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NPC가 사람 잡는다!
릴카와의 짧지만 정신없는 만남을 끝내고 난 여관을 잡았다.
어찌 됐든 간에 10층에서 며칠은 보내야 한다.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해야 죽어도 광장으로 안 떨어져.’
등반을 하다 안전지대로 돌아올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죽으면 광장에서 부활하지만 여관에 방을 구한 경우에는 그곳에서 살아난다.
대형 길드들이 안전지대마다 비싼 돈을 들여 건물을 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 구한 방에서 죽을 경우.
그때는 그곳에서 살아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탑 생성 초기에는 상대방을 납치한 후, 계속해서 죽여 탑 밖으로 내보내는 범죄가 생기기도 했다고.
“하여간 살벌한 곳이야. 아. 다 필요 없고 자고 싶다.”
“으게게게.”
이왕 방을 구한 겸 3일 치를 계산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하고 밥도 느긋하게 먹었다.
이대로 꿀잠을 자면 좋으련만, 내게는 할 일이 남았다.
-끼이익
여관을 나서자 북적이는 거리가 보인다.
6층이 잠깐 쉬다 가는 곳이었다면 10층은 진정한 의미의 안전지대다.
일종의 마을. 각기 다른 무장을 한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자니 판타지 세계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그만큼 이질적이었으나 느껴지는 생동감과 열기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사람을 만난 게 반가워서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며칠 안 되기는 했지만. 탑에서의 생활이 워낙 각박해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Tip. 탑에 홀로 오랫동안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 팁 메시지를 무시하며 거리를 나아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지만 이왕 움직이는 김에 지리도 익히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생각.
찾아야 하는 NPC들도 있고.
“원래는 하려고 했던 퀘스트들이 있었는데 말이지.”
탑이 생성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만큼 위로 올라간 헌터들도 많았고 각종 퀘스트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도 있다.
커뮤니티를 뒤져가며 찾아낸 퀘스트 목록.
그중 첫 번째는 저곳.
유독 덩치가 큰 건물에서 할 수 있다.
“정령목 여관에서 잡일 하기. 이건 포인트도 벌면서 숙박도 공짜로 할 수 있지.”
소속이 없거나 힘이 약한 길드에 속해있는 가난한 헌터들이 많이 찾는 퀘스트다.
밖이나 탑이나 자본주의는 변함이 없는지라 기본시설을 이용하는 것도 비용이 들어갔다.
장비를 맞추고 식량을 사기 위해서라도 포인트는 필수.
나 역시 원래는 저곳에 머무르며 포인트를 벌고 위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를 하려 했다.
가끔 여관 주인의 눈에 띄면 특별한 퀘스트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릴카의 퀘스트를 받은 시점에서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 자체가 없어.”
생각보다 포인트가 없는 헌터들이 많은 모양인지 퀘스트 수용 인원이 넘어갔다.
NPC라고 무한정으로 퀘스트를 줄 수는 없으니까.
난 시선을 돌렸다.
“다음으로 하려 했던 게 강아지 찾기.”
10층 안전지대에서 가장 화려한 저택에는 금천황후金天皇后가 산다.
엄청난 부자라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워후.”
저 멀리 그녀가 사는 집을 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한옥과 성이 뒤섞인 듯한 기묘한 건축 양식.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었는데 모조리 금이다.
탐난다고 훔치려 들었다가는 그대로 목이 잘린다는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잊을 만하면 도둑질을 하다 죽는 사람이 나온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금천황후가 키우는 강아지가 뽀삐.
무슨 수로 탈출했는지는 몰라도 한 달에 한 번꼴로 저택에서 탈출한다고 한다.
그때 발생하는 퀘스트가 강아지 찾기.
부자인 만큼 보상은 후하다고 한다.
“사실상 랜덤 발생 퀘스트라 운이 없으면 못 하는 거지만.”
경쟁률도 치열한 편이고, 오로지 금전적인 보상만을 주기에 특별한 아이템이나 스킬을 얻는 일은 없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면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퀘스트.
일단 이 두 개가 10층에서 할 수 있는 메인 퀘스트였지만 이외에도 자잘한 퀘스트는 많았다.
“딱히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 그렇지.”
대부분 퀘스트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으니까.
단순 심부름이나 잡일이라고 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NPC는 활동 범위가 정해져 있어 그 밖으로는 나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다른 NPC와 교류하거나 물건을 보낼 때, 헌터들에게 퀘스트 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거고.
릴카가 특이한 경우다.
‘그 녀석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녀도 말하지 않았던가.
물건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본인이 갈 수 없는 곳에 있어서 퀘스트를 주는 거라고.
근본적으로는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난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돌렸다.
오늘의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우우우웅
미약하게 들려오는 진동음.
소음의 정체는 마을 구석에 위치한 투기장이었다.
거대한 건물. 원형 경기장, 킬더레스 홀.
내가 노리는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었다.
NPC 킬더레스가 운영하는 곳으로서 10층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기를 펼친다.
토너먼트 형식.
서로의 강함을 뽐내는 장이었고.
“수많은 영입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지.”
6층에서야 다들 막 각성한 상태라 가늠이 안 되지만 10층은 다르다.
성장 구간을 거치며 위로 올라온 사람들이니까.
기본적인 헌터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당연하게도 새로운 유망주를 영입하고 싶은 길드는 많았고, 객관적인 가치를 매기기에 투기장만 한 곳이 없었다.
비교적 싼 값에 스카우트할 수 있으니까.
다 성장한 다음에는 영입하려면 돈이 몇 배는 더 든다.
비단 길드만 주목하는 건 아니었다.
운이 좋다면 대형 길드에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소속이 없는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도전해 댔다.
좋은 성적을 얻은 이들이 좋은 길드와 계약할 수 있는 건 말해야 입 아프고.
여기에 길드의 지원과 관심을 받기 위해 길드 소속 헌터들도 참여를 하니, 가히 10층 최대 이벤트라 볼 수 있었다.
“보상 자체도 괜찮다지?”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주어지는 보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양질의 물건을 준다고 들었다.
가장 최근에 있던 이벤트에서는 1등에게 B급 무기가 상품으로 주어지고, 5,000포인트가 상금으로 지급되었다고 했다.
나야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상품과 포인트는 탐난다.
이번 기회에 한몫 단단히 챙길 생각.
여관을 나선 것도 이벤트 참가 신청서를 쓰러 가기 위함이다.
그전에.
[이블아이 가면 (F)]
-이블아이의 모양을 본 따 만든 가면.
-커다란 눈! 앙증맞은 날개!
-할로윈 때 쓴다면 인기 만점입니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썼다.
목걸이 투구를 쓰는 방법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가리고 싶어서.
“저기요.”
투기장 안으로 들어가자 투기장의 주인, 킬더레스가 책상에 엎드린 채 졸고 있었다.
어찌나 잘 자는지 침까지 질질 흘려 대는 통에 난 그의 어깨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고.
“으음? 와 이씨! 뭐야!”
당황한 그는 안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목걸이 투구가 자동 활성화됩니다.]
위험을 감지하고 저절로 활성화된 투구.
머리가 울리며 난 옆으로 쓰러졌다.
뇌진탕이라도 왔는지 눈앞이 아찔하다.
동시에 느껴지는 탈력감.
‘미친. 한 대 맞고 마력이 거덜 났다고?’
목걸이 투구는 마력으로 방어력을 대체하는 아티팩트.
그 말은 곧 저 NPC가 잠결에 휘두른 주먹 한 방이 내 전체 마력과 맞먹는다는 이야기가 됐다.
주먹은 보이지도 않았다. 뭔가 어깨가 움찔한다는 걸 느끼는 것과 동시에 머리를 강타했으니까.
이로써 확실해졌다.
‘NPC랑은 무조건 사이좋게 지내자.’
진짜로. 괜히 까불었다가 꿀밤 한 대 맞으면 요단강을 건너게 생겼다.
“어? 어어! 주, 죽은 건가? 안 되는데!”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걸까.
킬더레스가 화들짝 놀라며 날 부축했다.
머리가 멀쩡한지 살피고 가슴에 귀를 대 심장이 뛰는지 확인한다.
거의 100퍼센트 확률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진짜 죽을 뻔하기는 했다만.’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난 자꾸만 더듬대는 그의 손을 치우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어지럽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사, 살았어? 정말 다행이야! 여기, 이쪽에 앉게.”
서둘러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내게 건네는 킬더레스.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목걸이 투구를 도로 목걸이로 바꾼 뒤 의자에 앉았다.
“아이고. 이거 미안하게 됐군. 왜 써도 몬스터 가면을 써 가지고.”
“다짜고짜 사람을 치면 어떻게 합니까!”
“그, 그렇지. 그건 내가 잘못했지.”
본인도 인정하는지 우물쭈물한다.
난 지그시 그를 노려봤다.
덩치는 그리 크지 않다. 기껏해야 170센티미터 초반?
그럼에도 느껴지는 기세는 강렬했다. 이미지도 그렇고.
얼굴을 비롯해 피부 전체가 붉은색이었고 이마에는 뿔까지 달려 있다.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는 녹색으로 빛났으며 목을 타고 올라오는 문신에서는 소름 끼치는 기운이 요동쳤다.
[킬더레스-NPC]
-10층 안전지대의 투기장을 운영하는 NPC.
-되도록 까불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
-격차가 심해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역시나 제한된 정보.
릴카보다도 내용이 적다.
적어도 릴카는 붉은 여우 수인이라는 것 정도는 떴었다.
‘킬더레스가 악마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일지도 모르겠군.’
하기야 수인 NPC도 있는데 악마라고 없을까.
이러다 천사니 뭐니 그런 놈들도 나오는 거 아닐까 몰라.
난 그런 놈들 사이에서 굴러야 하고.
-울컥
불현듯 서러움이 밀려온다.
짐꾼으로 살다 미친 헌터들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하고.
반쯤 죽어서 탑에 불려왔더니만 잘못된 공략법 때문에 진짜 죽었다.
망할 함정과 몬스터를 상대로 온갖 고생은 다 하고, 6층에서는 처리관이랑 생사결을 치르고, 성장 구간에서도 구르기의 연속.
기껏 10층까지 왔더니 깡패 같은 NPC한테 강제 퀘스트를 부여받질 않나 이번에는 죽을 뻔하기까지.
‘나쁜 놈들. 빌어먹을 탑. 확 무너져 버려라. 다 망해라!’
속으로 울부짖는데 킬더레스가 말을 걸었다.
“어… 괜찮나? 진짜 미안하네. 크흠! 나를 찾아온 걸 보니 경합에 참가하려는 것 같은데 맞나?”
“예.”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도 한 짓이 있는지라 뭐라 하지는 않았다.
“가면을 쓴 걸 보니 정체를 밝히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고. 대충 이블아이로 등록해 두겠네.”
슬쩍 내 눈치를 살핀 킬더레스가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볼펜을 쥐더니 익숙하게 참가 서류를 작성한다.
그래도 일은 빠릿빠릿하게 하는 모양.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내게 참가증을 쥐여 줬다.
“이번 경합은 삼 일 뒤에 열리네. 훈련장은 안에 있으니 편한 대로 써. 그리고 으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살짝 경계심이 생겼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몸을 숙였고.
“미안한 것도 있으니 내가 한 가지 선물을 주겠네.”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선물이라. 뭘 주려는 거지?
이전, 덕춘이를 팔라며 릴카가 보여 줬던 물건들이 있어서 그런가 기대감이 올라간다.
“직접적으로 내가 뭘 해 줄 수는 없어. NPC란 게 그렇거든. 대신 이번 경합의 우승 상품을 내 재량으로 굉장한 걸 준비해 주지.”
“예?”
난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뭘 주나 했더니만 상품 수준을 높여 준단다.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직접 줘야 의미가 있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내가 1등을 못 하면 어쩌려고.
엉뚱한 사람이 내 선물을 가로채는 거 아닌가.
“너무 실망하지 마. 자네 방금 나한테 맞고도 살지 않았나? 보통은 죽어, 그 장비가 특별한 걸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번 경합에서는 자네가 우승할 거 같은데.”
“그래도 그렇지. 너무 대충 넘어가는 거 아닙니까? 듣자 하니 NPC도 함부로 무력을 행사하면 페널티를 받는다는데. 시스템으로 건의라도 넣을까요?”
이전에 커뮤니티로 얼핏 들은 정보로 압박을 넣었다.
[Tip. 정당한 이유 없이 등반자를 공격한 NPC는 징계 대상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시 시스템으로 건의해주세요.]
나이스 타이밍. 팁 메시지도 내 입장을 두둔했다.
“제대로 된 보상 주십쇼. 아앗!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대로는 아파서 경합도 제대로 못 치르겠다!”
“자, 잠깐만 쉿! 그러지 말고.”
“NPC가 사람 잡는다! 억울하다!”
킬더레스가 달래려고 했지만 난 더욱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어딜 그냥 넘기려고. 좀 더 좋은 걸 달란 말이야.
난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했고.
“알았네. 알았어! 스탑!”
결국 킬더레스는 조건을 수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