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뭐, 누구요?
메인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킬더레스.
등장의 전조도 없었건만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듯 나타났다.
역시 NPC라는 존재는 보통이 아니다.
“예선전은 충분히 즐기셨겠죠?”
잦아든 폭죽.
킬더레스의 물음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뜨겁다.
보지는 못했으나 꽤 대단한 경기가 펼쳐졌던 모양.
‘조금만 빨리 깨어났어도 전략을 좀 짤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
“본선은 토너먼트로 이루어집니다. 본선에 진출한 자는 총 15명!”
그의 외침에 허공에 화면이 떠올랐다.
A조와 B조.
두 개로 나뉘어 있었고.
“난 B조로군.”
부전승이 예약되어 있는 난 B조로 가 있었다.
원래 결승까지 가려면 3연승을 거둬야 하지만 난 2번만 이기면 결승전이다.
확실히 남들에 비해 혜택을 받고 있다.
심지어 예선도 치르지 않았으니까.
그 때문일까.
“뭐야? 15명? 본선 진출한 건 14명이잖아.”
“B조에 있는 놈은 어디서 튀어나온 건데?”
“이거 부정행위 아닙니까!”
관중과 다른 본선 참가자로부터 항의가 들어왔다.
곤란한지 멋쩍은 미소를 흘리는 킬더레스.
미적지근한 반응 때문인지 소란은 더욱 커져 갔으나.
-따악
[침묵 (S) Lv.MAX]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동시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강제된 침묵. 사람들이 당황하며 입을 벌려 보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
‘미친. 침묵을 S등급까지 레벨 업 했다고?’
경악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정보를 읽는 권능이 있는 난 그가 한 짓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침묵. 저건 잘 쳐줘 봤자 E급을 넘지 않는 스킬이다.
등급마다 정해진 최대 레벨은 10.
거기서 등급 업그레이드를 하면 다음 등급으로 승격되는 것이 스킬 시스템이다.
‘B급까지야 바로 단계가 올라가지만 A급부터는 세부 등급이 나뉠 텐데?’
A급 다음은 AA급. 그다음은 AAA급.
여기서 한 번 더 등급을 올려야 S급에 달한다.
그 말은 곧, 킬더레스가 침묵 스킬을 7번이나 승격시켰다는 거다.
등급이 올라갈수록 요구되는 경험치가 많은 걸 고려했을 때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사람들이 왜 높은 등급의 스킬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는데.’
태생 등급이 높을수록 등급 업을 하는 횟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보다 빠르게, 적은 노력으로 강력한 스킬을 쓸 수 있으니까.
태연한 얼굴로 관중을 둘러보던 킬더레스가 입을 열었다.
“자체적인 심사 후 결정된 사안이니 항의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단호한 말투.
압도적인 차이를 느낀 관중들이 몸을 굳혔다.
스킬은 풀렸지만 함부로 떠드는 이는 없었고.
-짜악!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리려는 건지 킬더레스가 손뼉을 쳐 시선을 모았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입에 걸려 있다.
“그래도 아무런 페널티 없이 올라가는 건 아쉽겠죠?”
어? 잠깐만 페널티?
이런 말은 없었는데.
내가 어버버하는 사이 흐름이 넘어갔다.
“다, 당연하지! 페널티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옳소! 일 잘하네!”
“믿고 있었다구. 젠장!”
한 번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저마다 아우성치는 관중.
철창 너머에 있는 본선 진출자들 역시 주먹을 휘두르며 지지하고 나섰다.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고?”
아니, 사전에 말이라도 해 주던가.
그럼 억울하지라도 앉지.
어쩌면 이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NPC 아니던가. 탑에 귀속된 존재. 시스템의 제약을 받는 인물.
투기장 이벤트 역시 따지고 보면 시스템의 의지가 반영된 행위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할 뿐이었다.
난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멘탈이 깨지는 건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작게 한숨을 내쉬는 타이밍.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딱히 엄청난 페널티를 부여할 생각은 없다네.】
킬더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몸을 떨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그는 경기장 한가운데 떠 있을 뿐이었다.
내 쪽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한 건 착각이었을까.
“페널티는 그래. 그게 좋겠군요.”
-파앗!
킬더레스가 손을 쥐었다 펴자 물음표가 그려진 검은색 상자가 생성됐다.
경기장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에 상자가 비쳤다.
집중하는 듯 모두가 입을 다문 사이, 킬더레스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가 가진 스킬 중 하나를 봉인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페널티가 되지 않을까요?”
킬더레스가 동의를 구하듯 물었고.
관중들은 잠깐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이어진 환호.
-와아아아아아!
“그 정도면 인정이지!”
“야, 씨. 이거 페널티가 더 강한 거 아니야?”
“그러게 예선부터 올라왔으면 이럴 일 없었잖아.”
“쌤통이다 자식아!”
들뜬 사람들이 야유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질렀다.
연신 킬더레스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들.
정작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 거였나.’
역시 똑똑하다.
이곳은 10층. 기껏해야 스킬 서너 개를 가지고 있으면 많은 곳이었다.
처리관이라면 그 이상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두세 개 정도?
스킬 하나를 봉인한다는 건 사실상 전력의 3분의 1 정도를 깎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난 예외였는데.
“스킬 목록.”
[되갚기 (A) Lv.1]
[파이어 밤 (B) Lv.6]
[안개 질주 (B) Lv.3]
[버프 다이스 (C) Lv.4]
[도축 (C) Lv.1]
[죽은 척 (D) Lv.1]
[야간 시야 (E) Lv.4]
[화기 내성 (E) Lv.3]
[위협 (E) Lv.2]
[치명적인 포즈 (E) Lv.1]
[독 내성 (E) Lv.1]
[워터 (F) Lv.3]
[알람 (F) Lv.2]
[디그 (F) Lv.2]
[파이어 (F) Lv.2]
[샤워 (F) Lv.5]
무려 16개의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형 길드의 루키? 처리관? 다른 유망주들?
내 앞에서는 다들 한 발 물러서야 할 거다.
그만큼 난 힘든 길을 걸어왔고 도전에 걸맞은 보상을 얻은 거니까.
대부분 전투와는 관계없는 거긴 하지만, 그 말은 곧 킬더레스의 제비뽑기에서도 그다지 필요 없는 스킬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다.
킬더레스가 어떻게 내게 스킬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뭐. 따지고 보면 나도 권능을 통해 남의 권능과 스킬을 보니까 이상할 것도 없네.’
난 미미한 미소를 지은 채 킬더레스를 바라봤다.
그가 능숙한 사회자처럼 관중들을 이끌었다.
“그럼 뽑아보도록 하죠. 아. 보이는 것은 스킬 등급과 레벨뿐입니다. 어떤 스킬인지는 프라이버시가 있는 만큼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세심한 배려다. 제약은 걸되 정보 노출은 하지 않겠다는 거니까.
난 흡족하게 그가 하는 걸 지켜봤고.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긴장감을 가중시키는 효과음과 함께 그가 상자에서 공 하나를 뽑아 들었다.
터져 나오는 이팩트.
감탄하는 사람들.
“이거 제대로 엿 먹었는데?”
“꼬숩다, 야!”
“지금이라도 그냥 포기하지?”
“레벨 높은 거 보니까 저게 주력 스킬 같은데!”
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킬더레스가 뽑아든 스킬은.
[야간 시야 (E) Lv.4]
[투기장의 주인, 킬더레스의 권한으로 이벤트 한정 해당 스킬 사용이 금지됩니다.]
이번 전투에는 크게 쓸모없는 거였다.
나야 뭐가 봉인된 건지 아니까 웃을 수 있지만 관중들과 참가자들은 아니다.
[??? (E) Lv.4]
화면에 비치는 정보는 이러니까.
하위층인 만큼 대부분의 헌터들이 가지고 있는 스킬 등급은 D, E급.
당장 6층 처리관 오지혁의 스킬도 D급이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기껏해야 C급 정도가 가장 높을 것 같은데.
“좋군.”
난 속으로 안도했다.
어느 정도 소란이 가라앉자 스크린 화면이 바뀌었다.
아직까지는 아무런 이름도 적혀 있지 않는 토너먼트 대진표.
A조와 B조를 번갈아 비추더니 곧 A조 화면이 확대되었다.
A조에 속한 이들은 여덟 명.
그중 첫 번째 라운드에 불이 들어왔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불길.
“그럼 바로 첫 경기 시작해 보겠습니다!”
반으로 갈라진 화면에 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한 명은 이마에 흉터가 있는 군인 스타일.
다른 한 명은 당당히 피닉스 길드의 마크를 단 청년.
“닉네임, 락 아미! 그에 맞서는 상대는 피닉스 길드의 박호종!”
-쿠르르르르!
그가 경기장 두 곳을 가리키자 철창이 열리며 두 인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방색 티셔츠를 입고 허벅지에 파우치를 잔뜩 매단 락 아미. 한 손에는 대거를 쥐고 있다.
군인이었던 걸까? 아니면 콘셉트?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진지한 표정인 락 아미와는 달리 박호종은 가벼운 얼굴이었다.
“피닉스 길드의, 박호종입니다! 선배님들 잘 지켜봐 주십쇼!”
시작부터 쇼하고 있다. 사회생활이라고 해야 하나.
저게 맞을지도 몰랐다. 나야 좋든 싫든 탑의 꼭대기를 봐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를 수 있는 만큼 오르다 밖으로 나가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건방지네.’
상대방 따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건지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대형 길드 뽕에 차오른 애들이 대체로 저렇다.
자신이 최고인 것 같고, 변변찮은 소속도 없는 사람은 허접하게 보는 것.
부인은 안 한다.
적어도 일반인이었을 때를 기점으로 본다면 그들이 더 뛰어난 게 맞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탑. 그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피닉스 관계자들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피닉스 길드면 대형 길드 서열 5위야.’
이번 기회에 한번 봐 봐야겠다. 다른 대형 길드원들의 수준은 어떠한지.
내가 맞붙어야 하는 이들의 실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오로지 1등. 그게 내 목표였으니까.
“규칙은 간단합니다. 항복 선언, 전투 불능, 사망 시 패배로 간주 됩니다.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투기장 이벤트에서 죽는 건 코인이 차감되지 않으니까요!”
킬더레스가 목청을 높이며 손을 들어 올렸고.
“그럼, 시작합니다!”
그의 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두 참가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예선전을 통과했다 이건가.
양쪽 모두 상당히 빨랐다. 다른 게 있다면.
‘박호종은 붙으려 하고, 락 아미는 거리를 벌리려 하는군.’
각자의 능력에 따라 전략을 짜 둔 거겠지.
거리 싸움이 승패를 가를 가능성이 더 높다.
누가 이길까. 난 잠시 생각했고 결론을 내렸다.
“피닉스 쪽이 이길 거야.”
미세하지만 더 빠르다. 체력도 조금은 아끼는 것 같고.
자연스럽게 코너로 몰아가는 폼이 운으로 대형 길드에 들어간 게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크윽! 이거나 먹어!”
몰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락 아미가 파우치에 손을 넣더니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그대로 날아가 폭발하는 돌덩이.
[수류탄 투척 (D) Lv.3]
돌이 깨지며 파편이 박호종을 덮쳤다.
먹히는 걸까.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락 아미가 연달아 파우치에 든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비산하는 돌조각, 피어오르는 먼지.
“재밌는 스킬을 가졌네?”
척 봐도 나쁘지 않은 스킬이다. 나중에 등급이 오르면 더 좋은 스킬이 되겠지.
중거리 딜러, 혹은 견제, 메인 공격으로도 쓸 수 있을 만큼 범용성이 좋다.
다른 투척류 스킬이나 버프 스킬이 있다면 시너지도 발휘할 거고.
다만.
“저거 하나로는 못 이겨.”
난 나직이 중얼거렸다.
-푸확!
연기를 뚫으며 모습을 드러낸 박호종.
군데군데 옷이 찢기기는 했지만 상처는 없었다.
여전히 싱긋 웃고 있는 놈이 손을 뻗었다.
-콰르르르릉!
뿜어져 나온 전격.
락 아미가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몸을 던졌지만 타이밍이 늦었다.
-파지지직!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깔끔한 승부. 승자는 정해졌다.
“피닉스 길드, 박호종 승!”
-와아아아아!
킬더레스의 외침에 사람들이 환호했고, 박호종은 길드 선배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마무리까지 충성심 어필이라니. 행동이 가벼운 거랑은 별개로 길드 생활은 잘할 거 같다.
그거야 알아서 하라 하고.
내가 저걸 맞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대충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피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전격 내성은 없다. 짜릿하겠지.
그런데 강화된 신체 능력은 상식을 뛰어넘는 내구도와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마력이 높으면 스킬 공격에 대한 저항력도 강해진다.
난 유독 마력 스텟이 높은 편이고.
게다가 서리 불꽃 검에 붙은 옵션. 마력 +30.
이 정도면 어지간한 스킬 공격은 견딜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무식하게 맞고만 있을 생각은 없지만.”
얼추 분석을 끝낸 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정리된 무대.
킬더레스가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다.
“짧지만 인상 깊은 경기였습니다! 그럼 두 번째 경기 가시죠!”
진행 빨라서 좋네.
난 전광판을 주시했다.
“A조 두 번째 경기. 이곳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이죠? 이클립스 길드의 차기 처리관이 될 예정인 남자. 윤기학! 맞서는 상대는…….”
소개를 하다 말고 킬더레스가 이마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는 프로. 다시금 텐션을 끌어 올리며 소개를 이어 갔고.
“어. 참가명이 좀 기네요. 윤기학의 상대는, ‘내가 내기 이겼다 1등이니까 소원권 쓸게 밥 한 끼 먹자 쁘띵공듀’입니다!”
난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