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3층 클리어
스무 개에 달하는 함정.
숫자만 봐도 질리지만 자세히 보면 개수에 비해 종류는 많지 않다.
하긴, 만약 모든 함정의 패턴과 종류가 달랐다면 통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다.
아무리 머리가 좋더라도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모든 정보를 떠올리는 건 힘든 일이니까.
사람의 집중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난 눈앞의 함정들을 노려봤다.
“후반부 함정은 열한 개.”
가장 위험한 즉사 함정이 두 개. 10미터 단위로 설치된 화염 함정이 다섯.
나머지는 네 개는 칼날 함정이다.
다행히 함정이 뒤섞여 있지는 않다.
구간별로 나뉘어 있었는데 즉사 함정은 구간이 끝나는 곳마다 존재했다.
-처억
난 자세를 낮추며 생존 루트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맞닥뜨릴 함정은 불길.
대략 50미터를 내리 달려야 한다.
일반인의 경우 전력으로 달렸다고 가정했을 때 빨라 봐야 6초 후반에서 7초 초반대다.
나 역시 그 정도 됐고.
화살을 쏘며 확인해 본 결과 화염 함정이 모두 불타는데 걸리는 시간은 8초.
“1초 정도 여유가 있는 건가.”
설사 몇 초 늦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다.
불길이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용암인 것도 아니고.
심각한 화상과 함께 머리카락이 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그냥 죽기 살기로 뛰자.”
아픈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화상으로 망가진 몸으로 남은 함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
정신 차리자. 괜히 까불지 말고.
-짜악!
난 두 허벅지를 때렸다.
할 수 있다. 조현수. 중간에 쫄아서 멈칫거리지만 않으면 돼.
심호흡을 하며 난 집중력을 높였고.
“간다!”
온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바닥에 그어진 하얀 선.
그건 함정이 시작되는 경계선이었으며.
-화르르르륵!
-파하아아악!
내가 선을 넘는 것과 동시에 초입부부터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뜨끈한 열기가 등을 덥힌다. 목 뒤가 따끔거리며 땀이 배어 나왔다.
무언가에 쫓기는 느낌.
늦으면 죽는다는 위기감.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빠르게 지쳐 가는 다리까지.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지만 이를 악물고 달렸다.
결국 진짜 죽을 때는 멈추는 순간이니까.
고작 몇 초뿐이었음에도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뜨끈하게 올라오던 열기는 어느새 뒤통수 가까이에서 느껴졌고 시야에 불길이 얼핏 보였을 때쯤.
‘거의 다 왔다!’
빌어먹을 화염 함정의 출구가 보였다.
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력으로 뛰고 있기 때문일까.
이미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크합!”
마지막 불길 함정을 통과하는 순간.
-푸화아아악!
지나온 통로를 모두 태워버린 불꽃이 잔재를 뿌리며 흩어져 내렸다.
불길이 잦아들며 느껴지는 청량감.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질 것 같았지만.
뿌득.
난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 안 끝났다. 긴장의 끈을 놓을 때가 아니라는 말.
전력 질주로 호흡이 엉망이 되고 목구멍에서 피 맛이 올라왔지만 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화염 함정이 끝나는 구간. 그 앞은.
[저승행 땅구덩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즉사 트랩이었으니까.
피할 곳?
없다.
무려 바닥 전체가 빛나고 있다. 어딜 밟아도 발동된다는 것.
가뜩이나 불길 함정을 지나오느라 속도가 붙은 상황.
말 그대로 죽으러 달려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왜 이쪽에만 횃불이 있나 했지!”
난 그 해답을 알아냈다.
다른 곳은 발광석으로 조명해 두었으면서 이곳만 횃불이 설치되어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랑 워낙 잘 어울려서 처음에는 인식도 못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횃불의 용도는.
-꽈득!
붙잡고 가기 위함이다.
난 달리던 속도 그대로 몸을 던져 벽에 달린 횃불 거치대를 움켜쥐었다.
-끼긱
쇳소리가 불안하게 울렸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 그러면 안 되지. 양심적으로 가자. 제발.
얼굴 가까이 횃불이 닿아 피부가 뜨거웠지만 무시했다.
까짓것 코 좀 빨개지고 말지.
저승행 구렁텅이로 빠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래서 이쪽에 화살 함정이 없었구나.”
땅구덩이 함정을 거의 다 지나올 때쯤,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벽에 매달린 상태에서는 화살을 피할 수 없으니까. 화살 함정을 초입 부근에 몰아 둔 거다.
악마 같은 놈들.
밸런스 조절을 기똥 차게 해 놨네.
죽이려들 때는 언제고 이럴 때는 또 살 수 있게 만들어 뒀다.
아니지. 나도 권능을 통해 미리 알지 못했다면 무조건 빠져 죽었을 테니 그냥 못 되먹었다고 하자.
“괜히 사람들이 튜토리얼 구간에서 죽는 게 아니야.”
튜토리얼. 이 망할 난이도의 시험은 죽음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런 함정도 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어차피 탑을 오르면 죽는 경험을 할 테니 미리 한번 겪어 봐라.
이런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도 단 한 번도 죽지 않고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사람은 없다시피 했으니까.
진짜인지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에 한 번씩 나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사람들 전원이 대형 길드에서 공들여 키운 루키나 정부 요원이었다.
“그놈들은 미리 알고 있어서 살았던 거네.”
하여간 개새끼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해도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땅구덩이 함정만큼은 순발력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대략 15미터 전방이 전부 함정이다.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절대 못 피한다.
“읏차.”
잘못된 공략법을 푼 놈들한테 엿 먹이는 건 좀 이따가.
일단은 이곳부터 무사히 클리어하자.
난 마지막 횃불에서 뛰어내렸다.
땅구덩이 함정을 무사히 통과했다.
이제 남은 함정은 두 종류.
칼날 함정과 즉사 트랩인 블랙 타일.
그 너머에는 포탈이 있다.
“칼날 함정은 랜덤이었지.”
툭툭. 발과 다리를 풀어 주며 난 기억을 되짚었다.
바닥, 천장, 벽. 화살을 쏠 때마다 튀어나오는 방향이 달랐다.
데스 사이드처럼 베고 지나가는 것이 꽤 살벌했는데.
그래도 딱 네 번만 피하면 된다.
그리고 내게는.
“아직 나이프가 남아 있고.”
난 옆구리에 차고 있던 나이프를 꺼냈다.
랜덤이면 어떠하리. 어차피 난 정직하게 도전할 생각이 없는데.
함정이 재작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4초.
그 시간 안에 빠져나갈 생각이다.
포탈까지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어림잡아 20미터.
4초면 충분하다.
난 나이프를 쥔 손을 뒤로 뻗었고.
-파악!
몸을 수축시키며 힘차게 집어 던졌다.
동시에 바닥을 박차는 다리.
-스걱!
-카가가각!
빠르게 달리면서 나이프에 반응한 칼날 함정을 주시했다.
천장에서 하나. 벽에서 하나.
반월을 그리며 그어지는 칼날의 크기는 복도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거대했고 소름이 끼칠 만큼 날카로웠다.
심지어 각도가 일정하지도 않다. 직선뿐만 아니라 사선으로도 뻗어 나오니까.
저거 운 나쁘면 나이프가 칼날에 걸릴 수도…….
-쉬익!
-카앙!
“젠장!”
걱정이 현실로 됐다.
세 번째 칼날이 솟아오르며 나이프를 쳐 냈다.
핑그르 돌아 땅에 떨어지는 나이프. 수습할 시간은 없다.
난 달리고 있었고 이미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
곧 있으면 칼날 함정이 다시 작동될 터.
복도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지척 거리에서 칼날이 쏟아지게 될 거다.
성인 몸통만 한 칼날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그냥 죽는 거지.
뭐가 됐든 지금 끝을 봐야 한다.
“어차피 남은 건 하나.”
그것만 잘 피하면 된다.
서서히 원래 자리로 사라지는 칼날을 피해 뛰었다.
앞으로 남은 거리 5미터.
남은 칼날 함정이 한 개.
무조건 피해야 하는 즉사 트랩이 한 개.
발동된 함정이 다시 작동하기까지 남은 시간 어림잡아 1초 남짓.
긴박한 상황 속.
-스아아악!
마지막 칼날 함정이 발동됐다.
좌측 중단!
뛰어서 피하기도, 슬라이딩을 하기도 애매한 위치.
그렇다고 오른쪽으로 몸을 던지자니 즉사 트랩이 있다.
‘이런 용도였구나!’
칼날 함정은 도전자를 죽이는 용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즉사 트랩으로 몰아가는 역할이었지.
피할 각이 없다. 그렇다면.
-콰드드득!
-뿌득!
난 이를 악물며 전력을 다해 바닥으로 엎드렸다.
최대한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 몸을 밀착시키고 바닥을 붙잡았다.
거친 돌바닥에 몸이 쓸리며 옷이 찢어지고 뱃가죽이 긁혀 나갔다.
벗겨지는 손바닥. 손톱은 부러져 붉은 선 여러 개를 어지럽게 그려 댔지만.
-서걱
간발의 차이로 칼날 함정 직전에서 멈춰 설 수 있었고.
“크합!”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킨 난 즉사 트랩을 지나 칼날 지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부욱!
뒤늦게 리젠된 칼날 함정이 옷자락을 찢어 버린 것이 헤프닝이라면 헤프닝.
난 입꼬리를 올렸다. 옷이야 이미 넝마나 마찬가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 지랄 맞은 함정을 돌파하다니.
왠지 모를 쾌감이 차올랐고.
세레모니를 하려는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 클리어 알림이 안 뜨지?’
들떴던 기분이 차게 식는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파악!
난 곧장 옆으로 몸을 던졌다.
반쯤은 본능인 행동.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판단이었고.
-콰아아아앙!
거칠게 바닥을 구르기가 무섭게 발리스타가 날아와 꽂혔다.
사방으로 튀는 돌조각.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다.
“워.”
머리로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를 맞으며 난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정확히 포탈로 향하는 길목. 벽 깊숙이 박힌 발리스타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멍청하게 저기에 서 있었다면 그대로 몸이 날아갔을 거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함정은 미리 다 파악한 줄 알았는데?
뒤를 살펴보니 내가 있던 출발선에서 빛무리 하나가 보였다.
[뒤통수 발리스타]
-전방 함정 통과 시 생성.
-1회성. (현재 작동이 멈췄습니다.)
-뒤통수가 근질거린다고요? 그럼 일단 피하세요!
“이런 미친.”
양심도 없는 놈들.
끝까지 방심할 수가 없다.
앞에 있는 함정만 신경 썼지 뒤에는 생각도 못 했는데.
아니지. 먼저 살폈더라도 몰랐을 거다.
복도에 있는 함정을 모두 돌파한 후에 생성되는 함정이니까.
“이게 난이도냐 진짜.”
[3층 클리어!]
-3층은 안전합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는 와중 알림이 떴다.
알림이 안 뜬 것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면 못 피했을 거다.
“어우.”
너무 긴장한 탓일까.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바닥에 철퍽 주저앉은 난 얼굴을 쓸어내렸고.
[몸이 회복됩니다.]
[열심히 구른 그대에게 단백질을!]
[스페셜 도시락 세트가 지급됩니다.]
3층 클리어 보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빛이 내 몸을 휘감더니 피로감이 사라졌고, 딱 봐도 고급스러운 도시락에는 따끈한 고기와 밥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음료수와 디저트까지. 냄새 한번 기가 막힌다.
[스페셜 도시락]
-섭취 때 1시간 동안 회복력 +200퍼센트.
도시락 주제에 버프 효과까지 있다. 스페셜인데는 이유가 있는 건가.
피식, 웃는 동안에도 알림은 계속해서 울렸다.
[노 히트 클리어!]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오!”
이건 좋다. 자그마치 1,000포인트.
나처럼 소속이 없는 사람은 지원을 못 받는다. 포인트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이야기.
이걸로 총 1,300포인트인가?
6층에 올라서면 조금이나마 장비를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수 보상도 받았겠다. 남은 건 그것뿐인가.
난 물끄러미 위를 올려다봤고.
[3층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또 다른 시스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