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충격에 충격
나도 최성모도, 옆에 있던 핥짝이와 오지혁에게도 충격적인 시간이 지나고.
부서진 멘탈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심문이 시작됐다.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건 놈도 마찬가지니까.
“이런 악독한…….”
“닥쳐. 내가 제일 힘들어. 빨리 말하기나 해.”
정신이 혼미한 녀석의 머리통을 때리고 질문을 이었다.
목에 있는 문양이 신경 쓰이는지 입가를 움찔거리는 것도 잠시. 춤출 자세를 취하자 이내 정보를 뱉어 냈다.
“너희는 대형 길드를 악으로 보고 있지. 일부는 맞는 말이다.”
스스로도 꺼림칙한 일을 하는 건 알고 있는 모양.
중요한 건 그걸 알고 있는 놈이 왜 이러냐는 것.
“세이퍼 정책과 백환, 우리나라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무슨 소리지?”
우리나라에만 있을 거냐니. 다른 나라도 비슷한 게 있다는 걸까.
“그래. 모르겠지. 헌터계는 국제적 교류가 그리 많지 않으니. 적어도 너희처럼 외부인들은 알 수가 없다. 대형 길드와 정부만이 알고 있지.”
그의 말대로 해외 헌터에 대한 정보는 많이 풀리지 않았다.
헌터는 초인.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였고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국가적 전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이야 게이트를 없애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까.
초인으로 이루어진 병력 집단.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했을 법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그렇기에 각국의 헌터와 관련 법안, 탑 개척도는 정부 차원에서 통제한다.
그나마 홍보용으로 떠드는 것과 게이트가 터지며 드러난 정보가 돌아다닐 뿐.
익명의 사이트나 뷰튜브로 퍼지는 것도 있긴 하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다.
“미국에는 빅 캔디와 가이드 플랫폼 정책이, 영국에는 에너지 스톤과 가디언 프로젝트가 존재하지. 각각 백환과 세이퍼 정책과 동일한 것들이다.”
“가짜 튜토리얼을 뿌린 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는 걸로 들리는데.”
“실제로 그렇다.”
믿기 힘든 이야기.
국가적 사기극인 줄 알았건만 전 세계적인 단합이었다?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커진다.
팩트보다는 음모론에 가까운 느낌인데.
“말이 안 되잖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나.”
핥짝이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팔짱을 낀다.
오지혁도 마찬가지.
“오히려 국제적인 건 숨기기 쉽지. 너도 커뮤니티를 켜 보면 알겠지만 탑은 서버별로 나뉘어 있다.”
그건 나도 기억하고 있다.
처음 커뮤니티를 열었을 때 적혀 있었지.
[커뮤니티]
-메인 서버: 대한민국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여기에도 의미가 있던 건가.
“일정 지역마다 서버가 나뉜다. 일본은 일본 서버를,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는 통합 서버를 쓰지. 기준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서버마다 탑의 생태계가 다르다는 것.”
“서버마다 튜토리얼도, 층별로 나오는 몬스터도 다르다는 거군.”
“적어도 일정 구간까지는 그렇다.”
나라마다 튜토리얼 공략법을 발표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것.
이렇게 되면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기 힘들다.
“단순히 대형 길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필요한 일을 했다는 거다, 어리석은 녀석들.”
“빙빙 돌리지 말고 정확히 말해라, 최성모.”
오지혁이 그의 멱살을 잡는다.
“탑이 나타난 시점부터 우리는 멸망의 길을 가고 있다. 헌터가 늘어날수록 혼란은 커지지.”
최성모가 우리를 노려봤다.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고.
“헌터 또한 몬스터처럼 이질적인 존재라는 걸 잊지 마라. 왜 매년 게이트 발생률이 높아지는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하란 말이다! 혼돈이 세계를 멸……!”
[맹약의 증표가 (AA)가 활성화됩니다.]
[해제 (AA)가 강제 종료됩니다.]
-콰직!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증표가 터지며 최성모의 머리가 사라졌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놀라는 이는 없었다.
그저 놈이 남긴 문장만 머리에 감돌 뿐.
탑. 이질적인 존재. 멸망. 혼돈.
“그에에에.”
팀원들을 회복시켜 준 덕춘이가 돌아왔다.
평소처럼 어깨에 덕춘이를 올리고 시선을 돌렸다.
미간을 좁히고 있는 오지혁과 발끝으로 바닥을 차는 핥짝이.
각자 생각할 게 있어 보인다. 나도 마찬가지고.
헌터가 늘어나면 게이트가 늘어난다라.
왜 하필 튜토리얼 공략법을 이용했는지 알겠다.
튜토리얼 구간을 통과하지 못하면 헌터가 되지 않으니까.
클리어 확률 20퍼센트. 극악의 생존율은 인위적으로 맞춰진 거였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어처구니가 없네요.”
오지혁이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끊었다.
이래저래 놈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차피 헌터는 늘어납니다. 게이트도 똑같이 늘어나면 헌터 한 명이라도 더 강하게 키울 생각을 해야지, 머저리 같은 놈들. 뒷세대는 어떻게 하라고.”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형적인 폭탄 돌리기 아닌가.
최대한 일을 미루고 회피하는 것.
지금 당장은 저러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헌터 수가 적으면 게이트도 적게 나타나니까.
하지만 나중에는?
헌터의 수준은 그대로인데 게이트는 늘어나고 더 강한 몬스터들이 쏟아진다면?
그때는 진짜 끝이다. 근시안적이다 못해 이기적인 방식. 동정의 가치조차 없다.
물론 나 또한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그러니 알아봐야지.
‘현 대형 길드장들은 초기 헌터. 대부분 50층대까지 올랐다고 알려져 있지. 그렇다는 건 적어도 60층에 오르기 전에 탑과 멸망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거야.’
어차피 난 탑을 올라야 한다.
자세한 내막은 차차 알아가면 그만.
“일단 정리부터 하죠. 클리어 먼저 합시다.”
“그러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오지혁이 먼저 자리를 떠났고, 핥짝이는 가만히 날 바라봤다.
왜 그러지?
아.
“최성모는 내가 잡은 겁니다? 정신적인 충격 알죠?”
“무슨 소리, 내가 해제하다가 끝나서 죽은 거니까 내가 잡은 거지!”
내 말에 발끈하는 녀석.
거참, 쿨하지 못하게.
“그럼 무승부. 뭐, 따지고 보면 내 비중이 80퍼센트기는 한데, 인심 좀 쓰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이긴 거거든?”
“아니 뭐. 그런 거로 해도 되고.”
“야!”
난 핥짝이와 투닥거리며 전장을 수습했다.
* * *
[35층 클리어]
[생존자들은 새롭게 팀을 짤 수 있습니다.]
[팀 구성은 최대 5명까지 가능합니다.]
세이프 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게는 권능이 있으니까.
때마침 제5구역에는 세이프 존이 4개 있었다.
우리 팀과 오지혁, 이상옥 팀, 핥짝이 팀.
현재는 모두 세이프 존을 벗어나 모여 있는 상태.
정말 의외로 오지혁은 이상옥 팀에 합류하기로 했다.
“내가 팀에 들어가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허락해 주는 걸 감사히 여기도록.”
둘이 말하는 꼴을 보자니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잘됐다. 오지혁이 강한 거는 사실이나 30층대는 엄연히 팀플레이 구간.
같이 움직일 사람이 있는 게 유리하니까.
“우리는 먼저 올라가도록 하지. 어느 정도 회복도 했고, 굳이 너희와 경쟁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상옥과 오지혁은 곧장 위로 향했다.
다들 무사히 위로 올라가라며 손을 흔들었고 나 역시 그러고 싶었지만.
“흔들린다.”
“네, 넵.”
그럴 수 없었다.
싸움이 끝나고 돌아온 킬더레스에게 얼차려를 받고 있었으니.
난 대가리 박아 자세로 부들거리는 중이었고 킬더레스는 내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는구나, 킬더레스.
“오케이, 그만.”
“후아! 살았다.”
어느 정도 화가 풀렸는지 킬더레스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네.
처음에는 킬더레스의 등장에 팀원들도 놀랐지만 현재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중.
다들 내가 10층 투기장 이벤트에서 킬더레스 소환권을 받은 걸 알고 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더 괴롭혀 주고 싶기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서 말이지.”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킬더레스를 하루 정도는 소환 유지할 수 있었지만 마력을 너무 많이 썼다.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뜻.
“펜그릴은 저쪽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괜히 왔다가 공격할 수도 있거든.”
“생각보다 고분고분해졌네요?”
“마계에 이런 말이 있지. 예절은 물리적으로 주입할 수 있다.”
아하. 그렇구나.
앞으로 킬더레스한테 까불지 말아야지.
고개를 끄덕이고 팀원들에게 잠시 어디 좀 갔다 온다며 자리를 벗어났다.
대형 길드와의 악연을 일단은 끝냈으니 남은 건 세계수 퀘스트를 완료하는 것.
눈의 정령의 화관을 얻어야 릴카가 준 퀘스트도 클리어할 수 있다.
뚜벅뚜벅 걷던 찰나.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전에도 궁금했는데 킬더레스. 10층 놔두고 이렇게 막 나와도 돼요?”
“상관없다네. NPC는 끊임없이 분열하니까. 지금 10층에도 또 다른 내가 있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그야 탑은. 흐음. 이건 말해 줄 수 없군. 다 왔다. 이제 볼일을 보도록. 난 오랜만에 외출한 만큼 산책이나 하다 돌아갈 터이니.”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킬더레스.”
별거 아니라며 손을 흔들며 떠나는 킬더레스를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 * *
제5구역의 중심. 펜그릴이 서 있었다.
“왔는가, 인간.”
온몸이 바스러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녀석.
적대적인 눈빛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냐.”
“다른 건 없고, 이걸 부탁해.”
인벤토리에서 세계수 씨앗을 꺼냈다.
두 눈을 부릅뜨는 녀석.
“이, 이건!”
“세계수의 씨앗이지. 마지막 눈의 정령이자 여왕, 하이누에게 부탁받았어. 너라면 잘 키워 낼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
“…하이누.”
사실 펜그릴을 콕 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상관없겠지.
펜그릴이 한결 풀린 표정으로 씨앗을 안아 든다. 살벌한 줄만 알았더니만 지금은 아주 꿀이 떨어지네.
눈의 정령이 드루이드와 엘프의 모체라더니 진짜인 모양.
“고맙다.”
“응?”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진짜였다.
[NPC, 펜그릴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눈의 정령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줄이야.”
“궁금한 게 있는데 눈의 정령이 너희한테 그렇게 중요해?”
“우리는 뿌리를 잊지 않지. 상징적인 것도 있지만 모체가 되는 존재가 사라지면 우리 또한 쇠락의 길을 걷는다. 자손을 남기기 힘들어지지.”
몰랐던 사실이다.
“세계수를 보듬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크나큰 영광. 인간은 모두 쓰레기인 줄 알았지만 그대는 다르군. 모두를 대표해 감사함을 전한다.”
그가 고개를 숙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이다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그런 의미로 좋은 것 좀 주면…….”
“하여간 정이 안 가는 종족이군. 하나 좋다. 그대는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
펜그릴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넨다.
[드루이드의 평화 지대 (AA)]
-오염된 구역을 정화시키고 생명이 숨 쉬는 곳으로 만듭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다.”
AA등급 아이템이니 가지고 있으면 좋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고, 별말 없이 무릎을 구부린 그가 세계수 씨앗을 땅에 심었다.
그와 동시에 펜그릴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마력과 신성력이 터져 나왔고.
[세계수가 싹 틉니다!]
[모든 드루이드와 엘프가 크게 기뻐합니다!]
[절대다수의 드루이드와 엘프가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절대다수의 호감을 얻는다라. 나쁘지 않네.
-꾸구국
-파아아앗!
슬며시 미소 짓는 것도 잠시 땅 위로 수줍게 싹을 내민 세계수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내 무릎 높이에서 어깨를 지나더니 어느새 십여 미터로 자라났고.
-사아아아아
“눈?”
하늘에서 눈이 떨어져 내렸다.
그중 유독 커다랗고 하얀빛을 내뿜는 구체 하나.
펜그릴이 부드럽게 그것을 손에 안았다.
“눈의 정령이다. 아직은 각성하지 못했으나 곧 정신을 차릴 거고 성장한다면 여왕으로 자라나겠지.”
처음에는 이런 모습이구나.
따뜻한 빛을 내며 꿈틀거리는 빛덩이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때.
[눈의 정령 부활 퀘스트 클리어!]
[눈의 정령 부활-유일 퀘스트]
-오랜 시간 동안 냉혈괴목에게 힘을 빼앗긴 하이누는 씨앗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씨앗은 세계수가 될 것이며 눈의 정령은 부활할 겁니다.
-그녀를 도와 적절한 장소를 찾아봅시다.
-보상: 눈의 정령 화관, 정령의 친구(칭호), 부활의 씨앗
퀘스트 완료 알람이 떴다.
[칭호, 정령의 친구를 획득합니다.]
-모든 정령이 우호적으로 대합니다.
칭호와 함께 두 개의 아이템이 떨어져 내렸다.
눈의 정령 화관, 그리고 부활의 씨앗.
[눈의 정령 화관 (A)]
-막 태어난 눈의 정령이 처음으로 만든 화관
-순수한 눈의 정기가 담겼습니다.
-엘프 여왕의 결혼식에 쓰입니다.
[부활의 씨앗 (SSS)]
-세계수가 새로 생겨날 때 만들어지는 유일한 아이템
-수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귀한 물건입니다.
-사망한 이를 살릴 수 있습니다. (부활하는 데 걸리는 시간: 1시간)
“미친?”
다른 건 고사하고 부활의 씨앗이 미쳤다.
처음 보는 SSS급 아이템. 유일 아이템인 것도 모자라 죽은 이를 살릴 수 있다?
사기적인 아이템이다. 정작 나한테는 메리트가 없지만, 이미 코인이 무한이라.
나중에 밖에 나간다면 또 모르겠다만.
난 두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챙겼다.
이걸로 볼일은 끝.
펜그릴도 세계수를 돌보느라 바쁜 것 같고.
이왕 팀원들이랑 떨어진 거, 공략 글이나 쓰다 가야지.
막 커뮤니티를 키려는데.
“예쁘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핥짝이.
언제 온 걸까. 보상을 확인하느라 인기척도 못 느꼈다.
뭐라 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타이밍.
-스르륵
핥짝이가 투구를 벗었다.
그와 함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샤프한 턱선과 긴 속눈썹.
“여, 여자였어요?”
“징그럽게 존댓말 좀 그만하지?”
충격을 받아 입을 벌리는 것도 잠시.
“정체를 숨기는 게 너뿐인 줄 알았어, 쁘띠공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난 더 큰 충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