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빈칸 구역 진입
난 물을 가두고 있는 장막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알리오스가 준 권능 덕일까. 궤도는 깔끔했고 시원하게 장막을 갈라낼 수 있었다.
여기서 연달아.
-촤악!
-찌이이익!
두 번의 연격을 내지르자.
[장막이 찢어집니다!]
너덜너덜해진 장막이 기능을 잃었고, 통로를 가득 채우던 물이 일제히 쏟아져나 왔다.
이대로 휩쓸리면 안 된다.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건 사양이니까.
발을 박찼다. 노리는 건 천장.
천장 모서리에 팔다리를 뻗은 채로 버텼다. 팔과 다리에 힘을 줬다. 강력한 힘으로 어찌어찌 버틸 수는 있었지만.
-스륵, 스르르
마찰력의 한계인가. 조금씩 몸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안 된다. 떨어져서 휩쓸리면 장막을 끊은 의미가 없다.
사이 좋게 몬스터들이랑 뒹굴면서 떠내려갈 테니까.
뭔가 방법이 없나, 이대로 갔다가는!
-촵!
“그, 그에에에.”
떨어지려는 순간, 덕춘이가 천장을 향해 혓바닥을 던졌다.
찰싹 달라붙는 혓바닥이 미끄러지던 몸을 지탱한다.
역시 영물! 멋지다! 자랑스럽다!
내 환호에 덕춘이가 엄지를 든다.
그런 우리 밑으로.
“카아아악!”
“카학!”
가장 먼저 빠져나온 워터픽이 흉악한 이빨을 딱딱거리며 펄떡였다.
철갑문어도 마찬가지. 어떻게든 버텨 보겠다고 통로 입구를 촉수로 막았으나.
“우오오오!”
흥분한 워터픽이 이빨이 나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어 대는 통에 실패하고 말았다.
사이 좋게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녀석들.
이내 한동안 쏟아지던 물이 멈추고.
-퍼덕퍼덕!
-파다다닥!
흥건하게 젖은 땅바닥에는 해양 몬스터들이 즐비했다.
아무리 강력한 몬스터여도 물고기는 물고기. 지상에서 숨을 쉴 수 있을 리 없다.
-타악
천장에서 내려온 난 주변을 살폈다.
워터픽은 이미 전투 불능. 근처에 갔다가 물리는 것만 빼면 안전했고, 그나마 버티고 있는 철갑문어는 분노한 듯 내게로 기어 왔다.
기어는 왔는데.
“무어어어!”
-콰직!
-까드드득!
지뢰처럼 널브러진 워터픽이 물어 대기 시작하면서 사투를 벌이게 됐다.
좋구먼그래. 알아서들 잘 싸우네.
이게 바로 개판이 아닐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놈들이야 가만히 놔둬도 죽을 거다. 길어 봐야 10분 정도 버티겠지.
내 관심사는 이놈들이 아니다.
“히드라 셸.”
4성급 해양 몬스터.
예전에 비해 부쩍 강해진 나다.
3성급도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고, 4성급 역시 조심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5성급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화갑룡을 상대할 수 있을까? 글쎄. 쉽게 장담하기 힘들다.
아무튼.
“저놈이 4성급이기는 하지만 까다롭기로는 5성급에 비견된다는 소문이 있단 말이지.”
덕춘이가 저놈을 보고 안 된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히드라 셸의 껍데기 엄청난 강도를 가지고 있으며, 산성과 독에도 강한 저항력을 지닌다.
덕춘이의 주공격 방법은 산성침이나 독침을 뱉는 것. 상성이 안 좋다.
그렇다고 물리력으로 저 껍데기를 부수기에는 좀 힘들 것 같고.
“일단 해보자.”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아직까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는 녀석.
원체 무거운 탓일까, 물이 빠져나간 후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놈의 영역 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공격성을 보이지도 않고.
움푹 꺼진 통로 바닥. 저곳이 영역을 가르는 선이다.
원터픽과 철갑문어가 접근하지 않는 걸 봤다.
대략 15미터.
“그그그그.”
영역 가까이에 다가온 날 의식하는지 히드라 셸이 경고음을 냈다.
4성급 정도 되면 3성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터.
죽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다.
-파앗!
앞으로 달렸다.
그와 동시에 입을 여는 히드라 셸.
거대한 아가리가 벌리며 튀어나온 아홉 개의 촉수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늘어난다.
-쉬이이익!
-촤아아!
역시 촉수라는 것인가. 어디로 휘어 들어올지 짐작조차 안 된다.
그 수가 무려 아홉 개라는 점도 주목할 점.
단순히 눈으로 좇아서는 답이 없다.
오감에 집중하자.
놈의 촉수가 꺾이는 소리, 바람이 찢어지며 생기는 미묘한 진동 그리고…….
“비린내 난다, 자식아!”
확연하게 느껴지는 해양 몬스터 특유의 비린내.
보지도 않고 오른쪽으로 검을 날렸다.
-촤아아악!
“그가가각!”
반쯤 잘린 촉수가 꼬리를 말고 뒤로 빠진다.
완전히 자르는 데 실패한 건가. 촉수를 휘감고 있는 체액 때문에 살짝 미끄러진 것 같다.
짜증 나는군.
다른 각도에서 날아오는 촉수를 튕겨 내며 전진했다.
가까이 갈수록 촉수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진다.
괜히 4성급 몬스터가 아닌지 영악하게 사각을 노리는 건 물론이요, 반격하기 힘들도록 여러 부위를 동시에 공격하기까지.
-콰아아앙!
쳐 낼 수 있는 건 쳐 내고, 어중간한 것은 파이어 밤을 터트려 막아 냈다.
급격히 쪼그라든 놈의 촉수가 단단하게 굳는 게 보인다.
체액이 말랐기 때문인가, 이때가 기회다.
-서걱!
아까와는 다른 절삭음.
잘 익은 고깃덩어리를 베어 내는 감각이 들었고, 한 번의 일격에 세 개의 촉수가 잘려 나갔다.
남은 촉수는 여섯 개!
-파아앙!
지그재그로 달리며 놈이 촉수를 뻗도록 유도했다.
좋다고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공격을 해 댄다. 단순한 조개 같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기는 했지만…….
-치이이익
중간에 튄 체액이 닿은 부위에서 연기가 올라온다.
강한 산성과 독성. 몇 방울은 방어구 틈으로 들어와 살을 지졌다.
맨정신으로 살이 녹아내리는 걸 느끼는 건 고역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강체 (C) Lv.9]
[물리 공격 내성 (D) Lv.3]
[독 내성 (D) Lv.3]
몸을 보호하는 패시브 스킬이 아니었다면 바닥을 구르고 있지 않았을까.
그동안 덕춘이와 훈련을 계속해 온 보람이 있다. 미궁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반복한 덕분에 레벨이 조금씩 올라 있기도 했고…….
이때를 노려서 다시 한번 파이어 밤.
노릇하게 익은 촉수 두 개를 베어 내는 것과 함께 히드라 셸의 코앞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촉수의 내구도는 그리 좋지 않다. 체액이 위험한 거지.
그렇다면 내부 역시.
“직격타를 먹이면 잡을 수 있어!”
검을 찔러 넣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쿠아아앙!
열기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른다.
제대로 먹힌 건가? 그런 것치고는 손맛이 별로 안 좋은데.
“그그그극.”
폭발의 여파가 가시고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찰나의 순간 입을 닫아 버린 히드라 셸.
촉수를 포기하고 공격을 막을 줄이야.
껍데기가 닫히며 잘려 나간 촉수들이 펄떡인다.
체액이 사방으로 튀는 건 당연지사.
얼굴을 구기며 뒤로 몸을 뺐다.
-스으으
내가 뒤로 물러선 걸 느꼈는지 다시금 입을 여는 녀석.
잘렸던 촉수가 모두 재생됐다.
끈적한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내부.
껍데기는 파이어 밤을 버틸 정도로 단단하고, 촉수는 끝없이 재생한다라.
여러모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몬스터다. 그러니 상대하기 까다롭다며 헌터들이 혀를 내두른 거겠지.
“은근히 끈질기네.”
아직 갈 길도 먼데 이런 놈한테 잡혀 있기 싫다.
난 히드라 셸을 노려봤고.
“아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 *
대격변이 발생하기 전, 부모님과 함께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몬스터도 뭣도 없던 시기라 피서객들이 한가득 있었고, 관광객을 노린 잡상인과 가게가 즐비했다.
우리 가족도 바다에 온 기념으로 해수욕장 근처에 있던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 메뉴가…….
“조개구이였지.”
“궤에에에.”
-화르르르륵
“그그극! 그가가각!”
난 꿈쩍하지도 않고 자리를 지키는 히드라 셸에 계속해서 파이어와 파이어 밤을 던졌다.
여전히 단단한 껍데기는 흔적 하나 없었지만 열이 오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고.
-치이이이익!
벌겋게 달아오른 껍데기는 말랑한 속살까지 익히고 있었다.
와. 냄새 죽인다.
몬스터라는 걸 알면서도 군침이 돌 지경.
독성만 없었다면 한 끼 든든하게 먹었을 텐데. 그치, 덕춘아?
“궤에?”
아, 넌 원래 탑에 살았지?
나는 못 먹어도 덕춘이는 먹을 수 있다.
부러운 녀석. 나도 조개구이 잘 먹을 수 있는데.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덕춘이를 말렸다.
“조금만 이따 먹자. 아직 덜 익었다. 조개가 입을 딱 벌려야 된다고.”
그게 묘미 아니겠는가.
난 공들여 화력을 더 했고.
“그으으으. 그각!”
히드라 셸은 버티다 버티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입을 열었다.
피어오르는 수증기.
알맞게 익은 속살이 뽀얗게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들어오는 사냥 포인트.
놈이 죽었다. 그런데.
“저게 뭐야.”
입을 벌린 히드라 셸의 내부에 뭔가가 있었다.
백금색 결정체.
“진주?”
[히드라 셸의 진주 (A)]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히드라 셸의 진주.
-특유의 영롱함으로 애호가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보석입니다.
-히드라 셸의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그 자체로 강력한 해독약입니다.
난 진주를 챙겨 보물 주머니에 넣었다.
A급 아이템이라.
용도도 다양하다. 보석으로 팔 수도 있고 해독약으로도 쓸 수 있다니.
나야 내성 스킬이 있으니 별로 필요 없지만 혹시 아는가. 나중에 쓸 일이 생길지.
전리품은 챙겼고.
“먹어도 돼, 덕춘아.”
“궥궥!”
덕춘이에게 턱짓했다.
신나서 달려가는 녀석. 히드라 셸의 덩치가 하도 커서 부족하지는 않을 거다.
그럼 나도 이 틈에 식사를 해 보실까.
보물 주머니를 열어 식량을 꺼냈다. 꽤 단출하다. 그냥저냥 먹을 만한 수준.
반면 덕춘이는 이때다 싶었는지 포식을 하고 있었는데.
“…어?”
덕춘이 위로 알람이 떠올랐다.
[히드라 셸을 섭취했습니다.]
[특성이 강화됩니다.]
[새로운 특성이 생성됩니다.]
특성의 변화!
이전 백환과 실패한 물약을 먹었을 때도 저랬다.
아무래도 덕춘이는 섭취를 통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모양.
난 녀석의 정보를 불러왔고.
[덕춘 (카오스 개구리-D)]
-특성: 산성 (B), 회복 (B), 독 (C), 화염 (C), 외갑 (B)
-피에는 산과 독이 흐르고 외피는 철갑과 같으며 자가 치유에 불을 내뿜는……! 잡캐입니다.
-혼란하네요.
전체적인 특성 등급이 올라간 걸 알 수 있었다.
덕춘이 자체의 등급도 높아졌다. 전에는 카오스 개구리 옆에 E등급이라고 적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보다 외갑이라.
“저 껍데기가 특성으로 들어온 건가.”
히드라 셸을 바라봤다. 파이어 밤도 너끈히 버틴 껍데기.
방어력 하나만큼은 발군이다. 모르기는 몰라도 풀 충전한 되갚기가 아니면 안 깨지지 않을까.
이번 미궁은 위험도 많았지만 얻어 가는 것도 많을 거 같다.
나뿐만 아니라 덕춘이에게도.
덕춘이가 강력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특성이 공격 쪽으로 치우쳐 있다. 회복이 있기는 하지만 보조적인 느낌이 강하고.
방어적인 특성도 하나 있으면 좋지.
나야 이런저런 패시브 스킬들이 있으니 그나마 상황이 낫다지만…….
“그억. 궥.”
식사를 마쳤는지 덕춘이가 나를 보며 엄지를 든다.
그 많던 살코기가 다 사라졌다. 싹싹 비웠네.
역시 반찬 투정 따위는 부리지 않는 영물님.
묵직해진 녀석을 어깨에 올리고 히드라 셸의 껍데기를 챙겼다.
이거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다. 필요하면 방어구 제작 재료로 쓸 수도 있고.
진주에, 고기에, 껍데기까지 주다니. 아낌없이 주는 조개에게 조의를 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앞부터는 보물 지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빈칸 지역.
어쩌면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곳.
긴장되는 동시에 가슴이 뛴다.
“딱 기다려라. 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