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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41화 (141/740)

141화 이렇게 보니 반갑네

절벽 끝에 서서 김소담과 고대진은 팀원들을 바라봤다.

김서균이 이블아이를 데리고 절벽 반대편으로 넘어갔고, 최영미도 무사히 그곳을 통과했다.

남은 건 둘.

“레이디 퍼스트?”

“흐음. 그럴까요. 아니에요. 혹시 모르니까 대진 씨가 먼저 가세요. 혹시나 적이 쳐들어오면 제가 권능으로 막아야 해요.”

“에이, 차라리 내가 도망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전투 관련된 건 몰라도 잡다한 스킬은 내가 더 많은데.”

서로 먼저 케이블을 넘어가라며 잡담을 하던 그때, 고대진이 얼굴을 구기며 손을 들었다.

고대진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다가오는 듯한.

“적들이 오는 것 같─!”

고대진이 적의 접근을 알리는 것보다 빠르게 절벽 반대편에서 최영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고.

-콰아아앙!

그녀가 쏜 볼트가 숲 어디론가 떨어져 폭발을 일으켰다.

그뿐일까.

-아아아악!

-이런 개새끼들이!

어렴풋이 들리는 사람 목소리.

둘은 안색을 굳혔다.

적들이 몰려오고 있다. 비단 한 곳만이 아니다.

-사사삭!

-빠득

사방이라고 말할 만큼 많은 곳에서 소음이 들렸다.

아직은 멀지만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

“이거 포위된 거 같죠?”

“그런 거 같네요.”

김소담이 쇳덩이를 꺼내고, 고대진이 나이프와 검을 쥐고 자세를 갖췄다.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적어도 놈들이 한쪽에서 몰려왔으면 반대쪽으로 빠져나가겠는데, 지금 상황을 봐서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 마찰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게 먼저 가시라니까는.”

고대진이 투덜댔지만 김소담은 그런 그가 밉지는 않았다.

결국 본인이 남아서 시선을 끌겠다는 말이었으니까.

피식 웃은 김소담이 전투봇을 최대한 생산하며 침을 삼켰다.

“그러는 대진 씨야말로 먼저 가지 그랬어요. 버티는 건 제가 더 오래 버틸 텐데.”

“제가 좀 굼떠서요, 고소 공포증도 있고.”

거짓말이었지만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곧 있을 전투를 대비하며 긴장감을 풀려는 것뿐이었으니까.

-콰직!

썩은 나무를 밟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헌터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

장애물이 많은 숲에서도 그들의 기동력은 줄지 않았고, 기어이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엄청 많네요?”

눈을 굴리며 적들을 살피던 고대진이 숫자 세기를 멈췄다.

스무 명이 넘는 길드원들이 보였으니까.

심지어 이게 다가 아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팀도 존재할 테니까.

33층. 환자 이송 필드.

이곳에 들어온 열 개의 팀 중 대형 길드 소속이 아닌 건 이블아이 팀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곧장 공격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

짜임새 있게 포위망을 만든 후 천천히 압박하며 들어온 것이다.

“쁘찡 연합 사람들 발견했습니다.”

“김소담으로 추측되는 인원이 있는데. 예. 현재 두 명이 대치 중입니다.”

연락을 취하는 특별한 아티팩트라도 있는지 각 팀장이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33층에 있는 팀 전체를 관리할 만큼의 거물이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

고대진과 김소담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먼저 치는 게 나을까요?”

“좀만 기다려 보죠. 놈들도 이유가 있으니 바로 공격하지 않은 걸 거예요.”

약간의 희망.

놈들이 따로 원하는 게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 타협할 수도 있는데.

대형 길드에 좋은 감정은 없지만 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33층까지 올랐다. 40층에 오르면 B급 헌터가 되고.

다른 걸 다 떠나서 이대로 30층 안전지대로 부활하면 지금 만난 팀원들을 볼 수 없다.

다음에도 지금과 같은 팀을 만들 수 있을까?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오십시오. 저희가 먼저 정리하고 있겠습니다. 예. 환자 이송 팀을 부탁합니다.”

무전 아티팩트를 내린 팀장 하나가 검을 뽑았다.

김소담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나 길드 소속 팀은 환자 이송 전담반을 따로 만들었다.

절벽을 따라 설치된 케이블은 하나가 아니다.

아마 다른 길을 통해 움직이려는 거겠지.

“다들 33층 오르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점잖게 말하며 다가오는 팀장.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이제 그만 30층 가서 쉬시죠, 다들 공격!”

공격 명령을 내렸다.

혹시나 했던 순간도 잠깐.

김소담이 빠르게 움직였다.

“가!”

-위이이잉!

-카아앙!

전투봇 수십 개가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인원수는 밀리지만 물량전에는 자신 있는 김소담이다.

‘대량 학살자’라는 칭호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고대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은신 (B) Lv.6]

[기척 죽이기 (C) Lv.5]

[자연 동화 (B) Lv.3]

-사아아악

한순간에 기척을 줄인 그가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빠르게 내지른 검.

-푸슉!

“끄르륵!”

정확히 목을 찔린 길드원 하나가 앞으로 고꾸라졌고.

“탐지해! 둘 상대로 쩔쩔맬 거야? 밀어 버리라고!”

“디버프 걸어!”

분노한 길드원들이 한 번에 스킬을 가동했다.

생성되는 장막과 탐지 스킬.

이어서 추적 스킬까지 따라붙었고, 신체 능력을 저하하는 디버프까지 덮쳐 왔다.

“크흑!”

은신이 깨지고 위치가 들통난 고대진이 미간을 찌푸린다.

길드원이 달려드는 건 덤.

찔러 들어오는 창을 몸을 비틀어 피하기가 무섭게 도끼가 내려 찍힌다.

간발의 차이로 고개를 돌려 피해 냈지만, 바닥이 깨져 튀어 오르는 돌덩이는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콰아악!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또 다른 창이 그를 찔렀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눈을 질끈 감은 고대진이 충격에 대비하는데.

-꾸드드득!

“괜찮습니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균 씨?”

고대진의 눈이 떨렸다. 분명 케이블을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갔을 텐데?

-빠각

말없이 붙잡은 창대를 부숴 버린 김서균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

그의 눈은 분노로 차올랐고.

“꺼져!”

도끼를 든 길드원의 복부를 걷어차며 앞으로 돌진했다.

무모한 행동. 하지만 그에게는 권능과 스킬이 있었다.

[B급 권능, 결사대가 발휘됩니다!]

[결사 항전 (A) Lv.5]

목숨을 건 전투에서 빛을 발하는 능력들.

그의 몸에서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혼자였지만 그 기세는 어마어마했고.

“저 새끼부터 잡아!”

길드원들 역시 그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피슉!

화살 하나가 날아와 김서균의 귀 끝을 찢고 지나간다.

내려친 검이 그의 방패에 부딪혀 불똥을 튀기고, 바닥에서 솟아난 송곳이 그의 발을 꿰뚫었다.

몸통에 직격한 불덩이는 열기를 뿜으며 터져 나갔고, 어디서 날아왔을지 모를 바람의 칼날은 그의 갑옷을 뜯고 나갔다.

후드득 쏟아지는 핏물.

“으아아아!”

목에 핏대를 세운 그가 고함을 내질렀다.

전혀 기세가 죽지 않았다.

[불굴 (A) Lv.10]

등급 최대 레벨까지 올라간 스킬. 불굴.

그가 어떤 식으로 탑을 올라왔는지 증명하는 것이었고.

“뭐 해요! 같이 싸워요!”

전력을 가다듬은 김소담도 그와 합류했다.

“이블아이는 도대체 혼자서 어떻게 이긴 거야, 젠장! 갑시다!”

고대진도 악을 쓰며 달라붙었다.

찌르고 베고 넘기고 후려치고 들이박고.

난장판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결사전.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의지와 이런 놈들을 상대로 홀로 싸워 이긴 이블아이에 대한 경탄과 선망이 가득했다.

-촤아악!

-빠득!

살벌한 소리가 가득한 전장.

비명이 울려 퍼지고, 바닥을 타고 흐른 핏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누군가의 팔이 굴러다녔으며, 이가 나간 검이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스무 명이 넘는 길드원 중 9명이 사망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잘 싸웠다.

도저히 소수의 인원으로 싸웠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놈들.”

전투를 지켜본 길드원 팀장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끝내라. 시간 많이 잡아먹었다.”

절대적인 전력 차이 앞에 반전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서균과 김소담, 고대진의 체력은 빠르게 소모됐으며, 공격은 무뎌졌다.

피해 내는 공격보다 받아 내는 공격이 더 많아졌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야가 돌았다.

절망적인 상황.

끝이라고 생각이 들던 때 변화가 생겼다.

[3번 팀의 환자가 새롭게 지정됩니다.]

[7번 팀의 환자가 새롭게 지정됩니다.]

.

.

.

“크하악!”

“커헉!”

멀쩡히 움직이던 길드원들이 갑자기 쓰러진 것.

“뭐, 뭐야!”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길드원도 마찬가지.

[1번 팀이 탈락합니다.]

[9번 팀이 탈락합니다.]

뒤이어 대형 길드의 팀이 탈락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있을 수 없는 일.

1번과 9번 팀은 환자 이송을 위해 따로 떼 둔 팀이다.

그렇다는 건.

“이송 팀이 당했다!”

“어, 어째서!”

“그쪽은 그분이 있는 곳인데!”

뒤로 돌아서 안전 구역으로 향한 이들이 당했다는 것.

불가능했다. 다름 아닌 그곳은 33층에 있는 길드 팀을 이끄는 수장이 있었으니까.

혼란에 빠진 길드원들.

의문은 금방 빠졌다.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남자.

오지혁.

그의 손에는 같은 팀 환자로 보이는 이가 축 처진 채 들려 있었다.

쿵.

환자를 내려놓은 그가 어깨에 붙어 있는 산군 길드의 마크를 뜯어냈다.

“이블아이를 보러 왔다.”

말을 마친 그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길드원을 걷어찼고.

[C급 권능, 발차기의 달인이 발휘됩니다!]

[걷어차기 (A) Lv.8]

-콰아아앙!

기어이 A등급까지 올린 그의 발차기는 사람이 낼 수 없는 힘을 발휘했다.

“크하아아악!”

“대, 대장님!”

“아아악!”

무방비하게 있던 길드원 다섯 명이 충격에 날아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 * *

난 나무에 기댄 채 전황을 살폈다.

수풀에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최영미가 계속해서 상황을 말해 줬기에 대략적으로는 알 수 있었다.

“누, 누군가 나타났어요! 저게 대체!”

말을 더듬는 최영미.

그도 그럴 것이 반대편에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번 팀이 탈락합니다.]

[7번 팀이 탈락합니다.]

[6번 팀이 탈락합니다.]

연달아 울리는 탈락 소식.

난 입꼬리를 올렸다.

“제때 도착했나 보군.”

커뮤니티를 통해 메시지를 받았다.

[이준석]: 오지혁이 33층을 클리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준석]: 상황 설명을 들어 보니 이블아이 씨랑 같은 구역인 것 같던데 괜찮을까요?

오지혁이 33층. 그것도 같은 필드에 있다는 이야기.

난 바로 연락을 넣었다.

상황이 급박했기에 이준석을 통하지도 않았다.

[쁘띠공듀]: 하잉! 오징오징 오지혁 씨!

어그로를 끈 문장이어서 그럴까. 그는 빠르게 회신했고.

[오지혁]: 이런 씹어 죽일 것이 어디다 대고.

[쁘띠공듀]: 으윽… 험한 말. 친추나 받아요.

난 그에게 친추를 걸었다.

다행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미 우리 편에 서기로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쁘띠공듀]: 33층이죠? 이블아이 팀 좀 도와줘요.

[오지혁]: 내가 왜?

[쁘띠공듀]: 이블아이 이용권 드림.

[오지혁]: 좋다.

뻐댈 줄 알았던 그가 의외로 수락을 했고 그 결과가 이거.

놈이 뭘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힘이 필요한 건 맞아 보였다.

애초에 길드를 배신한 상황이니 연합과의 인연도 계속 가지고 나가야 할 거고.

최영미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지혁이 날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못 본 사이에 괴물이 됐는데.”

솔직히 놀랐다.

10층 결투장 이벤트 때도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지만 지금 보니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세미 루키가 됐다더니 지원을 제대로 받은 모양.

산군 입장에서는 뒷골 좀 당길 거다.

“끝, 끝났어요! 이블아이 씨, 우리가 이겼다고요! 저 이상한 사람 덕분이기는 하지만.”

“다행이군요.”

고대진과 김소담, 김서균 모두 상처를 입었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지혁은 옷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있었고.

“이쪽이에요! 다들 파이팅! 빨리 와요!”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팀원들이 케이블을 타고 이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줄에 매달린 채 오는 이들과 달리 오지혁은 케이블 위를 걸어왔다.

권능을 통해 봐도 떠오르는 스킬이 없다. 오로지 균형 감각만으로 저런 묘기를 부리고 있다는 것.

과연 발을 쓰는 놈답다고 해야 하나.

“다시 보는군, 이블아이.”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반대편에 도달한 오지혁이 나를 노려봤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환자로 지정된 길드원이 들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길드원을 던진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오늘부로 난 완전히 길드를 적으로 돌렸다.”

“축하해. 착하게 살아야지, 안 그래?”

내 말에 입가를 비트는 녀석.

“둘이 아는 사이에요?”

“예, 뭐. 이래저래 인연이 있죠.”

인연이라기보다는 악연이었지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는 최영미가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

오지혁 이놈은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슬쩍 시선을 움직인 녀석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저 개구리, 네가 김정수였군. 보나 마나 그것도 가명이겠지만.”

“이제 알았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툭, 내 어깨를 친 녀석이 표정을 굳힌다.

“이제 와서는 쓸모없는 이야기지. 쁘띠공듀한테 이야기는 들었겠지?”

“이용권? 원하는 게 뭐야.”

“별거 없다. 너희가 하려는 거랑 비슷하기도 하고.

오지혁의 손가락이 위를 가리켰다.

“산군과 다성, 이클립스의 루키를 죽이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녀석.

30층대 최강자들을 노리겠다니.

이것 참.

“좋은 생각이다.”

간만에 뜻이 맞는다.

힘겹게 팔을 들어 놈의 손을 맞잡았다.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

“아니, 루키를… 둘 다 미친 거 같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영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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