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21화
38. 한국 시리즈는 처음이라(3)
황인석은 국내 좌타자들에게 언터처블로 통했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공을 끝까지 숨기고 나오는 투구폼에 쓰리 쿼터와 언더핸드 사이를 오가는 릴리즈 포인트까지.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데 특화된 투수였다.
박유성도 1회차 시절에는 황인석에게 약했다.
가뜩이나 낯선 스타일인데 리그가 달라서 인터 리그 때만 만나다 보니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2회차를 거쳐 3회차로 넘어온 지금은 달랐다.
-황인석 선수는 올 시즌 3승 5패 7홀드에 평균 자책점 2.65를 기록했습니다.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무려 0.150. 이 정도면 좌타자 킬러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요.
-저 0.150의 피안타율도 작년에 비해 높아진 겁니다. 작년에는 1할 초반대였으니까요.
-황인석 선수의 피안타율을 높인 당사자가 바로 타석에 들어와 있는데요. 박유성 선수는 올 시즌 황인석 선수를 상대로 5타수 5안타를 기록 중입니다.
지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황인석은 2차 명단까지 좌타 스페셜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투수 파트보다 야수 파트를 조금 더 보강하면서 최종 명단에서 빠졌지만 좌타자를 상대로 보여준 피칭은 국가대표팀에 뽑혀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마운드에 선 황인석은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좌타석에 들어섰다고 해서 다 똑같은 좌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우…….”
지난해 설문 조사에 따르면 프로 야구에서 뛰고 있는 좌타자들 중에 좌투수들이 가장 까다로워하는 국내 좌타자는 박준수였다.
재작년까진 송현민이 1위였지만 송현민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2위였던 박준수가 1위로 올라왔고 그 뒤로 민병규가 이름을 올렸다.
외국인 타자들 중에서는 다니엘 브리토가 첫손에 꼽혔다.
톱타자를 겸했을 만큼 선구안이 좋은 데다가 다른 외국인 타자들과 달리 무리해서 공을 퍼 올리지 않다 보니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가장 까다로운 좌타자 둘이 한 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황인석은 스타즈를 상대로 언제든 마운드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박준수 상대 통산 피안타율은 장타 없이 0.214.
다니엘 브리토 상대로는 홈런을 하나 얻어맞긴 했지만 0.181에 그쳤다.
좌투수에게 3할 이상을 때려내는 박준수와 다니엘 브리토를 상대로 이만큼 버틴 투수는 리그를 통틀어 손에 꼽혔다.
그러나 올 시즌 황인석은 스타즈전에 거의 등판하지 못했다.
톱타자 박유성을 시작으로 클린업을 치는 박준수와 다니엘 브리토에 신인 듀오 이동엽&장태수, 그리고 우투좌타인 9번 타자 최일준까지.
프로 야구 12개 구단 가운데 가장 많은 좌타자를 보유했지만 좌타자 킬러인 황인석은 벤치를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박유성.
0.749라는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 박유성을 견제하기 위해 계속 대기하다 보니 마운드에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박유성을 상대로 잘 던졌다면 또 모르겠지만.
시즌 첫 맞대결에서 풀카운트 접전 끝에 2루타를 얻어맞은 이후로 7번의 맞대결에서 5피안타 2볼넷을 내주고 나니까 스타즈전에서는 아예 전력 외 취급을 받았다.
다른 좌타자들을 저격 등판하기도 애매했다.
올 시즌 나란히 커리어 하이를 경신한 박준수와 다니엘 브리토를 상대하기에는 부담이 크고.
이동엽과 장태수는 신인이라 약점이 많아서 굳이 황인석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9번 타자 최일준에 맞춰 등판해 박유성까지 상대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었지만 최일준 앞에 주자가 나가면 작전이 걸릴 확률이 높았다.
‘유성이를 잡아야 해.’
시즌이 끝나고 황인석은 내년에 박유성에게 아웃카운트를 뺏어내리라 다짐했다.
올 시즌 7할을 친 박유성이 내년 시즌 평범한 타자로 전락할 가능성은 낮았다.
최소 5할 이상은 칠 테니 반타작만 해도 올해처럼 외면당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지나치게 잘 던져서일까.
윤지현 감독이 복수의 기회를 너무 빨리 줬다.
“적어도 유성이 상대로는 안 내보낼 줄 알았는데…….”
연습 투구를 마친 황인석의 시선이 박유성에게 향했다.
야구팬들은 박유성을 가리켜 슈퍼 루키라 부르지만.
황인석은 박유성이 조금도 신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좌타자들마다 혀를 내두르는 변칙 투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이밍을 맞춰내면서 유인구는 전부 골라내니 10년 이상을 뛴 베테랑을 상대한 기분마저 들었다.
‘차라리 현민이를 상대하는 게 낫지.’
같은 팀이라 경기 중에 상대한 적은 없지만.
황인석이 가장 까다롭다 여겼던 좌타자는 바로 송현민이었다.
워낙에 선구안이 좋고 스윙 스피드가 빨라 속였다 싶은 공을 전부 커트해 냈다.
하지만 그런 송현민도 박유성에 비해서는 해볼 만한 수준이었다.
‘초구에 무슨 공을 던져야 하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투구판을 밟은 황인석이 홈플레이트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포수 이용기가 조심스럽게 몸 쪽 사인을 냈다.
‘미쳤네. 누굴 죽이려고?’
황인석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 타석에서 바깥쪽 승부를 펼쳤으니 몸 쪽 공으로 허를 찌르자는 이야기 같은데 그건 3할쯤 치는 타자들에게나 통하는 볼 배합이었다.
박유성의 시즌 타율은 0.749.
4타석 중에 3타석은 안타를 때려내는 괴물이었다.
앞선 타석까지 챔피언십 시리즈 타율은 그보다 더 높은 0.778.
포스트 시즌 경험이 없으니 시즌처럼 잘하진 못할 거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듯 뜨거운 타격 쇼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심지어 1차전과 2차전 모두 박유성의 결정적인 한 방이 승부를 갈랐다.
이런 상황에서 몸 쪽 공?
이건 자신을 엿 먹이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황인석 선수가 투구판에서 발을 뺍니다.
-앞서 초구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황인석 선수도 부담이 큰 모양입니다.
-경기 초반인 만큼 박유성 선수를 거르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기에는 트윈스가 너무 궁지에 몰렸습니다. 시리즈 스코어 0 대 2에 1회에만 3점을 내줬거든요? 여기서 주자를 쌓다가 클린업으로 연결되면 대량 실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윤지현 감독도 자신감 있게 승부하라는 사인을 냈다.
물론 그 속에는 티 나지 않게 박유성을 걸러도 좋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지만.
스타즈 원정 2연패의 주범으로 도마 위에 오른 이용기는 박유성을 어떻게든 잡아내고 싶었다.
‘몸 쪽을 던져야 해요. 바깥쪽으로 도망치면 답이 없다고요.’
이용기가 계속해서 몸 쪽 공을 고집하자 황인석도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 사인처럼 몸 쪽으로 빠른 공을 찔러 넣는 건 자살행위였지만.
장기인 체인지업을 몸 쪽 낮게 떨어뜨리는 건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 같았다.
‘속아주느냐가 문제긴 하겠지만…….’
길게 숨을 고른 황인석이 빠르게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후앗!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박유성의 무릎 높이로 날아가다 마지막 순간에 기가 막히게 가라앉았지만.
퍼억!
박유성은 마치 유인구가 들어올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공을 흘려냈다.
-초구는 볼. 박유성 선수가 제 자리에서 지켜봅니다.
-황인석 선수가 좋은 공을 던졌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저런 유인구를 던지는데요.
-아무래도 스타즈 타자들 중에서 가장 타격감이 좋은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빠른 공을 던지기는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황인석 선수의 속구가 빠른 편도 아니니까요.
황인석의 포심 패스트 볼 최고 구속은 148㎞/h.
좌완 파이어볼러라 불리기에는 거리가 조금 있지만 투구폼 자체가 독특해서 좌타자들이 느끼는 체감 구속은 155㎞/h 이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60㎞/h에 육박하는 좌타자들의 공을 뻥뻥 때려낸 박유성에게는 그저 평범한 수준의 빠르기였다.
-원 볼에서 황인석 선수가 2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바깥쪽! 146㎞/h의 빠른 공이 낮게 날아와 꽂혔습니다!
-이번 공도 상당히 예리하게 들어갔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미치겠네.”
박유성이 연거푸 공을 골라내자 황인석이 짜증을 내뱉었다.
초구는 그렇다 쳐도 2구는 건드려 줄 만한데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공을 흘려보냈다.
“어떻게 저걸 참냐?”
더그아웃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장태수도 혀를 내둘렀다.
방금 공은 짜게 줘도 공 반 개 정도 빠진 공이었다.
포수가 이용기였으니 망정이지 프레이밍이 좋은 박경호였다면 스트라이크로 둔갑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장태수의 입장에서는 꽉 찬 바깥쪽 공이었지만.
박유성은 볼이라고 확신했던지 허리조차 돌리지 않았다.
“너도 가능해?”
장태수가 옆에 앉은 이동엽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동엽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가능하면 못해도 3할은 쳤겠지.”
올 시즌 이동엽의 성적은 신인왕급이었다.
0.287의 타율에 26홈런, 87타점.
박준수와 민병규의 신인 시즌보다 훨씬 더 좋았다.
장영호가 조만간 5번 타자 자리를 뺏기겠다며 앓는 소리를 늘어놓을 정도로 잘해주고 있지만 그런 이동엽도 방금 전에 들어온 공은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제 뭘 던질까? 또 빠른 공?”
“아마 유인구겠지.”
“그러다 빠지면 3볼인데?”
“유성이도 노리고 있을 텐데 정직하게 승부하겠어?”
이동엽의 예상대로 황인석의 3구는 다시 한번 바깥쪽으로 빠졌다.
구종은 슬라이더.
한복판을 가로질러 아웃 코스로 빠지는 공인 만큼 방망이가 딸려 나오기 십상이었지만 이번에도 박유성은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저것도 골라내네.”
잠시 숨을 멈추고 승부를 지켜보던 이동엽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장태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저건 너무 빠졌잖아.”
“정말 그렇게 보여?”
“저건 나도 골라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장태수가 대수롭지 않게 주절거렸지만 이동엽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투 볼에서 방금 공이 들어왔다면 이동엽도 무리해서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더라도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공을 괜히 건드렸다가 아웃이 되느니 다음 공을 기다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박유성처럼 공 3개를 연속해서 골라낼 자신은 없었다.
초구는 어찌어찌 참아내더라도 2구는 무조건 건드렸을 터.
그 타구가 파울이 됐다고 가정하면 볼카운트가 원 볼 원 스트라이크로 바뀌니까 3구째 다른 공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에 2구까지 참아냈다면 어땠을까.
‘황인석 선배님이라면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던졌겠지. 아니면 좀 더 타이트하게 붙이거나.’
장태수는 황인석이 너무 뺐다고 말했지만.
이동엽은 그렇게 던질 수밖에 없는 황인석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7할 타자를 상대로 투 볼에서 스트라이크 존에 걸쳐 들어가는 공은 던지기 어려웠을 터.
‘나도 유성이처럼 저렇게 공을 봐야 하는데…….’
이동엽의 시선이 천천히 루틴을 펼치는 박유성에게 향했다.
고교 리그에서 박유성의 루틴을 처음 봤을 때는 겉멋이 과하게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프로 야구를 씹어 먹는 모습을 보고 나니까 왠지 모르게 경건한 느낌마저 들었다.
박유성을 힐끔 바라본 이용기는 다시 한번 몸쪽 사인을 냈다.
3볼이라 박유성도 무리하지 않을 테니 이때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했다.
잠시 고심하던 황인석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유인구를 던졌다가 빠지면 고의 4구를 내준 거나 다름없었다.
연패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타자를 막으라고 올린 좌투수가 볼질만 해댈 수는 없는 노릇.
거를 때 거르더라도 최소한 스트라이크는 잡고 가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