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호수를 건너라
모빌리딕과 치히린.
두 NPC가 하는 말을 종합하자면…….
“저 호수를 건너야만 안전지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지?”
“그렇지!”
물론 본신의 힘을 모두 쓸 수 있으면 호수 하나 가로지르는 건 어렵지 않기에 시스템적으로 제약을 준 거고.
맥주병인 둘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넘을 수 없는 경계와 같았다.
“굳이 안전지대로 갈 이유가 있나?”
[모빌리딕이 안전지대는 NPC에게도 안전한 곳이라고 전합니다.]
“NPC라고 다 같은 NPC가 아니라고. 강한 녀석들이야 상관없겠지만 우리 같은 애들은 제정신으로 살아가려면 발버둥 쳐야 해.”
나도 탑을 오르면서 느꼈다.
각 층에 존재하는 NPC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안전지대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따로 의문을 가진 적도 없었다.
NPC는 각자 주어진 역할이 있고 존재 의의를 가짐으로써 자아를 유지한다.
알리오스가 말해 줬기에 그 부분은 잘 안다.
무식하게 버티는 방법도 있지만 한계가 명확했기에 알리오스마저 보석 세공사로 활동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나마 안전지대에 있는 NPC는 사정이 나았다.
벨라도 한때 장사가 잘 안 됐지만 지내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반면에 각 층에서 있던 NPC들?
‘게일만 해도 착취당하고 살았지.’
전 노역소장 메글릿에게 당하면서 말이다.
추방당한 드루이드 프리스트, 펜그릴은 보스몹 취급이었고.
뭐, 19층의 지배자와 29층의 지배자는 본인 의지로 층에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그만한 능력이 되니까 선택할 수 있는 거다.
이 녀석들에게는 선택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으으, 빌어먹을 세상. 세상은 삐뚤어졌어.”
시무룩해진 치히린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요정이 할 말인가 싶기는 하다만 그만큼 쌓인 게 많다는 거겠지.
확실히 제약을 받았다고는 하나 둘에게서 위압감이나 견주기 힘든 강자의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막상 붙으면 일방적으로 얻어맞겠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두 녀석에게는 자신감이 없다.
움츠러든 모습이랄까.
“너희는 몇 층까지 올랐지?”
“80층 초반.”
모빌리딕도 고개를 끄덕인다.
80층대라.
노역장에서 만난 악마들도 비슷했었지.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닌가.
90층대는 아니더라도 상위층까지 도달했다는 건데.
우리 기준으로 생각하면 상상도 하기 힘든 위치다.
새삼 다르게 보여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억울해! 처음부터 강한 놈들은 탑에 들어와서도 쭉쭉 올라가는데. 그런 놈들 눈에 우리 같이 밑에서 빌빌거리며 올라오는 애들은 보이지도 않겠지!”
치히린이 급발진을 했다.
분통을 터트리며 팔다리를 바둥거린다.
겉보기에는 우스웠지만 울분에 찬 표정을 보니 놀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제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녀석.
[모빌리딕이 사대 정령은 탄생과 동시에 등급이 정해진다고 말합니다.]
[태생적인 한계에 대한 원망을 노래합니다.]
[최상급, 적어도 상급 정령으로 태어났다면 90층대를 오르는 것도 꿈은 아니었을 거라고 전합니다.]
모빌리딕 역시 땅에 고개를 처박고 몸을 들썩인다.
사대 정령이라면 불, 물, 바람, 땅의 정령을 뜻하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눈의 정령은 딱히 등급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정령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닌 모양.
“흐음.”
두 녀석 모두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해한다.
스타트가 다르다는 건 사람을 위축시킨다.
얘네처럼 종족 값에서 차이가 나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비슷하지 않던가.
누군가는 신체가 강하고, 어떤 사람은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
개인의 노력으로 커버가 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불가능한 영역도 있다.
대형 길드에 소속되었느냐, 무소속이냐에 따라서도 갈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탑에 들어와서도 ‘난 안 돼,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넘을 수 없는 벽이야’라며 의욕을 잃는 경우도 많다.
“요정왕은 고작 한 달 만에 60층을 돌파했지. 97층까지 오르는 거로 끝나기는 했지만.”
[모빌리딕이 정령왕 역시 비슷했다고 합니다.]
이미 충분히 강했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탑을 오른 이들.
아마 킬더레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탑에 불려오기도 전에 제7마계를 지배했으니.
그뿐일까, 천마대전에서도 승리했었지.
어쩌면 억측일 수도 있다.
개인의 강함과는 별개로 조심성이 많은 성격일 수도 있으니.
반면에.
‘알리오스는 19년이 걸렸고 했지.’
홀로 제국을 궁지로 몰아넣었음에도 알리오스는 99층까지 오르는 데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소모했다.
생각해 보면 알리오스는 결코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릴카를 경계했으며, 코인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였다고 했지.
그랬기에 99층까지 오른 걸지도 모른다.
정작 탑에서 나오고 나니 세계가 이미 멸망에 접어들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나는 어떨까.
보잘것없는 배경.
밑바닥에서 구른 건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
그나마 비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멤버들 정도?
맞다.
난 약하다.
그래서 구를 수밖에 없었고, 모르는 부분은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기연을 얻고 히든 피스를 얻지 않았다면 진작에 탑 밖으로 쫓겨났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곳이 탑.
자만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고, 도전 기회가 무한하다고 하지만 내 능력이 안 된다면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될 뿐이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사실 안전지대에 간다고 잘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텃세도 있을 거고, 우리 같은 애들은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대단한 놈도 득실댈 테니까.”
[모빌리딕이 침울해합니다.]
본인들도 확신을 못 하는 상황.
어쩌면.
이게 진짜 녀석들이 물에 빠져 있던 이유가 아닐까.
전보다 나은 삶을 위해 안전지대에 가고 싶지만, 막상 가서는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려워 제자리에서 맴도는 건 아닐까.
내 생각을 뒷받침해 주듯 선택지가 떠올랐다.
[선택하시오.]
[구출한 대상을 데리고 호수로 향한다.]
[구출한 대상을 두고 위로 올라간다.]
버리느냐 챙기느냐.
저것만 봐도 그렇다.
호수로 향하라 했지, 호수를 건너라는 말은 없다.
“너희 단 한 번도 호수를 건너지 못한 거야?”
“건넜으면 진작에 이곳을 벗어났지!”
“호수의 끝은 본 적 있고?”
[모빌리딕이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눈에 보일 정도면 꽤 가까이 갔다는 건데 왜 더 가지 않았지?”
“그, 그야 우리를 도와주던 등반가가 포기하고 위로 올라가 버려서…….”
끝말을 흐리는 치히린.
눈을 가늘게 떴다.
진실이 섞인 거짓말.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호수를 건너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이 녀석들은 왜 매번 사람들이 올 때마다 도움을 요청할 리가 없다.
“아, 아무튼! 우리는 안전지대로 갈 거야.”
내 눈길이 부담스러운지 치히린이 손을 내젓는다.
[치히린과 모빌리딕이 공동 퀘스트를 부여합니다.]
[호수 건너기-일반 퀘스트]
-처음으로 치히린과 모빌리딕이 함께 구출됐습니다.
-호수를 건너 우물에 도달하십시오.
-보상: 두 NPC의 친화도 증가, 은혜 갚기.
-실패 시 두 정령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역시나.
퀘스트 내용조차 이상하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보상을 주니까.
냉정하게 보면 한번 보고 말 NPC와 친화도를 높이는 것보다는 실패해서 축복을 받는 편이 더 낫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걸리는 부분이 있었으니…….
‘처음으로 두 NPC가 구조됐다는 부분.’
구출에는 제약이 있다.
하나의 존재만 구할 수 있다는 것.
여태까지는 누군가는 내버려 두고 홀로 호수를 건너갔겠지.
대충 감이 온다.
“가자.”
“궤에에에.”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빌리딕이 반쯤 땅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껌뻑이고, 치히린이 날개를 파닥이며 녀석의 등짝을 때리고 있다.
“야야, 간다잖아. 마중이라도 해야지, 이 덩치만 큰 녀석. 흙이나 파 먹고 말이야. 얼른 안 움직여? 아까 약속한 보상도 줘야 한다고.”
[모빌리딕이 알고 있다고 구시렁댑니다.]
[조금 더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을 뿐이라고 전합니다.]
철퍽. 모빌리딕이 꼬리를 흔들어 흙을 튀기자 치히린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잘 노네, 잘 놀아.
그나저나.
“난 너희 두고 올라간다고 안 했는데?”
갈 때는 가더라도 해 줄 건 해 줘야지.
챙길 것도 있고.
“퀘스트 수락. 호수 건널 거니까 준비해.”
“지, 진짜?”
“어. 너희 둘 다 반드시 데려가 주지.”
[모빌리딕이 묘한 기대감을 가집니다.]
기대해라. 정말 할 생각이니까.
“중간에 두고 가려는 건 아니지? 이번엔 진짜 갈 수 있는데… 흙돼지도 같이 구해 줬구.”
[모빌리딕이 돼지가 아니라 고래라고 말합니다.]
[정말 할 수 있겠냐며 묻습니다.]
은근히 신경 쓰였는지 치히린이 머리맡을 날아다니며 쫑알댄다.
어우, 정신없어. 딱밤 한 대만 때릴까.
요정 하나만 해도 이러건만.
-촤아아아아
모빌리딕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 주변을 헤엄쳐 댄다.
이따금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기까지.
“아! 정신 사나워! 가만히 있어.”
버럭 소리 지르며 둘을 노려봤다.
움찔거리는 녀석들.
“진짜 데려간다고. 아예 약속할까? 너희가 주기로 한 것들 호수 건너편에 도착하면 줘, 됐지?”
이 정도면 믿겠지.
난 팔짱을 끼며 둘을 살폈고.
“으아아앙! 가자 흙돼지야!”
[모빌리딕이 길게 울부짖습니다.]
좋다고 서로를 껴안으며 울어 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확신이 든다.
녀석들이 내건 퀘스트.
그걸 클리어하기 위한 조건은 둘 모두를 데려가는 거다.
문제는.
‘이놈들을 어떻게 데리고 가냐는 거지.’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두 녀석에게 걸린 시스템 제약이 뭔지 알아야 한다.
* * *
45층에 들어온 지 이틀.
난 8번째 도전을 준비했다.
두 NPC에게 걸린 제약은 상당히 강력했다.
등반가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만 제약이 일부 풀린다.
한마디로 평소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다고 보면 된다.
모빌리딕이야 능력이 봉인된 시점에서 자력으로 호수를 건너는 건 불가능.
치히린의 경우 날 수는 있지만.
“10분밖에 못 난다고 했나?”
“응. 게다가 호수 중간쯤 지나면 폭풍우가 치잖아.”
대체 어떻게 돼먹은 호수인지 바닥도 없고 폭풍도 쳤다.
운 좋게 중간까지 갔다가 치히린이 그대로 날아가 버려 처음으로 돌아왔지.
다음부터는 아예 가방에 치히린을 넣어 버릴 생각이다.
머리가 아팠지만 탑에서 제대로 된 환경을 바라는 게 더 욕심이다.
작게 숨을 내쉬며 호수를 바라봤다.
정면으로 가로지르지 말고 옆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했지만 역시나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었으니, 목적지로 가려면 호수를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모빌리딕.
그나마 치히린은 가볍지만 이 녀석이 너무 무겁다.
얘를 들고 파이어 밤으로 날아가는 건 불가능.
처음 둘을 구했을 때처럼 아이스 브레이크를 사용해서 건너려 했지만 마력 부족으로 실패.
그물 같은 거로 모빌리딕을 가두고 물에 빠트린 채 끌어도 봤지만.
“아주 죽으려 했지.”
실제로 몸도 조금씩 흩어졌다.
보아하니 일정 구역을 넘어가면 몸을 유지하기 버거워하는 거 같다.
1/8 정도 몸이 흩어지면 위험 신호와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탓에 이 방법도 쓸 수 없었다.
결국에는 커다란 배를 만들든지, 아니면 놈을 가볍게 해야 한다는 건데.
혹시나 싶어 잘게 부순 다음 하나씩 옮겨 볼까도 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배를 만들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난 뒤편을 바라봤다.
꽤 넓은 필드에 자라난 나무들.
권능으로 살펴본 결과, 물에 띄울 수 있는 것들이다.
벌목하고 상점창에서 재료를 구매해 조잡하게나마 배를 만드는 건 가능하다.
문제는 하나.
폭풍.
제대로 된 지식도 가지지 않은 내가 만든 배가 폭풍을 견딜 수 있을까?
못할 거 같은데.
난이도가 높다.
하지만 걱정 마라.
“뭐든 하다 보면 방법이 생기기 마련.”
난 무식한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빌리딕, 네가 힘 좀 써야겠다.”
[모빌리딕이 고개를 갸웃합니다.]
이 녀석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