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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89화 (89/740)

89화 너는 못 지나간다

난 성물을 움켜쥐었다.

솔직히 쓸까 말까 고민했다.

칭호 효과로 성물을 쓸 수 있기는 하지만 한 번밖에 못 쓴다.

이 자리에서 쓰면 이후에는 못 쓴다는 말.

나중에 정말 필요한 순간이 생긴다면?

사실 성물을 쓰지 않더라도 19층으로 클리어할 수 있지는 않을까?

불안감과 의구심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내 판단은 간결했다.

‘다음이고 나발이고 지금 못 뚫으면 의미가 없지.’

물론 무한 코인이 있는 만큼 도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19층 보스한테 똑같은 호의를 받을 수 있을까?

그가 준 온갖 효과가 적용된 음식들.

그만한 대접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글쎄.

못 받을 거 같은데.

이곳의 보스는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라 자아가 있는 사람이니까.

언제까지고 똑같이 행동할 리가 없다.

“하압!”

보스와 맞닥뜨리기 직전.

난 크게 기합을 넣었다.

신호다.

내 어깨에 달라붙어 있던 덕춘이가 점프했다.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보스의 눈동자.

여전히 굳건하게 나를 가로막고 있는 방패.

절삭도 프로즌 브레이크도 파이어 밤도 막아 냈다.

이제야 알겠다.

놈의 메인 무기는 대검이 아니라 방패다.

그러니.

-꾸득!

[성물 약탈자(칭호)가 발휘됩니다!]

[스며드는 신성 (AA)]

-일시적으로 봉인이 풀렸습니다.

-상대의 방어를 무시합니다.

-신성력이 소모됩니다.

-쑤우욱!

몸에 차올라 있던 신성력이 단번에 빠져나갔다.

80에 달하는 수치였건만 이제는 1도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많은 신성력을 담보로 한다는 거겠지.

AA급 아티팩트라서? 아니면 방어 무시라는 사기적인 능력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충분하니까.

-우우웅!

신성력이 담긴 검이 진동한다.

난 힘껏 팔을 내뻗었고.

“그에에에엑!”

-쿠화아아악!

옆으로 뛰어오른 덕춘이가 불길을 내뿜어 보스의 시야를 가렸다.

보스의 방어가 더욱 단단하게 조여지는 게 보였다.

어떤 공격이라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때문인가.

그의 대검 역시 내게 떨어졌으나.

-푸욱!

내 검은 물을 가르듯 그의 방패를 뚫었으며.

[절삭 (C) Lv.8]

[파이어 밤 (A) Lv.1]

절삭으로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팔 뒤편으로 폭발을 일으켜 추진력을 더 했다.

호의를 베푼 이에게 너무 잔인하게 구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으나.

‘역시 괴물이었어!’

내 생각은 달랐다.

프로즌 브레이크를 열기만으로 날려 버린 인물이다.

이미 내게 있어 19층 보스는 마그나로크 이상의 괴물이었다.

-꾸그그그극!

방패를 뚫고 갑옷을 통과했건만 검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말 같지도 않은 몸뚱이에 막힌 것.

기껏해야 생채기? 그 정도 내지 않았을까.

그래도 괜찮다.

애초에 내 계획은 일격으로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으음!”

허를 찔린 그가 움찔하도록 만드는 거였으니까.

모든 방어구를 지나쳐 복부를 찔렸다.

소름 돋는 일이었고, 동시에 위협을 느낄 만한 사건이었다.

-파앗!

반사적으로 그가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노렸다.

“궥!”

역할을 마친 덕춘이가 내 어깨로 돌아왔고.

난 파이어 밤을 이용해 폭발적으로 앞으로 날아갔다.

도착 지점까지는 기껏해야 500미터.

각성자의 초인적인 신체 능력과 스킬이 함께한다면 몇십 초 걸리지도 않는다.

나의 승리는 기정사실!

“거기 서라!”

승리의 미소를 짓기가 무섭게 그의 외침이 들렸다.

이런 벌써 쫓아온다고?

뒤를 살피자 보스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고 있다.

판금 갑옷에 타워 실드, 대검까지 들었는데 이게 말이 되나?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진다.

미쳤다. 기동력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하고 잡힐 수는 없지.

[디그 (F) Lv.10]

땅을 파내 함정을 만드는 동시에 뒤로 돌아 튀어나온 돌 더미를 걷어찼다.

콰앙!

산산 조각나며 돌덩이들이 보스를 덮친다.

거기에 워터와 파이어.

안개를 만들었으며.

[프로즌 브레이크 (A) Lv.7]

주변을 얼려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원래라면 압축된 얼음이 쪼개져야 했지만.

[마력 전달이 중단됐습니다.]

[스킬이 종료됩니다.]

난 타고난 마력 능력을 이용해 강제로 스킬 발동 과정을 멈췄다.

하나의 벽이 되어 경로를 막는 얼음벽.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

[디그 (F) Lv.10]

천장을 향해 디그를 발동시켰다.

전부터 궁금했다.

디그로 파낸 흙은 다 어디로 가는가.

답은 간단했다.

‘파낸 만큼의 흙을 다른 방향으로 미는 거지.’

만약 주변 토대가 단단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쩌적

-쿠르르릉!

충격을 못 이기고 무너지는 거지.

천장에 균열이 가더니 그대로 조각나 아래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는 것이 제대로 얻어맞고 있는 모양.

그럼 잘 있으십시오.

난 도착 지점에 들어갈 테니까.

승리를 확신하며 발에 힘을 더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100미터.

몇 초 후면 게임은 끝난…….

“미친!”

난 경악했다.

머리카락 위로 뭔가가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쿠웅!

눈앞에 보스가 떨어졌다.

그 거리를 도약했다고?

아니, 내가 만든 얼음 장벽 높이만도 상당할 텐데, 그걸 중갑으로 무장한 채로.

됐다,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불가능할 거 같으면 뭐 하나.

실제로 벌어졌는데.

“방금 일격은 아주 좋았네! 내 칭찬하지! 으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방패를 휘둘렀다.

말이랑 행동이 정반대잖아!

칭찬하던 거 아니었어?

“젠장!”

난 이를 악물었다.

달리던 상태라 피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몸에 힘을 주며 충격에 대비할 수밖에.

[중량 팔찌 (C)]

마력을 최대한 가동해 무게까지 늘렸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

-콰아아앙!

“크헉!”

방패에 직격당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대비한다고 했는데 이 정도 충격이라니.

그냥 맞았다면 전신이 으깨졌을 게 분명하다.

역시 괴물.

클리어 조건이 승리가 아니라 인정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면 승부로는 절대 못 이긴다.

원한다면 날 가지고 놀 수도 있겠지.

하여간 밸런스 꼬락서니 하고는.

어떻게 하지?

성물 하나는 이미 사용했다.

남은 성물은 다섯 개.

이걸로 승부를 봐야 하는 건가.

아니면.

‘킬더레스 소환권이 있기는 한데.’

이걸 굳이 이 타이밍에 쓸 이유는 없었다.

생사결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내 비장의 카드를 쓸 필요는 없지.

‘사실 둘이 맞붙어서 누가 이길지도 모르겠고.’

킬더레스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그저 둘 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너무 강한 인물들이라 비교 자체를 못 하겠는 거지.

아직도 난 탑에 속한 이들에 비하면 무지렁이다.

“설마 벌써 끝은 아니겠지?”

-쾅! 쾅! 쾅!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보스가 방패를 휘둘렀다.

방패가 이렇게 위협적일 수 있는 거였던가.

몸을 비틀며 공격을 피하고 발길질로 방패를 밀어냈다.

저걸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방패 자체는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다루는 솜씨가 엄청나다.

제대로 된 일격조차 할 수 없을 정도.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카가가각!

자연스럽게 흘려 내더니 앞차기를 날린다.

제대로 막았음에도 힘에서 밀리다 보니 몇 미터씩 쭉쭉 뒤로 밀린다.

이런 식으로 좀만 더 있으면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겠는데.

나한테 호의가 있다는 말 다 구라 아니야?

절대 위로 못 넘어가게 만들려는 수문장인가.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넘어간다.

이미 성물을 사용했다.

지금 끝내야지 안 그러면 전력이 더 깎인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낄 생각 버리고 전력을 다하자.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오, 눈빛이 살아났군.”

“예. 덕분에 아주 잘 살아났습니다!”

-파앗!

막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공격해서 뚫을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아까처럼 은근슬쩍 넘어가 봤자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

남은 건 하나.

그를 멈추게 해야 한다.

“으아아아아합!”

-쾅! 콰직! 카아앙!

기세를 끌어 올려 몰아붙였다.

어지럽게 그어지는 검로.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폭발.

버프 다이스가 끝나면 다시 발동시켰다.

눈금 4. 스플래시 데미지.

화려하게 불꽃이 수놓는다.

그 또한 불길을 퍼트리며 대항했고, 나와 그의 공방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성물 약탈자(칭호)가 발휘됩니다]

[얼음의 고요함 (A)]

-얼음과 불의 신전의 성물.

-주변을 모두 냉각시킵니다.

-불을 꺼트립니다. (제한 시간 30분)

모든 걸 식혔다.

거짓말처럼 떨어진 기온.

불길 걷히며 넓은 공간이 드러났고.

“지금부터는 제가 주도합니다.”

[밤을 부르는 자-칭호]

[밤이 찾아옵니다.]

[스텟이 증가합니다.]

[옵텍터 소환.]

19층에 밤이 찾아왔다.

[야간 시야 (E) Lv.5]

어두운 세상 속 나는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9층을 지나며 어둠에는 익숙해졌으니까.

불길이 꺼진 19층은 상당히 넓었으며 소환된 옵텍터는.

“최대한 방해해!”

“키키킥!”

“킥킥!”

내 명령을 따라 보스에게 달라붙었다.

나도 당해 봐서 안다. 옵텍터라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던가! 고약하지만 재밌군!”

-번쩍!

그가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옵텍터가 한 뭉텅이씩 사라졌으니까.

느끼고 있었다. 그의 공격에는 신성력이 묻어 있다.

옵텍터는 신성력에 취약하고.

상성이 안 좋다.

애초에 잠깐 붙잡고 있으라고 불러낸 거다.

도망치려는 건 아니다. 그저 다음 수를 쓰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해서 그렇지.

[홀리 크랩 (AAA)]

-성그러운 집게발로 상대를 제압합니다.

-소환 시간이 걸립니다.

세 번째 성물을 사용했다.

서리 불꽃 검 다음으로 등급이 높은 성물.

그 능력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파아아앗!

보스가 있는 곳 아래, 거대한 소환진이 펼쳐졌고.

“덕춘아, 우리도 돕자!”

“궤엑!”

우리도 옵턱터를 도와 보스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내가 발목을 노리면 덕춘이가 산성침을 그의 눈에 뱉었고.

폭발을 일으켜 균형을 무너트리면 화염을 뱉어 그의 몸을 달구었다.

옵텍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스텟을 흡수합니다.]

[힘 +0.4]

[마력 +0.2]

[신성력 +0.6]

특수 능력을 발휘해 그의 스텟을 뺏어 댔다.

난 눈을 번쩍 떴다.

다른 건 몰라도 신성력까지 뽑아갈 수 있단 말이야?

“신성력 위주로 뽑아!”

“키키키킥!”

내 명령에 옵텍터들이 더욱 공들여 스텟을 뺏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신성력을 올릴 방법이 마땅치 않은데 이런 식으로 얻게 되면 나야 땡큐지.

“이, 이놈들이! 저리 가지 못할까!”

보스가 팔을 휘적거렸지만 옵텍터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빨대를 꽂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지 그가 힘껏 뛰어오르려는 순간.

[홀리 크랩이 소환됩니다!]

-콰아아악!

“어익!”

소환이 끝나며 거대한 집게발이 그를 붙잡았다.

워우. 그 크기와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이 어마어마하다.

나였다면 잡히는 게 아니라 반으로 쪼개졌을 거 같은데.

아무튼 이걸로 녀석은 리타이어. 도착 지점으로 달려가면 나의 승리다.

“좀만 쉬고 계십쇼!”

“게헤헤헤!”

약 올리듯 손가락을 까딱하며 내달렸다.

성물 최고다.

마그나로크를 엿 먹이면서 모아 둔 보람이 있네.

그렇게 무사히 19층을 클리어하는 듯했으나.

“넌 못 지나간다!”

“엉?”

내가 그를 얕본 듯했다.

새하얀 섬광이 밤을 몰아내더니.

[불의 기둥이 일어섭니다!]

-쩌저저적

-콰아아아앙!

성스러운 집게발이 터지며 그가 일어섰다.

온몸에는 하얗게 타오르는 불길이 일렁거렸으며.

“받아 보거라!”

그가 힘차게 대검을 내리긋는 순간.

-사아아아아악!

모든 것을 불태울 듯한 신성의 불길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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