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24층의 NPC
치명적인 포즈의 효과는 대단했다.
한 번에 시선을 끌어모으는 힘.
옆에서 자세를 취하던 녀석들까지 흠칫 놀라며 날 바라본다.
뿜어져 나오는 마성. 정제된 자신감과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이 흘러나온다.
-우우우우
-둥! 둥!
웅장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현악기의 선율.
이어 심장을 뛰게 만드는 타악기의 울림.
난 기본적이지만 담담한 맛이 있는 구애의 춤을 추기 시작했고.
-두두두둥!
-쿵! 쿵! 쿵!
이어 음악이 격해지는 타이밍.
[파이어 (E) Lv.1]
불길을 터트렸다.
경쟁자를 공격하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데미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내가 노리는 건 단 하나.
특수 효과였다.
“쿠오오오오!”
“우오! 우오오오!”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단순 춤 실력으로는 다른 놈들을 이기지 못한다.
분하지만 사실인 걸 어쩔까. 하지만 내게는 스킬이 있다.
놈들의 실력이 좋아 봤자 이팩트 펑펑 터지는 스킬보다 눈길을 끌 수 있을까?
아니, 절대 못 한다.
“흡! 핫차!”
무아지경으로 춤을 췄다.
솔직히 내가 뭘 어떻게 추는지도 모르겠다.
구애의 춤인지 막춤인지 알게 뭐냐.
최대한 박력 있게. 잘은 모르겠지만 멋져 보이게!
혼신의 힘을 다해 손과 발을 뻗었다.
그때마다 불길이 솟구치고 물이 요동쳤으며.
[디그 (E) Lv.1]
[워터 (E) Lv.1]
[파이터 (E) Lv.1]
디그로 순간적으로 몸을 숨기는 동시에 워터와 파이어 조합으로 안개를 생성.
점프를 하며 화려한 등장.
[버프 다이스 (B) Lv.3]
[1]
[발광]
버프 다이스까지 사용해 임팩트를 주었다.
발광. 말 그대로 빛이 난다.
그리 좋은 효과는 아니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은 피와 살이 터지는 결투가 아니니까.
황금색으로 빛나는 내 모습에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몇몇 참가자는 본인의 춤도 잊은 채 날 바라봤고, 어떤 놈은 질투 어린 눈으로 날 노려봤다.
-쿵! 쿠구궁!
-우우우웅!
음악이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화면을 흘낏 확인했다.
3등!
이미 던전 클리어는 안정권에 돌입했다.
여기서 만족할 수도 있었지만.
‘할 거면 1등을 해야지.’
난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내 모든 것을 보여 주마.
음악에 맞춰 무언가를 갈구하는 감정을 표현했다.
그 모습에서 무엇을 본 걸까.
몇몇 예티들이 눈물을 흘렸다.
[감동을 느낀 애꾸 예티가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눈물을 얻는 거였구만.
몰랐던 사실이다.
얼마나 얻은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지.
노래가 끝나간다.
최고조로 올라갔던 음악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프로즌 브레이크 (A) Lv.7]
난 A급 스킬을 사용했다.
주변이 얼어붙는다. 바닥에 번지는 서리.
거대한 얼음이 나를 가둔다.
뜨겁게 치솟았던 모든 동작들이 일시에 얼어붙는다.
이 모든 것이 허사였다는 듯 느껴지는 허탈감.
그 모든 것을 담았다.
어떻게?
[치명적인 포즈 (E) Lv.1]
스킬로.
말은 통하지 않는다. 놈들의 생활 양식도, 취향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은 전해질 터.
여기저기서 둘리는 숨 막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끝나는 음악.
무대는 끝이 났지만 여전히 나를 향한 시선은 그대로였고.
-쩌적, 쩌저저적
모두의 관심이 내게 쏠리는 타이밍.
얼음에 균열이 갔다.
-콰아아앙!
얼음 조각이 비산하며 빛을 뿌린다.
압도적인 존재감.
산란하는 빛 가운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난 양손을 벌렸다.
모든 시련을 극복한 자의 마지막 모습!
음악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숨 막히는 정적.
“우오오오오!”
“콰오오오오!”
그건 이내 환호성이 되어 나를 덮쳤으니까.
기립 박수.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마다 떨어지는 영롱한 자태의 눈물.
[애꾸 예티 페스티벌 우승!]
[경이로운 업적에 칭호가 부여됩니다!]
[던전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만족했다.
* * *
던전이 클리어되고.
뒤늦게 현타가 찾아왔다.
나 뭐 한 거지. 몬스터랑 엉덩이나 흔들고.
혹시나 공략 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사진도 몇 장 찍어 놨었는데.
“…이건 삭제다. 무조건 삭제야.”
당시에는 분위기에 취해 몰랐지만 난 정말 춤에 재능이 없었다.
카메라 스킬에 저장된 사진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것이 정말. 추하다 못해 끔찍할 지경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나의 자존감을 위해 이 사진들을 지우기로 했다.
“게헥! 크헤헤헤헥!”
덕춘이는 바닥을 뒹굴며 웃어 댔지만… 왜 이렇게 얄미울까.
됐다. 클리어했으면 된 거지.
동굴 앞으로 전송되면서 던전 클리어 보상도 함께 떨어졌다.
보물 지도야 그렇다 치고.
“이게 눈물이었군.”
[애꾸 예티의 눈물]
-애꾸 예티가 감동에 겨워 흘려야 얻을 수 있는 눈물.
-냉기를 지녔습니다.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보석으로도 인기가 많습니다.
푸르고 투명한 보석.
기껏해야 손톱만 한 사이즈인데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그런 게 오십여 개.
릴카의 퀘스트에 필요한 걸 채우고도 남을 수준이다.
“다행이네. 수가 모자르면 다시 도전했어야 했을 텐데.”
릴카가 말하지 않았던가.
24층에 사는 NPC는 극히 경계심이 많고 자신의 영역에 예민하다고.
출입조차 힘들었다고 했다. 그나마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보석을 선물로 줬다고 했었지.”
설산에 사는 녀석의 이름은 알리오스.
그가 관심을 보이는 건 보석과 꽃, 드레스뿐이었다.
기타 귀여운 인형이나 장신구에도 혹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면 너무 잡다해서.
“드레스는 왜 관심을 보이는 건지 모르겠군.”
취향이 그쪽인가?
사실 남이 뭘 입든 취향이 어떻든 관심은 없다.
개인 자유지 뭐. 남한테 강요만 안 하면.
“나야 딴 게 없으니 이걸로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말이지.”
설산에서 꽃을 구할 수도 없고. 상점창에서 사자니 마땅한 게 없다.
대부분 재료용으로 쓰이는 거라 생화가 드물기도 하고 꽃 보따리나 꽃다발은 따로 팔지도 않는다.
드레스?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있나.
애초에 그 사람이 원하는 사이즈가 몇인지도 모른다.
릴카도 그래서 무난한 보석으로 승부를 본 거고.
난 애꾸 예티의 눈물이 든 주머니를 잘 챙겼다.
보상은 아직 남았다.
우선 상금으로 얻은 5,000포인트.
요즘 만 단위 포인트를 많이 얻어서 그런지 큰 감흥은 없었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다음은 스킬북인데.
[구애의 춤 (B)]
-구애의 춤을 춥니다.
-종족, 성별을 뛰어 넘어 상대방을 홀려 보세요!
“스킬로 얻을 줄이야.”
이건 봉인이다. 어째서 이게 B등급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들떠보기도 싫다.
쓸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아닌가. 쓸 일이 생기려나.
이번 던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한 과제를 줬다.
다음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 챙겨 두기는 하자. 뭣하면 나중에 스킬 합성 재료로 써도 되고.
구애의 춤을 익힌 뒤 남은 것들을 살폈다.
원래 주어진 보상은 이게 전부다.
다만 난 페스티벌에서 우승했기에 추가 보상이 더 주어졌다.
[댄싱 마스터의 왕관 (B)]
-모두의 아이돌! 당신의 존재를 뽐내세요!
-힘 +8
-민첩 +12
-체력 +10
-마력 +18
-‘유연한 움직임 (C)’ 적용.
-당신은 이미 모두의 위에서 빛난 적이 있습니다.
-왕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앙증맞은 왕관.
착용하는 것만으로 관종이 될 법한 디자인.
다른 능력치는 모르겠지만 마력 수치가 비상하게 높다.
C급 스킬인 유연한 움직임까지. 움직임에 보정치가 들어가는 만큼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잡템이면 갖다 버리겠는데 이건 못 버리겠다.”
“그에에에.”
동의한다며 덕춘이가 울었다.
능력치도 능력친데, 왕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게 특히 걸린다.
17층, 히알틴 유적에서 뺏어온 마그나로크의 왕관에도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왕의 자격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아닐까.
그래. 아이템이 성능만 좋으면 장땡이지.
난 왕관을 머리에 썼고.
“오?”
확실히 몸이 유연해진 걸 느꼈다.
좀 더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전투에 좋은 영향을 줄 것 같다.
자. 왕관까지 살폈고 남은 건 하난데.
“칭호를 얻을 줄이야.”
꽤 값진 보상을 추가로 얻었다.
[불과 춤의 화신-칭호]
-화려한 불길! 격정적인 춤!
-모닥불을 피우고 춤을 추면 버프가 생성됩니다.
특수 효과가 주어지는 호칭이다.
밤을 부르는 자도 비슷하지. 밤이 되면 능력치가 올라가니까.
정확히 어떤 버프인지는 모르겠다. 신체 능력 향상? 아니면 회복?
써 보면 알겠지.
[파이어 (E) Lv.1]
난 불을 만들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원시인이 된 것 같은데.
[기분이 좋아집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줄어듭니다.]
[회복 효과가 상승합니다.]
[스텟이 잠시 동안 상승합니다.]
“효과 좋네.”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달리 효과는 확실했다.
이 정도면 종합 버프 아닌가?
던전에서 엉덩이를 흔든 가치가 있다. 이 정도면 나의 수치심과 바꿀 만하지.
“그에에에.”
덕춘이가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무시했다. 칭호 귀한 줄 모르고 이놈이.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
명예? 폼? 돈?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생존이다. 부자든 영웅이든 권력자든 죽으면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 효과는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좋았어.”
단 한 번의 던전 클리어지만 얻은 게 많다.
자신감도 얻었겠다, NPC를 만나러 가 볼까.
이 정도면 뭘 해도 할 수 있겠지.
한 손에는 예티의 눈물이 든 주머니를, 다른 한 손에는 검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후오오오오오
눈보라가 쉬지 않고 부는 산의 정상.
접근 자체를 거부하듯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수많은 몬스터로 뒤덮인 곳이다.
보통이라면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곳.
푹푹 빠지는 발을 열심히 움직여 산을 탔다.
대략 5시간.
걷고 사냥하고 모닥불을 만들어 몸을 녹이고, 다시 걷고 사냥하고를 반복한 끝에 정상 코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미쳤네, 여기.”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핏자국이 이어졌다.
그만큼 덤벼든 몬스터가 많았던 것. 심지어 중간에 3성급 몬스터인 자이언트 예티까지 있었다.
20층대에도 3성급 몬스터가 나온다기는 하지만 후반부에나 종종 모습을 보인다고 했었는데.
확실히 범상치 않은 곳이다. 덕분에 클리어 조건은 완수했지만.
“그에에에에.”
덕춘이가 귀를 잡아당기며 경고한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내 앞으로 그어진 하나의 선.
경계를 표시하듯 정상을 기준으로 빙 둘러져 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눈에도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여길 넘어서는 순간부터 알리오스의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모닥불을 피워 컨디션을 조절했다.
버프가 적용되어 몸이 한결 편해진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터억
경계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배경이 바뀌었다.
여전히 설산인 건 분명했지만.
“눈보라가 치지 않아?”
더 이상의 눈폭풍은 없었다.
곳곳에 눈이 녹아 드러난 땅에는 생명력 질긴 잡초와 꽃 몇 개가 자라 있기까지 했다.
한결 따뜻해진 온도에 긴장이 풀어지려던 때.
“이곳은 나의 영역. 침입자는 당장 나가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아리 처럼 사방에서 울린다. 어디서 말 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살기는 진짜였다.
그동안의 실전이 아니었다면 주저 앉았을지도 모를 강력한 압박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허리를 폈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알리오스.”
“내 이름을 알고 있군,”
다시금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가까워졌다. 위치는 아직 모르겠다.
“호기심이 동하기는 하나 나는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다. 지금이라도 나가면 목숨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그냥은 안 되나. 어쩔 수 없지.
주머니에서 애꾸 예티의 눈물을 꺼냈다.
“잠깐이면 됩니다. 선물도 가지고 왔어요.”
대답이 없다. 고민 중인가?
약간의 희망을 가지며 그가 반응하기를 기다렸고.
“난 분명히 경고했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언제? 급히 옆으로 몸을 돌렸지만.
-서걱!
가슴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어두워졌고.
“선물은 잘 받도록 하지.”
[사망했습니다.]
난 20층 안전지대에서 눈을 떴다.
죽은 건가. 어떻게 당한 거지?
반응은 커녕 얼굴도 못 봤다. 이게 NPC와 나의 격차인가.
그래도 그렇지 바로 죽이냐. 성질 한번 더럽…….
잠깐만.
“내 주머니 어디 갔어?”
애꾸 예티의 눈물이 들어 있던 주머니가 사라져 있었다.
남은 거라고는 손에 쥐고 있던 것 하나.
미친놈이 주머니째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