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양피지 조각
“저거 사기 아니야?!”
투구를 바닥에 던진 핥짝이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무슨 수로… 구역마다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는 정해져 있다.
웨이브를 막아 내는 순서에 따라, 지키는 건물들의 파손도에 따라 추가 점수가 붙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로 클리어했다고. 건물은 부서지지도 않았고.”
추가 점수마저도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지? 상세 정보를 봐도 서쪽 구역의 생존자가 더 많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핥짝이의 승리가 분명했지만 그녀는 몰랐다.
조현수가 아예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 점수를 모아 댔다는 걸.
누군가는 사기라며, 부정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이겠지만 시스템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검에 붙은 효과로 진행한 일이었으니까.
“하아. 진짜. 이게 뭐야.”
짜증이 올라온 핥짝이가 머리를 쓸어 넘었다.
쇄골을 살짝 넘기는 길이. 잘라야지 잘라야지 하다가 놔둔 게 벌써 이만큼 자랐다.
손목에 차고 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핥짝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분하다!
“이블아이 녀석. 다음에 만나면 무조건 이긴다. 결국에는 내가 다 1위였어.”
붉은 입술을 깨문 핥짝이가 각오를 다졌다.
탑 밖에 있을 때도 그랬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팀원들을 격려하고, 슈퍼 플레이를 반복해 기어이 올림픽 여자 배구 금메달을 따게 만든 장본인.
한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의 거신, 이소연이 핥짝이의 정체였다.
신장 198센티미터. 어지간한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키와 톱급 선수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퍼포먼스.
경력도 심상치 않았다. 중학생 시절 아시안 게임 사격 종목 1위. 이후 잠깐 아마추어 양궁 선수로 활동했고,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배구로 종목을 바꿔 각종 대회를 휩쓴 천재가 이소연이었으니까.
스포츠계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사였으며, 타고난 미모와 비율로 모델 제의를 받기도 했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씨, 탈모맨 놀려야 되는데. 1등 한다고 큰소리 빵빵 쳐 놨는데!”
핥짝이가 울상을 짓는다.
커뮤니티 들어가면 친구들이 뭐라 할지 벌써부터 선하다.
신나게 물고 뜯고 맛보면서 놀려 대겠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투구를 주워 다시 뒤집어쓴다.
이제 곧 디펜스 이벤트가 완전히 종료된다.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던 비참가자들과 NPC들이 돌아온다는 이야기.
쁘띠공듀와 탈모맨도 그렇지만 핥짝이 역시 대형 길드와 척을 진 사이.
얼굴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아. 아.”
투구를 쓴 핥짝이가 목소리를 테스트한다.
굵은 목소리가 울린다.
그녀가 쓰고 있는 투구는 아티팩트. 음성 변조 효과가 있어 성별을 속이기에 적당한 아이템이었다.
[디펜스 이벤트가 종료됩니다.]
[랭킹 순위]
-1위 이블아이 (점수: 78,638)
-2위 1등 하는 거 보여 준다 탈모 쉐키야 (점수: 53,713)
-3위 길명보_무학성 (점수: 23,546)
-4위 소담소담 (점수: 21,0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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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점수 더 올랐네. 와, 얄미워.”
이블아이의 점수를 확인한 핥짝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탈모맨 이후로 때려 주고 싶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애꿎은 땅만 걷어찼다.
[순위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모든 경계가 사라집니다.]
[이동되었던 비참가자 및 NPC가 귀환합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그녀의 앞에 이벤트 보상이 떨어졌고 보물 주머니에 챙겨 넣은 핥짝이가 몸을 돌렸다.
이벤트는 끝났다. 아쉬움은 남지만 미련은 가지지 말자.
경기는 정당하게.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쏟고 깔끔하게 받아들이는 게 맞으니까.
스스로 달래며 걸음을 재촉할 때.
“하, 핥짝이 님 맞으십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여기 물 좀 드시겠어요?”
일단의 무리가 핥짝이를 향해 달려왔다.
양손에 마실 것과 간식거리, 땀을 닦을 수건과 앉을 의자를 든 사람들.
몇 명은 플랜 카드까지 들고 있다.
축! 디펜스 이벤트 2등!
“…2등.”
핥짝이의 시선이 2등에 꽂혔다.
“하하하! 대단하십니다. 산군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열심히 뛰어왔는지 땀을 흘리는 남자가 웃는 얼굴로 물을 건넸다.
산군? 6층에서 박살 냈던 길드 아닌가?
핥짝이의 표정이 묘해진다.
‘얘네가 왜 살갑게 굴지? 기습인가?’
눈을 돌리자 다른 이들의 길드 마크도 보인다.
이클립스와 다성. 10층 안전지대에서 탈모맨을 공격했던 곳이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핥짝이가 자세를 고쳤다.
디펜스를 하느라 지치기는 했지만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자, 잠깐만요. 싸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저 그동안의 오해를 풀고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진심입니다! 무기도 안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까!”
결백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는 길드원들.
그들 말마따나 무기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장비도 기본적인 방어구만 차고 있을 뿐.
‘이건 또 하자는 수작이지?’
단체로 맛이 가기라도 한 걸까?
핥짝이는 의심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말이 맞았다.
30층에 있는 루키들, 김성모와 이하영, 김창후가 지시한 일이었으니까.
쁘띠공듀가 판매하는 카메라와 사진 등록은 대형 길드들이 탐내 하는 스킬.
하지만 가뜩이나 쁘띠공듀와 사이가 안 좋은 산군과 이클립스, 다성은 구입할 방도가 없었다.
다른 대형 길드의 비난을 받으며 입지마저 흔들릴 지경.
그래서 선택한 전략이 이것이었다.
“헤헤헤.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저희와 좋은 관계를 좀.”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의 여정도 순탄하길 바라는 이클립스의 성의입니다.”
“다성 길드 역시 아무런 대가 없는 지원을 약속할 예정인데…….”
“모쪼록 쁘띠공듀에게도 우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달해 주셨으면…….”
쁘띠공듀와 사이가 나쁘다?
가까운 사이인 탈모맨과도 싸운 전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나마 마찰이 적었던 핥짝이의 환심을 산다.
핥짝이 역시 쁘띠공듀와 막역한 사이. 자고로 친구의 친구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법.
핥짝이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온갖 스포츠로 심리전에 익숙하고 자신을 다잡을 줄 아는 핥짝이에게는 뻔히 보이는 수법이었지만.
이것만 해도 아니꼬운데…….
“무소속으로 디펜스 이벤트 2등이라니. 이건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럼요. 그 대단한 무학성도 3등밖에 못했는데 2등이라니! 존경합니다!”
“저 같은 무말랭이는 2등 근처도 못 갔었습니다!”
이놈들은 자꾸 2등을 언급한다!
본인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굽실대는 길드원들.
결국 핥짝이의 스위치가 켜졌고.
“2등, 그놈의 2등! 그래, 나 2등이다 어쩔래!”
애써 진정시켰던 마음이 터졌다.
* * *
디펜스 이벤트가 끝난 뒤의 안전지대는 분주했다.
서쪽과 서남쪽 구역은 무너진 건물이 없었으나 다른 구역은 아니었다.
건물을 바리케이드로 쓴 만큼 파괴된 건축물은 수도 없이 많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퀘스트로 한몫 벌고자 하는 이들이 몰렸다.
덕분에 가뜩이나 사람이 적은 서쪽 구역은 더 사람이 없었고.
“고마워요. 정말 약속을 지켜 주시다니.”
“에이. 고맙다는 말만 몇 번째예요. 그냥 저 좋으려고 한 거라니까요.”
난 벨라의 분식점에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를 위해 가게 문까지 닫고 식사를 대접해 주는 벨라.
왜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칭했느냐.
“벨라, 한 그릇 더!”
“궤에에에!”
덕춘이뿐만 아니라 릴카까지 분식점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설마 또 외상을 하려는가 싶어서 쫓아내려고도 했는데.
“에헤헤. 안 무너져서 다행이야. 돈 나갈 일 굳었다!”
릴카가 온 목적은 의외로 좋았다.
벨라의 분식점이 무너지면 그동안 외상한 음식값에 이자를 더해 재건축할 자금을 대주려 했다나.
외상도 그래서 일부로 했다고. 그런 식으로 안 하면 벨라가 절대 돈을 받지 않으니까.
하는 짓이 가벼워서 그렇지 생각은 나름 깊은 걸지도 모르…….
“아! 내 거 먹지 말라고!”
“흥이다! 먼저 먹는 게, 꿱!”
내 앞접시에 있는 새우튀김을 탐내는 릴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디 감히 새우튀김을.
“싸우지 말고 많이 먹어요. 재료 많아요.”
후훗 웃으며 튀김을 더 내놓는 벨라.
내놓기가 무섭게 덕춘이가 받아먹는다.
“야!”
“그에?”
왜? 나도 때릴 거야? 뒈질래?
덕춘이가 눈빛으로 말했다.
스윽 올라갔던 손이 다시 내려간다.
우, 우리 덕춘이는 성장기잖아. 많이 먹고 쑥쑥 커야지. 이미 5인분은 먹은 거 같긴 한데 한참 모자라지. 그럼 그럼.
“흠흠.”
그래. 먹는 거로 치사하게 굴지 말자.
난 순순히 새우튀김을 릴카에게 넘겼고.
“이히히히.”
머리를 문지른 릴카가 냉큼 입에 넣었다.
난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커뮤니티를 켰다.
저 둘은 아닌 거 같지만 난 배가 좀 차서.
“역시 떠들썩하네.”
커뮤니티는 불타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속보! 이블아이 20층 디펜스 이벤트 출몰!
-핥짝이 꺾고 1등 쟁취!
-이블아이, 그는 쁘띠공듀 멤버 킬러인가! 니머리 탈모에 이어 정수리 핥짝까지 참패!
10층 투기장 이벤트 이후 잠잠하던 이블아이가 나타나 또다시 이벤트를 휩쓸었으니 화제가 될 만하다.
그것도 핥짝이와 맞붙어서 승리했으니.
-정수리 핥짝, 서남쪽 구역 홀로 막아 낸 것으로 알려져.
-같은 구역 참가자의 말에 따르면 신들린 무위였다고…….
-쁘띠공듀 멤버들 한 명씩 모습 드러내나?
-모습 드러낸 니머리 탈모와 정수리 핥짝, 둘이 이름 합치면 정수리 탈모…….
그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핥짝이의 등장도 이슈가 되고 있었다.
저마다 누가 강하네, 정체가 뭐네 떠들어 댔지만 대부분 지라시와 근거 없는 주장뿐.
남들이야 뭐라 하던 우리 멤버들은 서로 놀리기 바빴다.
[니머리 탈모]: ???) 내가 1등 하는 거 보여 줌. 엌ㅋㅋㅋㅋㅋㅋㅋㅋ
[냥냥펀치]: 1등 같은 2등ㅋㅋㅋㅋㅋㅋ. 이 집 푸짐하넼ㅋㅋㅋㅋ
[정수리 핥짝]: …하지 마라.
[니머리 탈모]: 해지 뫄아아아, 해지 말라궈어어.
[냥냥펀치]: 20층 재패하겠다────못 했다 미안하다ㅋㅋㅋㅋㅋㅋ
[정수리 핥짝]: 이게 다 이블아이 그 ㅅㄲ 때문이야! 걔가 사기 쳤다니까?
[니머리 탈모]: 현실을 받아들이거라. 추하다…….
[정수리 핥짝]: 아오 ㅅㅂ! 이블아이 다음에 만나면 찢어 버린다!
[쁘띠공듀]: 아니, 왜 찢…….
1등 하지 못한 것에 상당히 화가 난 모양.
억울하겠지. 혼자 살아남아 그 많은 몬스터를 잡았는데 2등이니까.
그러게 아이템을 잘 골랐어야지.
여기까지는 평소의 대화였지만 이후에는 달랐다.
[정수리 핥짝]: 그리고 길드 얘네 왜 이리 달라붙냐 진짜. 아 ㅅㅂ, 꺼지라고요
길드가 달라붙는다?
어느 길드가? 핥짝이를 영입하고 싶어 하는 건가?
[쁘띠공듀]: 스카우트 당했어요?
[정수리 핥짝]: 몰러, 산군이랑 기타 등등이 엄청 달라붙던데 이야기 좀 하자고
[니머리 탈모]: …? 산군이면 너한테 뚜드려 맞은 애들 아닌가? 자존심도 없나 보네.
[냥냥펀치]: 설마 들어갔냥?
[정수리 핥짝]: 미쳤다고 들어가냐. 걍 ㄲㅈ라고 했지. 왜 자꾸 2등, 2등 거리는… 아오!
“대형 길드가 핥짝이랑 접촉했구만.”
보아하니 딱히 위해를 가한 거 같지는 않다.
난 가만히 핥짝이가 더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렸고.
[정수리 핥짝]: 걍 나보고 공듀한테 잘 좀 이야기해 달라더라. 스킬북 좀 팔아 달라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파는 스킬북이 목적. 핥짝이를 꼬드겨서 거래를 틀 모양이었는데 보다시피 씨알도 안 먹혔다.
[정수리 핥짝]: 암튼 난 바로 위로 간다. 이놈들 자꾸 달라붙어서 스트레스 받음, ㅅㄱ.
위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핥짝이는 말을 마쳤다.
급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20층에서 더 얻을 게 없기는 하지.”
기껏해야 수복 퀘스트로 포인트 버는 게 전부.
돈이 없다면 할 만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그 시간에 위로 올라가 강해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몬스터 등급도 올라가니 사냥으로 버는 돈도 늘어날 거고.
나는 어떻게 할까.
“그래. 놀면 뭐 하냐. 올라가야지.”
그전에.
“릴카, 물어볼 게 좀 있는데.”
방향성은 확실히 잡고 가자.
보물 주머니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전에 핥짝이가 내게 줬던 물건.
[정체불명의 양피지 조각 (?)]
-무언가의 일부 같다.
-???
“이게 뭔지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