타와 40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타자의 가치가 더 높을 터.
홈런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은 타자 중에 타격 능력을 겸비한 선수는 거의 없는 만큼 최대한 많은 안타를 때려내면서 자연스럽게 장타 개수를 늘려나가다 보면 홈런왕 경쟁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박유성 선수는 시범 경기 안 나가는 건가요?”
“유성이는 나가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김석률 감독이 쉬라고 하나 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끝난 직후 대표팀 선수들은 소속팀에 복귀해 시범 경기에 참여했다.
프로 야구 협회에서 최소 일주일간의 휴식을 보장하라고 권고해서 곧바로 시범 경기를 뛰는 선수는 없었지만.
개막이 코앞인 지금까지 시범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건 박유성 한 명뿐이었다.
“송찬우 선수와 박준수 선수도 같이 쉬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박유성 선수만 쉬니까 언론에서 더 난리인 것 같습니다.”
“휴식도 휴식이지만 유성이는 검증이 됐잖아? 무리해서 시범 경기에 투입할 이유가 없지.”
애당초 김석률 감독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고생한 선수들에게 개막전까지 휴식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캠프에서 천천히 컨디션을 끌어 올린 선수들과 달리 국제 대회를 치르느라 무리했던 만큼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LA 올림픽에 이어 월드 베이스볼 MVP까지 거머쥔 박유성과 달리 박준수와 송찬우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박준수는 클린업을 치다 7번 타순까지 밀린 것에 대한 명예회복이 필요했고.
송찬우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도중 장염 증세로 로테이션을 거른 터라 경기 감각을 끌어올려야 했다.
결국 박준수와 송찬우가 뒤늦게 시범 경기에 합류하면서 박유성만 튀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도 한 경기라도 뛰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일이 시범 경기 마지막 날이잖아. 내일 뛰어 봐. 언론이 뭐라고 할 것 같아?”
“신인 주제에 이제야 나왔다고 욕하겠죠.”
“유성이 마무리 캠프 늦게 합류한 거 가지고 아직까지도 물고 늘어지는 인간들 많아. 그 인간들은 유성이가 자기들 등쌀에 밀려 시범 경기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걸? 나가도 욕먹고 안 나가도 욕먹는 거면 그냥 안 나가는 게 나아. 게다가 컨디션 조절은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저도 박유성 선수 실력은 걱정 안 합니다. 욕먹는 게 안타까워서 그렇죠.”
“괜찮아. 개막전 끝나고 나면 역시 박유성이라는 소리가 나올 테니까.”
비선수출신인 김찬혁 팀장은 여론이 신경 쓰였지만 선수출신인 송광철 대표는 언론과 야구팬들의 변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치 박유성이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개막전을 통해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주는 것.
시범 경기에서 백날 잘 해 봐야 시범 경기는 시범 경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프로 데뷔전인 개막전은 달랐다.
박유성이 개막전에서 제 실력을 보여준다면 박유성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기자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꾸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류의 시비는 끊이지 않을 거야. 그때마다 예민하게 굴면 유성이만 힘들어져. 우린 유성이 믿고 서포트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에이전트마다 성향이 다르지만 송광철 대표는 선수보다 앞에 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송광철 대표는 선수의 뒤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에이전트가 진짜 에이전트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선수에게 끌려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박유성처럼 알아서 잘하는 선수를 쥐고 흔들려는 건 주제넘은 짓이었다.
“참, 유성이 영어 수업은 다시 진행하고 있지?”
“네. 박유성 선수가 워낙에 열심이라서요.”
“실력은 많이 늘었어?”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영어로 간단한 인터뷰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현민이 녀석이 유성이 준비성 반만 닮았어도 좋았을 텐데.”
“송현민 선수도 영어 곧잘 하던데요?”
“잘하긴 무슨.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들하고 협상할 때 입도 못 뗐어.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보는데도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니까?”
“그런 거 보면 박유성 선수는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내가 말 했잖아. 그릇이 다르다고. 암튼 김 팀장도 일부 기자들이 꼬투리 잡는 거 너무 신경 쓰지 마. 보나 마나 미디어 데이 때 열심히 물어뜯겠지만…… 김 팀장도 알잖아? 유성이 보통 아닌 거. 미튜브에서 미디어데이 생중계한다니까 아마 볼 만할 거야.”
다음 날 열린 시범 경기 일정 마지막 날에도 박유성은 타석에 서지 않았다.
“어떻게 오늘도 안 나오냐.”
“그러게. 신인이 너무 쉬는 거 아냐?”
어쩌면 박유성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경기장을 찾아왔던 스타즈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경기라도 이겼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랜더스를 상대로 이렇다 할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완패를 당하고 나니까 박유성의 결장이 아쉽다 못해 괘씸하게 느껴졌다.
스타즈 출입 기자들도 경기 직후 김석률 감독에게 따지듯 물었다.
“박유성 선수는 오늘도 경기에 나오지 않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다녀온 선수들에게는 휴식을 부여했습니다. 박유성 선수는 감독인 제 지시대로 컨디션을 조정중입니다.”
“오늘 박유성 선수를 보기 위해 많은 팬들이 왔는데 한 타석 정도는 타석에 서는 게 예의 아닐까요?”
“경기장을 찾아주신 팬분들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다만 시범 경기는 시범 경기일 뿐이니까요. 박유성 선수를 무리해서 출전시킬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송찬우 선수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후 벌써 두 번이나 선발로 나왔고 박준수 선수도 오늘 교체로 출전했는데 유독 박유성 선수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뭔가요? 혹시 박유성 선수와 싸우셨습니까? 항간에는 박유성 선수가 감독님 선물을 사 가지고 오지 않아서 출전시키지 않는다는 루머도 있는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누가 퍼트리는지 모르겠지만 유성이가 선물 사 왔습니다. 그리고 설사 유성이가 선물을 사 오지 않았다고 해서 선발 명단에서 뺄 만큼 옹졸한 감독은 아닙니다.”
“아까 박유성 선수가 컨디션 조절중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올 해가 첫 시즌이니까요. 팬 여러분들도 박유성 선수에게 시즌을 준비할 시간을 조금 더 줬다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박유성도 자신에 대한 여론을 모르지 않았다.
의미 없는 시범 경기에 뛰는 것보다 조금 더 착실하게 몸을 만들어서 시즌을 준비하는 게 낫다는 김석률 감독의 제안대로 구단에서 붙여 준 트레이너와 함께 매일같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데 멋대로 소설을 써대니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랜더스와의 2연전 때는 출전하려고 했지만.
김석률 감독은 그럴 필요 없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시즌 첫 경기가 랜더스 원정인 거 알지? 랜더스에서 너에 대한 분석을 엄청나게 했나 보더라. 너 출전 안 하냐고 연락 와서 내가 벤치에도 없다고 한마디 했거든? 그러니까 개막전 때 제대로 보여줘라.
참고로 내 목표가 창단 첫 랜더스 원정 스윕이다.
“그럼 시범경기까지 해서 5연승 달리면 되잖아요?”
-유성아. 원래 약팀은 시범 경기 때 자기 팀 선수들 전력 체크하지만 강팀은 달라. 시즌 전에 상대 팀 전력을 판가름하고 전략을 세운단다. 랜더스가 너에 대한 데이터를 쌓게 도와줄 필요 없어.
“개막전 때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만들고 싶으신 거죠?”
-그래. 올 시즌 우리가 성적을 내려면 랜더스를 초장에 잡아야 한다.
“그래도 너무 멋대로 떠들어대니까 좀 짜증나는데요.”
-그럼 미디어 데이 때 풀어라. 그날은 무슨 소릴 해도 안 말리마.
시범 경기가 끝나고 사흘 후.
개막전을 이틀 앞둔 상황에서 프로 야구 12개 구단 미디어 데이 행사가 열렸다.
보통 미디어 데이에는 감독과 투타 핵심 선수 한 명씩 참가하는데 박유성이 불참할 것을 대비해 올해는 참가 선수 수를 3명으로 늘렸다.
덕분에 박유성도 눈치 보지 않고 미디어 데이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다음 질문입니다. 올 시즌 가장 경계하는 선수를 한 명씩 뽑아주세요, 라고 김일호 님께서 질문해 주셨는데요. 랜더스 박전권 감독님부터 말씀해 주시죠.”
“또 제가 1번인가요?”
“우승하셨잖아요.”
“그럼 저는 옆에 있는 민병규 선수로 하겠습니다. 올 시즌부터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만큼 어떤 활약을 펼칠지 기대가 됩니다.”
“저기 감독님? 경계하는 선수를 여쭤봤습니다.”
“아, 다른 팀 선수를 말 해야 하는 거죠? 그럼 시간 좀 주시겠어요?”
박전권 감독의 너스레에 기자석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드림 리그도 아니고 나눔 리그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라면 누가 뭐래도 박유성일 텐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박유성이 두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반면 타이거즈 최현우 감독과 트윈스 윤지현 감독은 한 목소리로 박유성을 언급했다.
“박유성 선수. 벌써 두 표인데 기분이 어때요?”
“일단 저를 뽑아주신 두 감독님께서 살살해 달라고 부탁하셨으니까 타이거즈와 트윈스를 상대로는 조금 힘을 빼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랜더스는요?”
“최선을 다 해야죠.”
“박유성 선수 입담은 여전하네요.”
자이언츠 이대오 감독과 라이온즈 백영수 감독까지 박유성을 언급하자 다시 마이크를 잡은 박전권 감독도 웃으며 말했다.
“다들 박유성 선수를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요. 저도 대세를 따라가겠습니다.”
“박유성 선수. 박전권 감독님도 박유성 선수를 선택하셨는데요?”
“저를 뽑아주셨으니까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이거 개막전이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시즌 예상 순위를 말해달라는 질문이 나오자 박전권 감독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솔직히 여기 세 분 감독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작년과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시즌 나눔 리그 1위는 랜더스.
2위는 타이거즈였고 3위는 트윈스였다.
이유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작년처럼 우승하고 싶다는 대답을 늘어놓았지만 박유성은 박전권 감독이 일부러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박유성은 딱히 선을 넘지 않았다.
사회자가 계속해서 싸움을 붙이려고 노력했지만 수많은 야구 팬들이 지켜보는 미디어 데이 행사에서 대선배에게 대거리를 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다음으로 박유성 선수, 이번 시즌 목표가 있다면요?”
“스타즈의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개인 타이틀에 대한 욕심은 없나요?”
“팀을 우승시키고 나면 개인 성적은 따라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화끈한 설전을 기대했던 야구 팬들에게는 박유성이 뻔한 멘트를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지난해 우승팀 랜더스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했던 스타즈의 팬들은 우승에 도전하겠다는 박유성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박성천 – 유성아! 너만 믿는다!
황일용 – 유성아! 해 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올라오는 스타즈 팬들의 염원을 읽은 박유성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이틀 후.
박유성의 세 번째 2029시즌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