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10화
47. 밥값은 해야죠(6)
프리미어 12에서 우승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이 인천 공항에 입국했을 당시.
문화체육위원회 담당 국회의원들을 포함해 여야 정치인들이 얼굴을 내비치면서 인천 공항이 소란스러워졌다.
일부 정치인들은 사전에 예정조차 없던 사진 촬영을 요구하며 선수단 앞을 막아서기까지 했고.
그런 상황들이 개인 방송 BJ들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 국민적인 질타가 쏟아졌다.
└진짜 이때다 싶어서 한 다리 걸치려는 정치인들 역겹다.
└여당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야당 국회의원들도 찾아갔던데요?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찾아갔다는데 그러려니 해야죠. ㅋㅋ
└진짜 우리나라 망신은 정치인들이 다 시키는 거 같음.
정치인들이 집단 뭇매를 맞자 체육계 및 야구계 관계자들도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이런저런 행사를 핑계로 박유성을 불러서 기념 사진을 찍고 친분을 과시해야 했지만.
청와대 초청 행사까지 취소된 터라 다들 여론을 살피기 바빴다.
박유성도 그런 여론을 잘 활용했다.
MVP 시상식과 골든 글러브 시상식을 제외한 모든 행사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심지어 신성 호텔에서 진행된 2031년 대한민국 스포츠 대상 시상식조차 박유성이 아닌 신민아가 대리 수상을 하자 일각에서는 해도 너무한 게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정부 부처 행사는 참석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다 참석해야지. 국회의원 아버지 팔순 잔치에도 초대하고 딸 결혼식에도 초대하고 뒷돈 챙기려고 여는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도 초대하고. 안 그래?”
“국회의원하고 정부하고 같아?”
“다를 건 뭐야? 정부 행사에 여당 국회의원 전부 참석할 건데 그럼 야당이 가만있겠어?”
“암튼 국민 영웅 국민 영웅 하니까 자기가 진짜 영웅인 줄 안다니까?”
“스포츠 한정 영웅은 맞지. 송흔민 이후로 최고의 스포츠 스타잖아?”
“아직 메이저리그도 못 갔는데 아시아 최초 프리미어리그 득점왕한테 비빈다고?”
“그렇게 따지면 박유성은 국제 대회 MVP 4관왕인데? 올림픽. 아시안게임. 프리미어12.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냉정하게 역대 스포츠 스타 다 따져도 이거 비빌 사람 없어.”
“우리끼리 싸울 필요 없어. 어차피 곧 결과가 나올 건데 뭘.”
“8억 달러는 터무니없고 과연 박유성이 7억 달러를 넘느냐인데 쉽지 않겠지?”
“메이저리그 빅마켓 총연봉이 3억 달러 초반인데 무슨 수로 7억 달러를 받아? 오타니 쇼헤보다 잘 받으면 다행이지.”
박유성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기자들은 이때다 싶어 여론 몰이에 나섰지만.
박유성이 북미 스포츠 역사상 최대 규모인 8억 달러에 다저스에 입단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박유성이 시범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미국 현지 지역 언론의 기사를 인용해 박유성이 메디컬 테스트에서 문제가 발견됐다는 소설을 써댔다.
“메디컬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했는데 다저스에서 8억 달러를 줬다고?”
“계약 내용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어. 그리고 무려 14년 계약이야. 다저스는 물론이고 박유성도 14년을 채울 생각이 없을걸?”
“그건 그래. 박유성이 일찍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긴 했지만 14년 후면 30대 중반이라고. 아시아 선수가 그 때까지 잘하긴 힘들잖아?”
“계약을 깰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뭔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다저스가 저렇게 감출 리 없지.”
하지만 그런 희망 사항도 박유성이 서울 투어에서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 데 이어 시즌 초반에 맹타를 휘두르면서 다시 쑥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이선철 해설위원은 이때다 싶어 박유성에 대한 칭찬을 쏟아냈다.
-솔직히 박유성 선수쯤 되면 오프 시즌에는 조금 편하게 즐겨도 될 텐데요. 스타즈에서 3년을 뛰면서 사생활로 문제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게 정상인 거죠. 야구 선수랍시고 물의를 일으키는 선수들이 문제인 겁니다. 그런 선수들 때문에 박유성 선수처럼 열심히 하는 선수들이 도매금으로 욕을 먹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박유성 선수를 욕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심지어 박유성 선수는 결혼도 잘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혼인 신고를 마치고 함께 지내고 있는 약혼녀 신민아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데이트하는 날에도 개인 훈련은 무조건 했다고 합니다. 박유성 선수 같은 스타플레이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걸 보면서 존경심이 들었을 정도라네요.
-국가대표 선수들이 괜히 박유성 선수를 리더로 인정한 게 아닙니다. 보통 리더는 최고참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하지만 박유성 선수는 막내인데 선배들을 따르게 만들 만큼 실력으로 압도하는 스타일입니다.
-국제 대회 통산 타율이 9할이 넘으니까요.
-그만큼 잘하는데 노력까지 하니까 다른 선수들도 박유성 선수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국가대표팀 관련 썰을 푸는 사이 데이브 로빈 감독이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카일 홀리데이를 불렀다.
선두 타자인 박유성이 단숨에 3루까지 나간 이상 최대한 빨리 동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카일. 어때?”
“네? 아, 네. 좋습니다.”
“그래? 정말 좋아? 아까처럼 실수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럼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투수 앞으로 번트를 대.”
“번트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피터는 안타를 맞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 던질 거야. 피칭 후에는 밸런스가 흐트러질 거고 자신의 앞으로 타구가 굴러오더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거야.”
원정 개막 4연전 때처럼 송현민이 대기 중이라면 최소한 희생 플라이를 노려봤겠지만 5경기 동안 안타는커녕 제대로 된 정타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 카일 홀리데이에게 희생타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스퀴즈 번트.
박유성의 발이 빠른 만큼 자이언츠 내야도 준비를 하겠지만 번트 타구를 투수 쪽으로 굴린다면 피터 페츠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런 세세한 주문은 카일 홀리데이를 더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썬. 피터 페츠를 앞에 두고 과감하게 리드를 합니다.
-마치 1루 주자가 좌완 투수를 상대로 도발하는 느낌입니다.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솔직히 지나쳐 보입니다. 하지만 썬은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도루를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426번의 베이스를 훔치는 동안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어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솔직히 만화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기록이죠. 하지만 썬은 도루 이외에도 수많은 기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할 7할 타율을 기록했으니까요.
-방금 전 안타로 올 시즌 타율도 0.639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아직 시즌 초반이긴 하지만 솔직히 경이롭습니다. 5할도 아니고 6할이에요. 물론 해마다 시즌 초반에 미치는 타자들이 나오긴 하지만 썬은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지난 다이아몬드 백스와의 홈 3연전에서는 안타를 4개밖에 때려내지 못했지만 또 자이언츠를 상대로 이틀간 5안타를 만들어냈습니다.
-특별히 자이언츠에 강한 걸까요?
-글쎄요. 어쩌면 썬의 계약서에 자이언츠전 옵션이 추가됐을지도 모르죠.
-아, 지금 피터 페츠가 투구판에서 발을 빼는데요.
-제가 투수라고 해도 썬이 거슬릴 겁니다. 1루 주자였다면 무시하고 던지겠지만 3루에 있으면 시야에 걸릴 수밖에 없어요.
-1루 주자라고 생각하고 견제를 하는 건 어떨까요?
-글쎄요. 솔직히 2사 이후도 아니고 무사 3루 상황에서 실점을 주지 않으려는 건 지나친 욕심처럼 보입니다.
-지금은 냉정하게 점수와 아웃카운트를 맞바꿀 상황이죠.
-피터 페츠 입장에서는 대기 타석에 서 있는 코리 베츠를 상대하기 전에 3루 주자가 정리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던 데이브 로빈 감독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유성의 적극적인 리드가 피터 페츠의 신경을 잡아끌면서 스퀴즈 번트를 대기에 더없이 좋은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3루수 윌리엄 플로레스는 박유성 때문에 베이스에 묶인 상태.
1루수 클레버 볼트가 베이스 라인까지 나와 있긴 하지만 거구인 만큼 스퀴즈 번트에 민첩하게 대응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뜨지만 않으면 돼.’
설상가상으로 피터 페츠가 공을 오래 쥐고 있다가 피치 클록 위반으로 볼을 선언받자 데이브 로빈 감독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현 피치 클록 규정상 주자가 있을 경우 투수는 20초 안에 피칭을 마무리해야 한다.
피터 페츠는 20초가 지나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박유성에게 정신이 팔려 18초를 써버렸으니 20초 안에 공을 던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피터 페츠. 이번에는 3루로 견제구를 던집니다.
-화풀이나 다름없는 견제인데요. 불필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견제구는 주자당 2번밖에 던질 수가 없거든요.
-앞으로 한 번 더 견제구를 던지면 그다음부터는 썬을 3루에 묶어둘 방법이 사라집니다.
-아마도 그래서 견제를 자제했던 것 같은데 구심의 볼 판정에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습니다.
포수 조이 패런트도 뜬금없는 견제에 타임을 부르고 마운드 위로 달려왔다.
“피터! 뭐 하는 거야?”
“저 자식이 자꾸 알짱거리잖아!”
“썬은 포기하자고 했잖아. 무사 3루야. 줄 점수는 주고 가야 해.”
“젠장할.”
1회부터 조이 패런트의 잔소리를 들은 피터 페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역시도 조이 패런트의 요구대로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마치 홈스틸이라도 할 것처럼 구는 박유성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공을 던진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계속 박유성에게 끌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규정상 던질 수 있는 견제구는 하나.
타석당 한 번만 투구판에서 발을 뺄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투구판을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썬은 버리자.’
애써 마음을 먹은 피터 페츠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바로 코앞에서 박유성이 성큼성큼 리드를 벌려 나갔지만 애써 무시했다.
대신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타석에 선 카일 홀리데이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피터 페츠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몸 쪽으로 몰리듯 들어오자 카일 홀리데이는 냉큼 번트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1루수와 3루수가 동시에 홈플레이트를 향해 달려들었고.
마음이 급해진 카일 홀리데이가 성급히 방망이를 내밀면서 타구가 투수 쪽으로 떠버렸다.
“젠장할!”
번트 자세를 확인하고 홈플레이트까지 절반 가까이 나갔던 박유성이 냉큼 3루로 몸을 돌렸고.
자신의 얼굴 쪽으로 날아온 타구를 잡아낸 피터 페츠도 3루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유격수 DJ 깁튼이 제때 베이스 커버에 들어오지 못하면서 박유성을 잡을 천금 같은 기회가 날아갔다.
-아, 스퀴즈 번트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무사 3루가 1사 3루로 바뀝니다.
-특별히 공이 까다롭게 들어오지도 않았는데요. 카일 홀리데이 선수가 너무 서둘렀습니다.
-이렇게 되면 또 분위기가 자이언츠 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요.
-이번 코리 베츠 선수 타석에서 어떻게든 한 점을 만회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박유성 선수를 불러들이는 데 실패하면 오늘 경기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