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189화 (189/740)

189화 안전 구역의 NPC

순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언덕 전체가 공동묘지나 다를 바 없는 광경.

탑이 생겨난 지 십여 년이 흐른 지금, 이곳을 거쳐 간 사람은 몇 명이었을까.

그중에서 헤이다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잡힌 이들은?

그들의 결말이 어땠을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조리 죽었다.

NPC가 등반가 한 명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물론 NPC라고 무작정 등반가를 공격하는 건 힘들지만…….

정당한 사유 없이 공격할 경우 항의를 통해 시스템 제약을 걸 수 있으니까.

시스템 제약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45층에서 이미 보지 않았던가.

모빌리딕과 치히린. 80층대를 넘어서 이들마저 멍청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한 제약이다.

그 말의 뜻은…….

‘헤이다는 시스템적으로 등반가를 공격할 수 있게 해 뒀어.’

알리오스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온 자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처럼.

헤이다의 영역은 필드 전체.

그녀를 피해 도망치라는 선택지까지 있는 만큼 헤이다의 역할은 분명했다.

등반가를 처리하는 것.

-꿀꺽

침을 삼켰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정신이 망가져 있다는 설명이 이런 거였나.

“넌 요정의 친구, 오델토의 친구. 친구의 친구는 친구, 내 친구. 헤헤헤.”

만약 내게 요정의 친구 칭호가 없었다면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을 게 분명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 하나.

‘헤이다는 친구에 집착해.’

수집욕? 아니면 집착?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를 납치하는 와중에도 덕춘이는 죽이지 않았다는 것.

“개구리는 네 친구지? 걔도 내 친구.”

어떻게 되먹은 사고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덕춘이가 내 펫이라 공격하지 않은 것 같다.

잘된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곳에서 꽤 오래 머물렀을 테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다른 건 몰라도 내 사람에게, 여기서는 개구리지만 아무튼, 해코지를 하면 나 역시 복수할 게 분명했으니.

“내가 뭐 잘못했어? 화 풀어…….”

잠깐 내 표정이 살벌해졌는지 헤이다가 우물쭈물하며 내 팔을 잡는다.

“화 안 났어. 잠시 생각한 거지. 오델토가 너에게 주라 한 게 더 있었거든.”

“그런 거야?”

“그럼.”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화내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지.

더덕이는 인벤토리에 넣어 두길 잘했다.

데리고 있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펫으로 분류되지는 않아서…….

“일단 이것부터 풀어 줄래? 이래서는 밖에 나갈 수가 없잖아.”

퀘스트에 집중하자.

히든 퀘스트가 발동됐다는 건 여기 어딘가에 오델토가 남긴 편지가 있다는 거였다.

이곳에 갇혀 있는 상태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으음, 그건 안 돼.”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 친구들 사라져. 데니엄이 그랬어, 착하게 있지 않으면 악귀가 친구들을 잡아간다고. 그거 거짓말이야. 내 곁에 없으면 사라지는 거야.”

이건 또 뭔 소리야.

“데니엄이 누군데?”

“날 데리고 온 사람.”

데리고 왔다?

어디서? 요정계를 뜻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어딘가를 말하는 건가.

“그 사람 여기 있어?”

“가끔 찾아와.”

이후에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딴소리를 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했지.

골 아프네. 내가 모르는 인물이 하나 더 엮여 있다.

데니엄? 내가 아는 NPC 중에는 없다.

그 말은 숨겨진 NPC 아니면 특정 이벤트가 발생할 때나 나오는 거라는 건데.

NPC는 이동이 자유롭지 않으니 그 녀석도 48층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생각하자.

일단 헤이다가 날 왜 묶어 뒀는지는 알겠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계속해서 친구들이 사라졌기 때문.

날 친구로 인식하고 있는 이상 곱게 풀어 주지는 않을 터.

그럼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헤이다 앞에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하자. 어차피 너도 밖으로 나가야 하잖아, 찾을 거 있다고…….”

“맞아! 오델토를 찾아야 해.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너 가면 나 혼자 있는데? 그럴 거면 같이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어?”

“으으음.”

고민에 빠진 녀석.

난 어깨를 으쓱였다.

“너 없는 사이에 누가 여기로 오면 어떻게 하려고. 악귄지 뭔지 오면 난 도망도 못 치는데.”

“그건 안 돼!”

빼액 소리를 지른 헤이다가 손을 펼친다.

그와 함께 무형의 에너지가 쇠사슬을 강타했고.

-콰창!

[재앙 포박용 쇠사슬이 파괴됩니다.]

발과 팔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깨졌다.

이게 부서지네.

난 뭔 짓을 해도 안 끊기던데.

손목이 약간 욱신거렸지만 움직이는 데 문제는 없고.

“덕춘이도 풀어 줘. 움직일 거면 같이 움직여야지. 내 투구도 주고.”

“아! 투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쓰고 있던 투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얘가 빼 둔 거겠지.

“투구는 왜 벗긴 거야.”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헤이다가 빤히 내 얼굴을 바라봤고.

배시시 웃었다.

“헤헤! 못생겼어!”

그 말을 남기고 쪼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

뭐지? 갑자기 빡친다.

나 정도면 준수하지 않나?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도 잠시.

-콰직!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덕춘이, 다른 손에는 투구.

“궤에에엑!”

반가운지 팔짝 뛰어 내게 달라붙는 녀석.

난 녀석의 턱을 긁어 주고, 투구를 착용했다.

이걸로 챙길 건 다 챙겼다.

남은 건 이 괘씸한 요정과 함께 밖으로 나가 오델토가 남긴 편지를 찾는 것뿐.

그건 자신 있다.

필드가 넓어 봤자 필드고, 내게는 숨겨진 정보를 보는 권능이 있으니까.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

이번에도 믿는다!

* * *

3일.

헤이다와 함께 필드를 누빈 지 며칠이 지났다.

성과는 전무.

필드 규모가 큰 것도 있지만.

“진짜 있는 거 맞나?”

“궤에에.”

필드가 파괴된 정도가 너무 심하다.

따지고 보면 헤이다는 나보다 훨씬 전부터 오델토의 흔적을 찾고 있지 않았던가.

나사가 몇 개 빠지기는 했어도 헤이다는 NPC.

단순히 돌아다녀서 찾을 수 있는 거였다면 진작에 찾았을 거다.

“와! 와! 목걸이다!”

건물 잔해를 뒤적거리던 헤이다가 만쯤 녹아내린 목걸이를 꺼내더니 방방 뛴다.

슥, 자신의 목에 걸기까지.

같이 있으면서 느낀 건데 헤이다는 장신구를 좋아한다.

굳이 장신구가 아니더라도 작고 귀엽게 생긴 거라면 다 좋아하는 거 같은데.

반쯤 터져 버린 곰 인형도 보물처럼 챙기는 걸 보니까.

“넌 그런 게 좋아?”

“응!”

좋다면 할 말이 없다만.

헤이다가 거처로 삼고 있는 폐가 안에도 그동안 모은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처음에는 쓰레기인가 싶어서 버리려 했지만 울고불고 난리 치는 걸 보고 포기했지.

더 이상한 건.

“내가 선물해 준 건 안 받았잖아.”

정작 내가 상점창에서 산 물건은 받지 않았다는 것.

새것은 싫다 이건가.

“선물 준 친구 사라져, 안 돼.”

이것 참.

뒤통수를 긁었다.

투구는 잠시 인벤토리에 넣어 둔 상태.

보는 사람도 없으니 잠시 벗어 둬도 괜찮다.

적당히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오델토가 준 선물은 받았잖아.”

“오델토 거는 괜찮아. 많이 줬지만 사라진 적 없어. 어디 갔을까?”

진실을 알고 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무의미한 발굴을 계속하면서 주제를 돌렸다.

그동안 헤이다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기억이 안 난다며 넘어간 것들이 대다수지만 몇 가지 종류는 제대로 답을 해 줬다.

그중 하나가 사라진 친구들에 관한 것.

“정원사 아저씨 착해. 나한테 나뭇가지랑 이파리 잔뜩 줬어.”

그건 그냥 짬 처리 한 것 같은데.

“밥해 주던 아줌마 딸이 아프댔어. 아줌마 손 거칠어. 나 간식 줬어. 애플파이 먹고 싶다.”

정원사에, 밥해 주는 아줌마라.

적어도 헤이다는 방치된 삶을 살지는 않았다.

“메이린! 걔 나랑 같이 놀아 줘. 책 선물해 줬다? 근데 나 글 못 읽어.”

헤이다가 말한 인물들 모두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고 한다.

빈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고 대부분 삭막했다고.

업무 외의 대화는 하지 않았고, 몇몇 헤이다를 귀여워하던 인물들도 동료의 만류에 거리를 뒀다나.

그럼에도 한두 명씩은 헤이다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이제 없어, 안 보여.”

어김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여기서 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데니엄은 안 사라졌어?”

“응! 데니엄은 계속 있어. 가끔 나랑 여행도 가. 사람 많아! 오델토도 사라지지 않아.”

데니엄.

지금까지 종종 찾아온다는 NPC만큼은 곁에 있었다.

이상하다.

어쩌면 헤이다와 관련된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대화를 나누며 친화도가 오른 탓인가.

“데니엄은 날 구해 줬어. 내가 있던 곳 사라졌거든. 인간계로 넘어왔을 때 만났어.”

평소에는 꺼리던 데니엄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데니엄은 귀족이었다고 한다.

세인턴 피스 제국의 백작.

나중에는 공작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거 같은데.

헤이다를 챙겨 주는 사람들이 왜 있었는지 알겠다.

그것보다 헤이다가 있던 곳이 사라졌다는 건.

‘그곳도 멸망했다는 거겠지.’

아마 헤이다는 멸망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 같다.

이미 여러 차례 보지 않았던가.

데미 데몬을 통해 인간계로 오려 했던 악마도 있었고, 악마와 계약해서 마계로 넘어가려던 녀석도 있었다.

알리오스도 조금 다르기는 해도, 탑을 오르지 않았던 페니를 아이템화 해서 탑으로 데려오지 않았던가.

“요정계랑 인간계 이어져 있어. 제약 있지만 넘어오는 거 어렵지 않아.”

본인 말로 들어 보니, 이쪽은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것 같고.

덜그럭.

난 들어 올렸던 바위를 내려놓았다.

필드에서 더 이상 시간을 보내는 건 시간 낭비다.

권능에 반응하는 것도 없고, 심심할 때마다 발동되던 행운 스텟도 잠잠하다.

그 말은 뭐다?

일반 필드에서는 성과를 얻기 힘들다는 것.

전부터 계속 신경 쓰이는 곳이 있었다.

‘안전 구역.’

유일하게 헤이다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

거기 말고는 답이 없다.

난 안전 구역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여전히 빛을 내뿜고 있다.

“헤이다, 저기로 가자.”

“안으로 못 들어가는데.”

“난 가능해.”

“안 돼! 내 옆에 딱 붙어 있기로 했잖아. 서, 설마 날 두고 가려고!”

바로 팔에 매달려서 날뛰는 녀석.

그럴 때마다 몸이 이리저리 휘청인다.

아따, 힘세네.

“오케이! 여기 덕춘이. 나 덕춘이 두고 어디 안 가.”

“그에에에.”

덕춘이를 헤이다의 머리 위에 올려 줬다.

불만스러운지 볼을 부풀리던 덕춘이가 손을 내젓는다.

얼른 가보라는 제스처.

“그리고 나 생각보다 강해.”

“진짜?”

미심쩍은 눈으로 보지 마라.

네가 너무 강한 거니까.

동층대를 오르는 사람 중에는 내가 탑이야.

“알았어. 여기 투구도 맡긴다, 됐지? 내 보물 2호야.”

1호야 덕춘이고.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이었지만, 평소 내가 덕춘이와 펠라인 세트를 얼마나 아끼는지 봐 왔던지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눈치였고.

“안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넌 못 하지만 난 뒤져 볼 수 있지.”

결정적으로 오델토의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빨리 나와야 해!”

“그럼 그럼.”

그렇게 헤이다의 손에서 탈출.

난 곧장 안전 구역으로 들어갔다.

[안전 구역에 입장했습니다.]

알림과 함께 안전 구역의 모습이 펼쳐진다.

밖에 있을 때는 빛의 기둥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기에 필드랑 비슷한 느낌일 줄 알았지만.

“여긴 멀쩡하네?”

예상과는 다르게 멀쩡하게 생긴 건물과 풀이 자라난 땅이 보였다.

공기마저 산뜻하다.

밖은 건조하고, 먼지 섞인 텁텁한 바람만 불었는데…….

그것도 놀랍지만.

“새로운 등반가로군. 하하. 좋아. 환영하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안전 구역에 NPC가 있다는 거였다.

그것도 내가 아는 인물이.

[데니엄- NPC]

-멸망한 제국, 세인턴 피스의 공작

-대륙 통일의 일등 공신.

.

.

.

-멸망을 불러온 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