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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92화 (92/740)

92화 그게 있었지

내가 내민 물건은 이거였다.

[홀리 크랩 (AAA)]

-얼음과 불의 신전의 성물

-교단의 인정을 받지 않아 봉인되어 있다.

19층 보스와 싸울 때 사용한 성물이다.

현재 남은 성물 중 가장 높은 등급.

이미 한 번 써 버려서 비활성화됐지만 등급에는 변화가 없다.

평소 성격이라면 덥석 받아 확인부터 할 텐데, 릴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의중을 살폈다.

“펠라인 세트?”

“어. 내가 입고 있는 흉갑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빨간 머리통을 꺼냈다.

다시 봐도 이름이 난센스다.

차라리 투구라고 하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거,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 아직 다섯 개의 세트 아이템이 더 있지.”

이번에 확실하게 알았다. 펠라인 세트는 NPC 혹은 필드 보스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릴카는 NPC를 상대하는 상인이고, 퀘스트 보상으로 NPC들의 호감을 걸 정도니 다른 NPC들과의 관계도 좋겠지.

여러모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다.

“난 세트를 모으는 중이고, 너랑 퀘스트도 하고 있지. 있으면 나한테 팔아.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조건 아닌가?”

AAA등급이면 S급 바로 아래.

S급 아이템을 주렁주렁 가지고 다니는 그녀에게도 충분히 상품 가치가 있다는 말씀.

나야 자격이 없어서 더는 쓸 수 없는 물건이지만.

물론 나중에 얼음의 인장을 얻어서 쓸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그게 언젠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지.

설사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신성력을 많이 먹어서 두 번은 못 쓴다.

그럴 바에는 다른 신성 아이템을 쓰는 게 낫다.

“으으음.”

릴카가 팔짱을 낀다.

고민하는 그녀에게 성물을 쥐여 줬다.

역시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지.

직접 살펴보면 좀 흥미가 동하려나.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했다.

“히알틴 유적의 성물이라. 꽤 괜찮은 물건이지. 봉인되어 있는 게 좀 걸리지만 그거야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 팔면 그만이고.”

직업병인가. 릴카가 감정을 하기 시작했다.

“상태 좋고. 사실 이제는 구하지도 못하는 귀품이기는 하지.”

오오. 그만큼 대단한 물건이었나.

점점 가능성이 높아진다.

서서히 욕심이 들어차는 그녀의 눈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음. 흠. 큼.

묘한 소리를 내며 물건을 살피던 릴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바라본다.

성물을 가지고 싶다는 의지가 여기까지 전해진다.

좋다. 어서 펠라인 세트를 내놓아라.

“살게! 근데 나 펠라인 세트 없어.”

아, 없냐.

그럼 내놔.

다시 성물을 가져가려 손을 뻗을 때.

“자, 잠깐 스톱! 대신 가지고 있는 NPC는 알아.”

릴카가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면 말이 달라지지.

그나저나 진짜로 NPC가 가지고 있을 줄이야.

골치 아파졌다.

NPC라고 다 안전지대에 있는 건 아니다.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필드에 있기도 하고, 유적에 있기도 하다.

마그나로크도 따지고 보면 NPC 아닌가.

“다른 부위는 모르겠고 펠라인의 오른팔을 가지고 있는 애는 알고 있어.”

몸통에 머리통에 이어 이번에는 오른팔인가.

가지가지 하네.

무슨 보물찾기처럼 뿌려 놨어.

일곱 개를 다 모으면 소원이라도 들어주나?

“좋아. 그럼 그 사람한테서 사서 나한테 줘.”

직접 찾기 귀찮다.

편하게 갈 수 있으면 편하게 가고 싶은 게 사람의 본질.

그녀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건데.

“에헤헤헤. 그게 좀 힘들어.”

안 되겠다, 역시 압수.

“아. 왜애애!”

다시 성물을 빼앗으려 하자 릴카가 성물을 끌어안는다.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저거 내 물건이다, 릴카 게 아니라.

그래도 내가 힘으로 되찾으면 신사답지 못한 거겠지.

“덕춘아, 산성침 좀 뱉어라.”

“궤에에.”

덕춘이가 기세 좋게 나선다.

숙녀 대 숙녀끼리 붙은 거니까 난 괜찮다.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봐 볼까.

“어쩔 수 없다구! 걔는 나랑 거래 안 한단 말이야.”

“잠깐, 스톱.”

손을 들어 덕춘이를 말렸다.

찍. 바닥에 침을 뱉는 덕춘이.

“거래를 안 한다고?”

“나라고 모든 NPC를 상대하는 건 아니야. 위험한 지역에 있는 애들도 있고, 나랑 사이 안 좋은 애들도 있어서.”

하긴, 모든 사람과 친할 수 없듯이 NPC도 모두와 우호적이지는 않나 보다.

만약 그 NPC가 릴카와 척진 사이라면 안 나서느니만 못할 거다.

난 계속 말해 보라며 턱을 까딱였다.

“따로 싸우거나 한 건 아니고 본인 영역에 집착이 심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대화도 제대로 못 하고 쫓겨났지.”

쫓겨나?

비록 만만해 보이고 철없고 왠지 모르게 화가 나며 얄미운 게 릴카지만 엄연히 NPC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존재이고 홀로 상인 역할을 한다는 걸 짐작해 봤을 때…….

‘얘도 엄청 강할 텐데?’

그런 릴카를 쫓아냈다라.

일단 엄청난 존재라는 건 알겠다.

무력적인 부분에서는 건들 수조차 없겠지.

즉, 어떤 수를 써서 설득을 하든가 거래를 해야 한다는 건데…….

상인인 릴카도 못한 걸 내가 할 수 있을까?

“그 NPC에 대한 정보 다 내놔. 위치, 성격, 이름, 기타 주변 환경 등등.”

“알려 주면 이거 줄 거야?”

릴카가 홀리 크랩을 흔들었고.

-탁!

덕춘이가 잽싸게 성물을 빼앗았다.

나이스 덕춘이.

역시 영물님이시다. 내 마음을 잘 알아.

난 보물 주머니를 뒤졌다.

“이건 너무 비싸고 이걸로 계산하지.”

[얼음의 고요함 (A)]

-얼음과 불의 신전의 성물.

-주변을 냉각시킵니다.

-모든 불을 꺼트립니다.

-비활성화되었습니다.

A급 성물.

이미 한 번 써 버리기도 했고, 내게는 별로 필요 없는 옵션을 가지고 있다.

냉각이니 뭐니 어차피 난 화기 내성이 상당한 수준이었고 주로 쓰는 스킬도 폭발이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쓸 일이 없다는 것.

“으으. A급이라니.”

“AAA급 성물 가지고 싶으면 직접 구해 오던가.”

찌릿. 날 노려보던 릴카가 주섬주섬 성물을 챙긴다.

선택지가 없다. 어차피 그녀가 펠라인 세트를 가져오는 건 불가능하니.

딱히 필요도 없는 정보로 A급 성물을 얻는 쪽이 남는 장사다.

“알겠어. 분명히 말하지만 난 정보만 전달할 뿐이야. 이후에는 알아서 해야 해. 못 도와줘.”

“물론이지.”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 봐야 한다.

설사 죽더라도 무한 코인이 있으니 계속 도전해야지.

혹시 아는가 질려서 그냥 줄지.

“위치는 간단해. 어차피 네가 가야 하는 곳이거든.”

“내가 가야 하는 곳?”

난 턱을 긁었고.

“내 퀘스트 깨야지! 에헤헤. 이번에도 파이팅 하라구.”

아, 그거.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2)]

-애꾸 예티의 눈물 (0/30)

-눈의 정령의 화관 (0/1)

-신뢰를 얻었기에 다른 NPC의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보상: 오델토의 반지 (B), NPC들의 관심.

이놈의 강제 퀘스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그나마 이번에는 다른 퀘스트도 같이 할 수 있는 게 다행인가.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릴카가 말을 이었다.

“애꾸 예티를 잡으려면 24층에 가야 하잖아. 거기에 그 NPC가 있어.”

24층. 그리 높은 층은 아니다.

지금 내 스펙이라면 길을 뚫는 것 정도는 충분하겠지.

기껏해야 2성급 몬스터니까.

“24층은 설산 지대인데 말이야. 애꾸 예티도 그렇고 복슬복슬한 애들이 많거든? 죄다 눈투성이라 길이 애매하기는 한데…….”

설명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나무상자를 끌어다 앉았다.

릴카도 마찬가지.

난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 * *

약 4시간에 걸친 대화가 끝나고 난 여관을 찾았다.

릴카의 퀘스트도 있는 만큼 10일 정도 묵기로 계약했다.

“궤엑! 궤에에에!”

신나서 펄쩍 뛰는 덕춘이.

그럴 만한 것이 내가 계약한 방은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침대도 킹사이즈고, 조명도 은은하니 분위기 있다.

욕조도 있고 테라스 쪽에는 자그마한 풀장도 있었다.

가격이 세서 문제지.

“덕춘이, 이걸로 됐지?”

“궤에에.”

난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릴카한테 NPC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약속대로 덕춘이를 만지게 해 줬다.

녀석도 동의했던 부분이라 날뛰지는 않았다는 게 다행.

나한테는 안 다행.

릴카한테 쓰다듬어지면서 내 뺨을 얼마나 때리던지.

언제나 분풀이 대상은 만만한 나였다.

지나간 일은 신경 끄고.

“확인해 볼까.”

여관도 잡았겠다. 느긋하게 펠라인 세트를 살펴볼 생각이다.

19층에서 올라온 뒤 바로 릴카를 찾아 대서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인벤토리.”

난 투구를 꺼냈다.

“쨍한 빨간색이네, 진짜.”

어디 히어로 만화에서나 볼 법한 색상이다.

색상은 이래도 생긴 건 제법 멋들어진다.

그 부조화 때문에 더욱 해괴한 스타일이 되어 버렸지만…….

-파앗!

투구를 착용했다.

그와 동시에 흉갑에서 노란색 빛이 뿜어져 나온다.

투구에서도 붉은빛이 터져 나왔고.

세트 아이템끼리 만났다는 거겠지.

그럼 정보를 봐 보자.

숨겨진 것까지 모조리.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권능을 통해 드러난 옵션들.

“워우.”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펠라인의 노란 몸통 (E)]

-방어력 +3

-체력 +1

-세트 (2/7)

-봉인이 약간 풀렸다.

일단 흉갑의 스펙은 다시 봐도 쓰레기다.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옵션에 등급도 E급.

그리고 이번에 얻은 투구는.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 (C)]

-힘 +11

-민첩 +7

-체력 +9

-방어력 +18

-세트 (2/7)

-본래의 힘의 일부를 되찾는다.

역시나 C급 장비 평균보다 아래의 스펙을 자랑했다.

다른 특수 옵션이 있느냐?

없다.

그냥 없다.

색깔도 빨간색으로 화려한데 성능까지 구리다.

여기까지만 보면 줘도 안 가질 쓰레기 템이지만.

[펠라인 세트 효과! (2/7)]

-올 스텟 +10

-패시브 스킬, 쾌적 (D) 적용.

-자가 수복 기능 활성화.

-완전 파괴 불가.

-펠라인 세트의 방어력이 통합됩니다.

세트 효과가 미쳤다.

올 스텟 +10.

힘, 민첩, 체력, 마력. 나 같은 경우에는 신성력까지 스텟에 포함되니 총 50 스텟이 올라간 것과 마찬가지.

준B급 아이템을 착용한 것과 비슷한 수준의 상승량이다.

그뿐이랴. 쾌적 옵션까지 붙었다. 좀 더 편하게 장비를 착용할 수 있다는 것.

방어력 통합도 좋은 효과다.

원래라면 파츠마다 방어력이 따로 적용되지만 펠라인 세트에 한해서는.

“노랑 몸통이 방어력 3, 투구가 18. 합치면 21.”

흉갑과 투구 모두 방어력 21이 된다는 말이랑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건 이거다.

“자가 수리에 완전 파괴 불가.”

사실상 내구도가 무한이라는 뜻.

사기다.

고작 일곱 개의 세트 아이템 중에 두 개만 모였을 뿐이다.

만약 모든 세트가 모인다면?

“말도 안 되는 효과가 적용되겠는데.”

역시 펠라인 세트를 모으기로 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흐흐. 웃음을 흘리며 커뮤니티를 켰다.

멤버들이 뭐 하는지도 살펴보고, 20층에 대한 정보도 모아 볼 생각.

“오, 냥펀 16층까지 올라왔네?”

[냥냥펀치]: 오, 님들 16층에 나오는 불의 정령 앎?

[정수리 핥짝]: 그 똥강아지들?

[냥냥펀치]: ㅇㅇ. 걔네들 불사초 이파리 주면 꼬리 흔들고 배 까고 난리 남.

[정수리 핥짝]: …? 몇 대 쥐어박으니까 알아서 꼬리 말고 눕던데?

[냥냥펀치]: 아니; 그건 굴복이고…….

[니머리 탈모]: 우우! 동물 학대범! 나가 죽어라!

[정수리 핥짝]: …그렇다고 너를 학대할 수는 없잖아^^.

[니머리 탈모]: 우우! 정령이 무슨 동물이냐! 핥짝이 최고!

[냥냥펀치]: 잌ㅋㅋㅋㅋ 태세 변환ㅋㅋㅋㅋㅋㅋ.

[쁘띠공듀]: 그의 태세변환은 벗겨지는 머리보다 빠르다……,

[니머리 탈모]: 고, 공듀! 나 대머리 아니… 하. 이거 닉넴 못 바꾸나?

[냥냥펀치]: 응 못 바꿔ㅎㅎ.

[정수리 핥짝]: 그러게 처음부터 잘 지었어야지 ㅉㅉ.

놀면서 정보를 뿌려 대고 있다.

16층에 나오는 몬스터는 자연 발생 불의 정령 파이로그.

그놈들과 싸우지 않고 클리어하는 방법을 은연중에 알려 준다.

조심성이 없다기보다는 내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같은데.

“좋은 변화야.”

이런 식으로 정보가 풀리면 탑을 오르는 사람들의 생존율이 올라갈 테니까.

우리뿐만이 아니다. 분위기가 바뀐 건지 다른 사람들도 정보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가끔 분탕질하는 놈도 있고, 거짓 정보를 올려 엿 먹이는 놈들도 있는 게 문제지만.

그중에 몇 명은 정체가 밝혀져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나.

남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할 거면 지 목숨도 걸어야지. 불쌍하지도 않다.

난 키득거리며 멤버들의 대화를 지켜봤고.

[정수리 핥짝]: 암튼 조심히 올라와라. 20층은 내가 평정해 둘 테니까.

[냥냥펀치]: 20층 정복 가냥?

[니머리 탈모]: 아, 또 뭔 사고 치려고

[정수리 핥짝]: 사고는 네 전문이고요, 탈모 쉨.

[니머리 탈모]: …? 난 항상 진중하고 조심스러우며 신중합니다만?

[정수리 핥짝]: 그래서 투기장에서 2등 하셨나 보네요^^. 패배자 녀석 난 1등을 하마.

“1등?”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20층을 평정한다. 1등을 한다.

그게 무슨 소리…….

“아.”

20층에는 그게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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