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56화
31. 3번째 데뷔전(8)
박영욱은 공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임기성이 미트를 들어 올리기가 무섭게 곧장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후앗!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으로 날아간 공은 정확하게 미트 속에 파묻혔고.
“스트라이크!”
구심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박영욱 선수의 초구가 바깥쪽으로 꽂힙니다. 원 스트라이크.
-초구에 어떤 공을 던질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빠른 공이었네요.
-박영욱 선수 하면 또 묵직한 속구 아니겠습니까? 저 속구가 통해야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던질 수 있으니까요.
-전광판 구속은 152㎞/h가 찍혔는데요. 실제 타자들이 느끼는 체감 구속은 그보다 훨씬 빠르다면서요?
-박영욱 선수가 디셉션이 좋거든요. 공을 끝까지 숨기고 끌고 나오기 때문에 타자들이 느끼는 체감 비행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디셉션도 디셉션이지만 박영욱 선수는 공을 챌 줄 아는 선수입니다. 포심 패스트 볼의 회전수가 리그 톱 클래스 수준이니까요. 아마 박유성 선수도 적잖게 놀랐을 겁니다.
임상훈 해설위원이 박영욱의 구위를 칭찬했지만 정작 박유성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앞서 상대한 로메오 클레멘스와 달리 박영욱에 대한 데이터는 충분히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포심 던질 때 입 벌리는 버릇은 여전하네. 아닌가? 그 버릇을 고치기 전인가?’
당사자는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박영욱은 포심 패스트 볼을 던지기 직전에 살짝 턱을 내렸다가 앙다무는 습관이 있었다.
포심 패스트 볼을 강하게 채야겠다는 마음가짐이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체인지업은 좀 멍한 표정이었지? 그 중간쯤이 슬라이더였고.’
포심 패스트 볼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 중에서 커브는 거의 던지지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표정으로 구종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고 싶었는데 참……. 40년 프로 짬은 어디 안 간다니까?’
타석으로 돌아온 박유성은 느긋하게 루틴을 펼친 뒤에 방망이를 어깨에 걸쳐 들었다.
그러고는 2구째 몸 쪽 슬라이더가 들어오자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박유성의 방망이가 움직였을 때.
‘걸렸어!’
박영욱은 내심 쾌재를 내질렀다.
커터에 가깝게 움직이는 슬라이더에 저런 식으로 대응해서 맞힌 선수를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타격 센스가 남다른 박유성이라 해도 처음 보는 기괴한 궤적의 슬라이더를 제대로 받아치지는 못할 터.
백번 양보해 맞힌다 해도 우익수 플라이가 될 거라 여겼는데.
따악!
타격음이 경기장을 쩌렁하게 울렸다.
-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것도 넘어간 것 같은데요?
-우익수 브라이언 코빈 선수가 이번에도 타구를 포기합니다! 홈런! 박유성 선수가 1회에 이어 7회에도 선두 타자 홈런을 때려냅니다!
맞는 순간 홈런인 걸 직감한 듯 느긋하게 베이스를 도는 박유성을 보며 박영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랜더스 박전권 감독도 헛웃음을 흘렸다.
잘한다는 얘기야 귀가 아프게 들었지만 좌타자들을 상대로 1할대 피안타율을 자랑하는 박영욱까지 두들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실투였나?”
박전권 감독이 고개를 돌려 이승오 투수 코치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승오 투수 코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그럼 이것도 유성이가 잘 친 거네?”
“그냥 치면 각이 안 나올 텐데 미리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프로 선수가 경기 전에 상대 분석을 하고 나오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이승오 투수 코치는 그 당연한 이야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거의 완벽한 타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타자 출신인 이진형 수석 코치가 한마디 보탰다.
“감독님도 보셨겠지만 거의 받쳐놓고 때렸습니다. 저 코스로 공이 들어온다는 걸 알려줘도 저렇게는 못 칠 겁니다.”
방금 전 박유성의 타격은 이론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몸 쪽을 파고드는 공을 끝까지 지켜봤고.
자만의 히팅 포인트에서 정확하게 방망이 중심에 맞혔으며.
끝까지 방망이를 휘둘러 타구에 힘을 실었다.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박유성의 타격 밸런스는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투수가 던지는, 일반적인 슬라이더와는 다른 궤적을 그리는 공을 그저 맞혀낸 게 아니라 기다렸다는 듯이 때려낸 것이다.
이런 타격이 가능하려면 셋 중 하나였다.
요즘 애들이 말하는 2회차 인생을 살고 있거나.
특별한 재능 같은 게 있어서 공을 보기만 하면 어디로 어떻게 날아올지 본능적으로 안다거나.
아니면 박영욱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하고 코칭스태프와 동료 선수들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받았거나.
인생 다회차는 만화나 소설에서나 나오는 거니까 첫 번째는 차치하더라도 솔직히 느낌은 두 번째 같았다.
다만 이 분위기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간 박전권 감독의 성격에 웃고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스타즈에서 잘 준비시킨 거 같습니다. 영욱이가 좌타자 상대로 몸 쪽 슬라이더를 자주 던지지 않습니까?”
“흠…….”
“박준수와 다니엘 브리토도 영욱이 공을 잘 칩니다. 아마 두 사람이 조언을 해줬겠죠.”
“고작 그 정도로 저렇게 치는 게 가능해?”
“그래서 슈퍼 루키 아니겠습니까? 언론에서 괜히 100년 타령하는 게 아닌 거죠.”
박전권 감독은 평소에도 박유성이 박유성 한 거라는 말을 싫어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나오는 건데 원인을 찾기 귀찮으니까 그냥 대충 넘기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방금 전 홈런은 박유성이 절대적으로 잘 때려낸 거라고밖에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기성이한테 다음번 승부는 최대한 어렵게 가라고 해.”
“알겠습니다.”
때마침 박영욱이 2번 타자 블레이크 테일러를 중견수 뜬 공으로 잡아내자 박전권 감독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7회에 한 점을 더 내준 건 뼈아팠지만 아직은 3 대 0.
불펜이 약한 스타즈라면 한 타이밍에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석률 감독은 자신의 프로 데뷔전이자 개막전인 오늘 경기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지금 불펜에 누가 몸을 풀고 있지?”
“우혁이하고 승주가 준비 중입니다.”
“그럼 우혁이로 가자고.”
“클린업인데 승주가 낫지 않을까요?”
“우혁이도 준비 많이 했잖아. 본인도 많이 굶주렸을 테니까 기회를 줘보자고.”
“알겠습니다.”
김석률 감독을 대신해 최민태 수석 코치가 불펜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공수 교대가 되자 1루 쪽 벤치 옆쪽에 마련된 불펜에서 고우혁이 뛰어나왔다.
-스타즈의 두 번째 투수는 고우혁 선수입니다.
-고우혁 선수 오랜만이네요. 군대에서 제대하고 1군 경기는 처음이죠?
-기록상으로는 2026년에 랜더스전 선발로 나왔다가 패전 투수가 된 게 마지막 등판입니다.
-저도 고우혁 선수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는데요. 2025년 드래프트에서 우선 지명을 받은 선수입니다.
-지금 불펜에서 주축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신영기 선수와 함께 스타즈 팬들에게 큰 기대를 받았던 선수인데요. 1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상무에 입단했다가 올 시즌 다시 1군 무대에 올라오게 됐습니다.
중계진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채팅창으로 전임 감독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고우혁과 신영기라는 2025년 최고의 투수 자원을 썩힌 게 다름 아닌 박흥선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계진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비난 채팅을 넘겼다.
박흥선 감독이 재야에 머물러 있다면 우스갯소리처럼 한마디 하겠지만.
올 시즌부터 파이터즈의 지휘봉을 잡게 된 현직 감독을 상대로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운드에 선 고우혁도 지난 일은 다 잊었다.
선발을 고집하다 박흥선 감독의 눈 밖에 나서 쫓기듯 상무에 입단했지만 어쨌거나 병역 문제를 해결했고.
상무에서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마당쇠처럼 뛴 덕분에 지난 캠프 때도 불펜 자원으로 합격점을 받게 됐으니 박흥선 감독 때문에 야구 인생이 망가졌다고 원망하기도 애매했다.
연습구를 모두 던진 고우혁은 습관처럼 허리춤을 한 번 털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3루 쪽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오늘 완벽한 데뷔전을 치른 저스틴 스몰을 비롯해 내일 등판 예정인 제이슨 마이너와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송찬우, 그리고 늘 자신보다 앞서갔던 동기 김혜성까지.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손지원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서 스프링 캠프 때 선발 욕심을 내봤지만 자신보다 잘 던지는 4살 어린 후배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우혁은 선발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동기인 신영기는 박흥선 감독의 주문대로 불펜 투수로 변신해 벌써 풀타임으로 3시즌을 소화했는데 자신만 허송세월할 수는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은 자신 있으니까 팀의 마당쇠가 되자.’
마음을 다잡은 고우혁은 마지막으로 외야 쪽을 바라봤다.
우익수 자리에 들어간 이동엽은 아직 미덥지 못했지만.
넓은 센터를 홀로 책임지는 박유성과 지난해까지 박유성의 역할을 해 왔던 다니엘 브리토는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졌다.
‘외야수들을 믿고 편하게 던지면 돼.’
스스로 주문을 마친 고우혁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빠른 공과 슬라이더로 랜더스 타자들을 밀어붙였다.
2번 타자 박민재는 2-2에서 몸 쪽 포심 패스트 볼을 붙여 우익수 플라이로 유도했고.
3번 타자 민병규는 3구 연속 바깥쪽으로 공을 던져 중견수 플라이를 이끌어냈다.
투 아웃을 잡고 신이 난 나머지 몸 쪽 승부를 걸었다가 4번 타자 브라이언 코빈에게 펜스를 직격하는 타구를 얻어맞았지만 박유성의 환상적인 펜스 플레이 덕분에 단타로 막아냈다.
“후우…….”
하마터면 등 뒤에 주자를 두고 5번 타자 페트릭 도저를 상대할 뻔했던 고우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6구 승부 끝에 페트릭 도저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마쳤다.
“잘했어. 우혁아.”
“오늘 공 뭐냐? 메이저리그 가도 되겠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메이저리그는 오버예요.”
“그런가? 그럼 일본 가자.”
동료들의 환대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고우혁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때 박유성이 다가와 공을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야?”
“감독님한테 여쭤보니까 8회에 투수 바꾸신다고 해서요. 첫 홀드 기념구요.”
“홀드?”
“이대로 경기 끝나면 형 홀드예요.”
박유성이 손에 꼭 쥐여준 공을 내려다보던 고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해 스타즈가 포스트 막판까지 포스트 시즌 진출을 다투는 모습을 보며 과연 팀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까 불안해했었는데 개막전에 등판해 생애 첫 홀드를 따낼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니까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그러자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던 신영기가 냉큼 다가와 말했다.
“어금니 꽉 깨물어. 울지 마.”
“안 울어 인마.”
“너 지금 되게 없어 보여. 남들이 보면 퍼펙트 게임 한 줄.”
“안 운다니까?”
“그래 인마. 나중에 경기 끝나고 숙소 가서 혼자 울어. 지금 한창 분위기 좋은데 깨지 말고.”
“알았으니까 저리 꺼져.”
“암튼 첫 홀드 축하한다.”
“아직 경기 안 끝났거든?”
“야구 원데이 투데이냐? 끝났어. 랜더스에서 뽑아봐야 한두 점일 테고 유성이 타석 한 번 더 남았으니까 절대 안 뒤집혀. 네 홀드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줄 테니까 형만 믿고 푹 쉬어라. 알았지?”
자신과 달리 먼 길을 돌아온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신영기가 제법 감동스러운 말을 주절거렸다.
하지만 고우혁은 신영기의 말이 눈곱만큼도 마음에 와닿지가 않았다.
“홀드 기록은 한 번 따면 승패와 상관없는데 뭔 소리야?”
“아 참. 그랬지.”
“그리고 네가 무슨 수로 등판해?”
“타자들이 점수 내주면 승주 형 대신 내가 나갈걸?”
“너 지금 몸도 안 풀고 있는데?”
“난 금방 풀어. 걱정 마.”
“헛소리 집어치우고 가서 음료수나 가져와라. 목마르다.”
“쳇. 재미없는 놈.”
8회 초 스타즈의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이 났다.
박전권 감독은 계속해서 박영욱 카드를 밀어붙였고.
박영욱은 박유성에게 얻어맞은 홈런을 만회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다.
그리고 이어진 8회 말.
따악!
셋업 조승주가 선두 타자 유강민에게 홈런을 허용하자 랜더스 파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