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128화 (128/740)

128화 위기의 전조

안전지대 중앙에서 벗어났다.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쪽이 편해서.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여관을 찾으려고 했는데.

“뭔 상황이야, 이건?”

으슥한 골목. 의외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서너 명을 에워싼 열댓 명의 사람들.

골목에 들어온 사람을 겁박해 아이템이나 포인트를 뺏는 건 흔한 일이다.

각 안전지대를 관리하는 처리관이 있기는 하지만, 인력에 한계가 있는 이상 모든 범죄를 막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포위망을 짠 사람들이 대형 길드 소속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인기척을 죽이고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을 바라봤다.

어깨에 박힌 대형 길드의 문장이 다양하다.

한곳에서 모인 게 아니라는 뜻인가.

‘이클립스랑 피닉스. 저건 파이어 플로인가.’

대형 길드 서열 4위에 해당하는 곳이 파이어 플로.

30층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각 길드에서 네 명씩 총 12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각기 다른 모습을 한 남녀 네 명이 있었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이상옥?’

무리 중 한 명이 아는 얼굴이라는 것.

이상옥, 20층 디펜스 이벤트에서 같이 싸웠던 녀석이다.

쁘찡 연합에 소속되어 있으며, 암살에 특화되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눈살을 찌푸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언제 칼을 뽑아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

대형 길드가 팀을 짜서 이곳에 올 이유가 있나?

청각에 집중했다. 마력이 모이며 소리가 점차 또렷해진다.

“연합에 소속되어 있다고 들었다. 쁘띠공듀는 어디에 있지?”

“협조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할 것이며 척살 대상에서도 제외해 주겠다.”

척살?

내 위치를 묻는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놈들은 단 한 번도 나를 가만히 놔둔 적이 없으니까.

내가 한 짓이 있으니 그거야 그렇다 치지만 척살 대상이라니.

이상옥을 살폈다. 단검 쪽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고, 그의 팔에는 분홍색 띠가 둘러 있었다. 중앙에는 작고 귀여운 참새가 그려져 있고. 아니, 뱁새인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림 아래 조그맣게 쓰여 있는 것이 중요했지.

“…쁘찡 연합.”

화가 난다. 이준석 이 자식이 로고까지 만든 거냐!

참새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호랑이나 사자같이 멋진 것도 있잖아. 하다못해 너구리라도 해 주던가.

나중에 정체가 밝혀지면 어쩌자고. ‘참새 같은 남자 쁘띠공듀 조현수!’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핑크색? 핑크는 괜찮다. 남자의 색깔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상의 한번 안 하고 저걸 연합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게 어디 있어.

물론 나는 연합에서 활동하지 않으니까 참견하는 게 우스울 수도 있기는 한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후우!”

머리를 저었다.

집중하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슨 상황인지부터 확인해야지.

만약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이준석이 연락을 했을 거다. 아니면 오지혁이 보고를 했거나.

빠르게 커뮤니티를 살펴봤지만 따로 온 메시지는 없다.

그 말은 아직 대형 길드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대형 길드가 연합해서 일을 벌이고 있다. 정보를 모아야 한다.

더 나아가 이상옥의 안전도 확보해야 하고.

이상옥의 멤버인 세 명도 팔에 쁘찡 연합 띠를 차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합 사람들끼리 팀을 이룬 것 같은데.

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놈들의 대화가 더 선명해진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냉소적인 얼굴로 이상옥이 말했다.

서늘하다. 디펜스 이벤트에서 봤던 그의 모습은 상당히 살벌했으니까.

주변을 감싸고 있던 대형 길드원들도 꺼림칙함을 느꼈는지 주춤대며 거리를 벌렸다.

같은 30층이라 해도 쌓아 온 게 다르다. 이상옥은 내가 올린 공략을 그대로 따라온 인물.

기본 스텟만 따져도 놈들보다 앞설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상옥은 위기의식을 권능으로 가지고 있어.’

A급 권능. 위험한 상황을 본능적으로 캐치해 낸다.

저렇게 나선다는 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근거.

난 권능을 사용해 이상옥의 팀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준수하다. 권능 자체는 이상옥보다 떨어지지만 보유하고 있는 스킬의 개수가 두 자리를 넘었다.

그에 반해 길드원들은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장비가 다르니 어느 정도 비빌 만하기는 하겠지만 결코 압도할 정도는 아니다.

“분명 우리 쪽에서 공지했을 텐데. 연합을 해체하고 그동안 올린 글들을 삭제하라고.”

대형 길드의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나섰다.

머리 위로 떠오른 살인자 칭호.

[이도준 - 살인자]

-30층의 처리관

-파이어 플로 소속

이곳의 처리관이라.

이도준이 이상옥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쓸데없는 싸움을 멈추기 위함이다. 이제 곧 새내기가 들어올 것이고, 너희가 하는 일은 그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어.”

“그건 너희겠지. 대형 길드가 잘못된 공략법을 올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서로 기세를 거두지 않는다.

각자의 손이 무기로 향한다. 언제 칼이 뽑힐지 모르는 상황.

“필요하다면 피를 보도록 하지. 살인자 칭호? 받으면 그만이야.”

찰칵. 이상옥이 단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무기를 쥐는 소리가 들렸다.

단 한 명이라도 움직이면 전투가 벌어질 게 뻔한 상황.

몸에 힘을 줬다. 문제가 생기면 곧장 달려갈 생각.

“후우. 다들 무기 내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도준 처리관은 이 자리에서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뒤로 물러서는 길드원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도준이 이상옥을 응시했다.

“여기서 싸울 생각은 없어. 대형 길드원 머리에 살인자 칭호가 붙어 있으면 보기 안 좋잖아?”

잠시 관자놀이를 문지른 이도준이 팔짱을 낀다.

“이해가 안 돼. 왜 좋게 끝낼 수 있는 일을 복잡하게 하지? 네가 연합의 대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꽤 높은 지위일 텐데? 모두에게 좋은 결정을 내려.”

“연합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네놈들과 다르게 말이지.”

“쁘띠공듀 님은 제외하고 말이야. 그분은 우리의 정신적 지주다! 공듀 님만 보고 모였다고!”

“공듀 님은 너희와는 달라, 버러지 같은 놈들아.”

이도준의 물음에 이상옥과 팀원들이 반발한다.

아. 제발. 공듀, 공듀 하지 말아 줘.

심각한 분위기에 쁘띠공듀가 웬 말이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들은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연합장이 있다고 들었다. 그에게 전해. 물러서지 않으면 진짜 전쟁이라고. 카메라 스킬, 사진 등록 스킬, 현재 유통하고 있다는 상급 포션을 포기하더라도 이번 일은 양보하지 못하니까.”

“누가 들으면 맡겨 놓은 줄 알겠군. 애초에 우리는 너희랑 거래할 생각이 없다. 할 말 다 했으면 꺼져.”

“그러지. 부디 위에서도 그 성질머리가 그대로였으면 좋겠군.”

이도준이 비릿하게 웃었다.

“쉽게 끝나면 재미없으니까. 일주일, 그 이후에도 변화가 없으면 끝이다.”

엄지로 목을 그은 이도준이 대형 길드원들을 이끌고 골목을 벗어났다.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입술을 씹었다.

전쟁.

31층부터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목표는 하나.

나를 비롯한 연합 세력을 척살하는 것.

이유는 짐작이 간다. 나와 연합의 영향력을 없애고 싶겠지.

새내기가 들어와 내 공략을 본다면, 그들이 벌인 만행이 새내기들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나와 함께 탑에 불려 온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백환을 먹었으니까. 몇몇 사람이 외쳐도 절대다수는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온 새내기들마저 잘못된 튜토리얼 공략법에 대해 말한다면?

“그때부터는 혼란이야.”

대형 길드는 통제력을 잃을 것이고, 반감을 가진 이들이 날뛸 거다.

새내기가 들어오면 항상 있는 연례 행사가 있다.

자신의 가족, 연인, 친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

만약 4, 50층에 머물고 있는 헌터의 지인이 잘못된 튜토리얼 때문에 죽어 탑에서 퇴출된다면? 심지어 해당 헌터가 대형 길드원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 들어올 것이며, 대형 길드의 체계는 박살 날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온 기라성이 무너지는 것을.

여기까지는 오케이.

다 좋은데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결국에 들통날 거라면 사과를 하든 희생양을 정해 죄를 뒤집어씌우든 하면 될 텐데.

욕을 먹는 건 피할 수 없지만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만들 수 있다.

그들이 발표한 튜토리얼 공략법이 나온 지도 10년 가까이 지났다.

튜토리얼 내용이 바뀌었다며, 미처 파악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얼버무릴 수도 있다는 말.

놈들이라고 이걸 모를까?

내가 대형 길드를 싫어하는 건 맞지만 그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왜 수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려서까지 비밀을 지키려고 하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대형 길드, 너희가 정말로 숨기고 싶은 게 뭐냐.

뿌득. 이를 갈았다.

오지혁의 정보가 필요하다.

만약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대형 길드와의 악연을 끝내야지.”

30층대. 여기서 모든 걸 마무리 지을 거다.

* * *

26층.

이제 막 층을 클리어한 오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빙하 속에 갇힌 세미 뱀파이어 숙주를 잡은 건 물론이요, 다른 몬스터까지 깡그리 몰살시켰다.

피가 흘러 얼음이 녹아내리고, 기분 나쁜 습기와 냉기만 감도는 공간.

적당히 부순 빙하에 걸터앉은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는군.”

상부에서 연락이 왔다.

30층 안전지대에 머물고 있는 루키 최성모.

이제 곧 최성모를 비롯한 루키들이 등반을 시작한다.

팀을 이끌고 40층으로 향하는 여정.

목적은 명확했다.

[최성모_산군]: 나와 다성, 이클립스의 루키는 등반을 시작한다. 쁘띠공듀를 비롯한 멤버들, 그들의 연합 모두를 탑에서 지울 예정이지.

전부 쓸어버리는 것.

좋다. 딱 대형 길드다운 선택이었으니까.

사실상 대한민국의 헌터계를 움켜쥐고 있는 게 대형 길드다.

탑 안이기에 비교적 영향력이 적을 뿐이지, 무력으로든 경제력으로든 다른 이들은 거스를 수 없다.

그런데…….

[최성모_산군]: 임무를 내리겠다. 우리가 정리하는 동안, 넌 30층에 머물며 부활한 이들을 처형해라. 탑 밖으로 퇴출시켜, 다시는 탑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파이어 플로의 처리관이 도움을 줄 거다.

“제멋대로군, 빌어먹을 새끼들.”

6층의 처리관이었던 오지혁. 그에게 다시 처리관으로 활동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최성모_산군]: 이번 일이 끝나면 넌 세미 루키가 아니라 진짜 루키가 될 것이다. 남들은 모르는 세계의 비밀도 알게 되겠지. 의심하지 마라. 네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이니.

대가로 진짜 루키를 걸면서.

세미 루키로 루키와 비슷한 지원과 권한을 지니게 됐지만 여전히 그는 진짜 루키의 아래였다.

하수인이었고, 명령을 따라야 하는 부하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나락을 떨어트리는 일이라도 해야 하는 부하.

뿌득. 이를 갈았다.

처리관 활동? 이미 했다. 자신의 욕심, 길드의 이익을 위해 사람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은 게 사실이다.

후회하느냐?

후회한다.

용서를 바라느냐?

그건 아니다. 자신은 이미 죄를 저질렀고 그에 대한 복수와 비난, 경멸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다. 응징하려 한다면 마땅히 받아들여야지.

“가뜩이나 억울한 사람들한테 더 못되게 굴었군.”

똑같이 잘못된 공략으로 죽고, 기억까지 잃은 사람들인데.

대형 길드의 처리관. 엘리트. 그따위 수식에 취해 스스로 정당화했다.

대형 길드에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죄악을 쌓았다.

“내가 왜 강해지려 했는지 잊지 말자.”

오지혁이 인벤토리에 곱게 놔둔 물건을 꺼냈다.

흔해 빠진 플라스틱 비즈 팔찌.

자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팔찌의 움직임이 손가락을 통해 느껴진다.

왜 처음 처리관 역할을 임무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따랐는가.

길드의 눈에 띄고 싶어서?

맞다.

강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해.”

오지혁이 일어섰다.

한없이 높아 보였던 루키들이 30층에 있다.

고작 4층 차이, 결국 따라잡았다.

길다면 긴 악연.

“이참에 끝내는 게 좋겠군.”

30층 위로 넘어가면.

“최성모를 죽여야겠어.”

두 번 다시 처리관을 하는 일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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