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08화 (208/740)

208화 탑

현자가 말한 사람들, 모두 아는 이름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지.

대격변과 사회 붕괴, 탈영병과 정치계의 약화, 무간도나 다를 바 없는 시대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초인들 중 하나니까.

동시에 굴지의 대형 길드의 장을 맡고 있는 인물들이기도 하고.

대형 길드 1위인 구룡 길드의 수장이 구황모.

배문호는 2위 길드인 무학성, 김성탁은 3위 길드인 청룡 길드의 우두머리다.

성격은 다르지만 세계권에서도 알아주는 이들.

그뿐일까.

‘대형 길드장들은 공식적으로 50층대 이상, 어쩌면 60층대까지 올라간 이들이야.’

대격변 초기가 워낙 개판이어서 그들이 어디까지 올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저 그들의 인터뷰와 측근들의 발표 등을 통해 짐작할 뿐이지.

그들도 알 거다. 자신의 전력을 말해 봤자 좋을 건 없다는 걸.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대단한 놈들인 건 분명하다.

지금이야 어찌 됐든 그때 혼란했던 나라를 정리하고 지금의 헌터계를 정립한 건 분명한 일이니까.

“방금 말했던 이들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러지. 탑에 갇힌 후 넘치는 게 시간이니… 나도 오랜만에 말동무를 만나 반갑거든.”

의자를 끌고 와 앉은 현자가 나를 응시한다.

속을 알 수 없는 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음흉하다거나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느끼기에는 눈빛이 너무 맑았고, 뒤에서 수작을 벌이지 않아도 될 만큼의 강함이 느껴졌으니까.

“자네가 그들에 대해 묻고 싶은 이유는 대강 알고 있지.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말해 주겠네. 최하연, 김준수, 이재훈, 아르샤드, 왕소위…….”

그가 자신을 찾아왔던 이름들을 나열한다.

역시나, 하나같이 거물들이다. 피닉스, 산군, 이클립스와 같은 우리나라의 대형 길드장도 있었고, 해외, 동북아와 동남아, 인도의 대형 길드의 수장들 이름도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현재 대부분의 대형 길드장은 모두 초대 헌터였지.

탑이 생긴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새롭게 생겨난 대형 길드는 드물었다.

세계를 다 뒤져 봐도 5개나 될까. 대부분은 초창기에 만들어진 곳들이다.

세상이 바뀌자마자 이미 기득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건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최성모가 말했지. 잘못된 튜토리얼 공략법과 세이퍼 정책은 전 세계가 함께 꾸민 거라고.’

50층대에서 세력을 구축, 이후 60층대에서 만난 이들과도 대화를 나눴을 게 뻔했다.

지금의 시스템은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현자를 만났기 때문.’

과연 현자는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준 걸까.

탑에 대해, 헌터가 늘어남에 따라 멸망이 가속된다는 것도 존 트레일러가 말해 줬을 게 분명한데.

“자네는 이미 많은 걸 알고 있겠지. 그래. 그때 날 찾아왔던 이들 대부분은 큰 인물이 되었을 테니까. 어떤 의미로든 말이지.”

“예. 모두 대형 길드의 우두머리가 됐죠. 그들이 이룬 업적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뭐가 됐든 개판이었던 나라를 정상화한 일등 공신이니까. 이후 행적이 말이 안 됐을 뿐.”

“그런 것 같네. 13년이 흘러서야 멸망의 징조가 나타났으니. 내 예상보다도 더 오래 버텼어.”

그의 눈길이 덕춘이에게 향한다.

껄끄러운지 몸을 부풀리며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녀석.

“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잘은 모르죠. 갑자기 나타났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이야 탑을 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탑이라는 것 자체를 본 적은 없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저 초대를 받아 불려 왔을 뿐. 탑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과학적인 이론을 모르더라도 전자기기를 이용하고 가전제품을 쓰는 건 문제 없는 것처럼.

헌터가 되는 등용문, 그게 내가 아는 전부다.

현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사의한 것이지, 탑이라는 것은. 현자라고 칭송받던 나도 알지 못하던 것이었으니.”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찻잔이 나타난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를 암시하는 걸까.

난 조용히 찻잔에 입술을 댔다.

“혼란이 쌓이면 탑이 나타난다네. 여기까지 왔다면 악마나 천사들도 봤겠군, 다른 멸망한 세계의 흔적들도.”

“봤죠.”

관련된 NPC들과도 인연을 만들었고.

멸망한 세계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필드도 봐 왔다.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혼란이 쌓이면 탑이 찾아온다. 마계가 유독 빠르게 멸망한 데는 이유가 있지. 그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거든.”

킬더레스가 있던 제7마계는 천마대전을, 게일이 있던 제4마계는 통합 전쟁을 일으켰다.

이유가 무엇이든 전쟁과 투쟁의 역사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한창일 테니.

“굳이 대단한 게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세계 규모의 전쟁이면 더 많은 혼란이 생겨날 뿐. 작게는 연인과의 다툼, 개인의 갈등으로도 혼돈 수치는 축적되지.”

토옹.

그가 티스푼을 기울이자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찻잔에 파문을 만든다.

“세계마다 견딜 수 있는 혼돈의 총량이 있다네. 단 한 방울이라도 임계점을 지나면 끝. 거대한 혼돈이 찾아와 모든 걸 지워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거지. 그게 세계의 규칙이야.”

“리셋시킨다는 거네요. 그럼 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거 아닙니까.”

애초부터 리셋이 목적으로 탑이 생성되었다면 무슨 발악을 하더라도 못 피하는 거 아닌가?

100층을 클리어하면 멸망을 피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릴카가 말했던 것처럼 100층을 클리어한 존재는 없었으니까.

있더라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결코 희망찬 이야기가 아니건만 현자는 웃고 있었다.

“난 탑이 혼돈이라 한 적이 없다네, 일부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무슨 소리죠?”

“세상은 조화로워서 튀어 나가는 부분이 있으면 들어가는 부분도 있지. 빛과 어둠, 불과 물. 자네가 사는 곳에서는 음양의 조화라고 부르던가.”

어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복잡해진다.

“간단한 이야기네. 혼돈의 반대되는 것은 질서. 탑이 왜 있겠나, 시스템은 왜 존재하고. 혼돈을 막기 위함이네, 일종의 억제제지.”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내용.

말 그대로 세상을 리셋해 버릴 정도의 큰 혼돈이 찾아온 거였다면 굳이 이렇게 어려운 방법을 쓸까?

대비할 시간도 없이 게이트를 터트리며 쓸어버리면 끝인데.

탑을 오르면서 느낀 게 있다.

분명 어렵고 힘들지만 깰 수 있는 방법은 존재했고, 어떤 방면에서는 친절하기까지 했다.

도전과 보상에 대한 것도 확실했으며 각각의 층대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더욱 강해져서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말이지.

머리가 얼얼하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버그가 왜 생겼는지도 이해가 돼.’

내게 나타나는 일그러진 시스템창.

일명 버그.

그것이 나타났을 때는 하나같이.

‘탑의 규칙에 엇나가는 혼란을 일으켰을 때였어.’

두 개의 권능을 가졌을 때도.

40층, 선택 구간에서 모든 선택지를 무시했을 때도.

주어진 길을 간 적이 없다.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메시지.

-당신은 단 한 번도 탑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유형이 추가됩니다.

-당신의 유형은 ‘정의할 수 없는 혼란’입니다.

혼돈을 억제하던 질서.

질서가 만든 탑과 시스템.

그걸 거부한 나.

시스템에 균열이 가는 건 당연했고, 그 결과가 버그.

여기까지만 보면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들은 위험천만한 행동에 불과했지만.

“100층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혼돈 수치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은 결국 탑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도전자 역시 혼돈이 있어야 한다는 거겠죠?”

결국 혼돈 역시 탑의 일부인 건 확실했다.

씨익, 존 트레일러가 입꼬리를 올렸다.

“보기보다 명석한 구석이 있었구만. 맞네, 아무도 100층을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지. 혼돈의 구간.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아. 적어도 어우러질 만한 구석이 있어야지.”

그가 손가락을 들었다.

“혼돈 수치 100점은 그 기준이야. 100층에 들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쉽지 않은 일이지. 나도 92층까지 오르면서 64점을 모은 게 전부니까.”

92층까지 오른 현자가 고작 64점.

혼돈 수치를 얻기란 그만큼 힘들다는 건가.

심지어 100점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조건. 막상 100층에 입장하고 나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난 주먹을 쥐었다.

미지의 대상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할 수 있다. 나라면 가능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더 컸다.

이미 진작부터 혼돈 수치를 얻었고, 시스템에 영향을 줘 버그까지 만들어 냈으니.

어차피 무한 코인을 얻은 시점에서 선택지는 없다.

“자네는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군.”

“제가 좀 똘망똘망합니다.”

“뻔뻔함도 때에 따라서는 좋은 덕목이지.”

허허 웃은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자네가 쓰는 스킬, 권능, 모두 이질적인 것이지. 몬스터와 게이트처럼 말이야. 그래, 자네한테도 똑같이 말해 주는 게 맞겠군.”

일전, 최성모에게도 들었던 말.

그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혼돈이 커질수록 멸망은 빨라진다.

헌터는 이질적인 존재이며, 헌터가 늘어날수록 멸망 또한 가까워진다.

높이 오른 이가 나오면 그만큼 강력한 괴수들이 등장한다.

그렇기에 초기 헌터들은 계획을 세웠다.

튜토리얼 구간을 넘지 못하면 헌터로 인정되지 않는 것을 이용.

잘못된 튜토리얼 공략법을 알리고, 몬스터에 대한 공포와 탑 등반의 위험을 퍼트렸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체계적으로 훈련시킨 루키들을 육성하여 탑을 공략하고자 했고.

그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는 대형 길드의 권력이 확고해야 했다.

정보 또한 새어 나가지 않게 막아야 했고.

덤덤히 차를 마신 현자가 나를 바라본다.

“자네는 그들을 원망하나?”

“하죠. 놈들 때문에 죽었었으니까. 다른 이들이 못 올라가게 막은 것도 짜증 나고. 이해는 합니다만 그래 봤자 변명으로밖에 안 들려요.”

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맞을 수도 있다는 걸.

그런데…….

“지들이 뭔데 사람을 걸러 냅니까. 공들여 키운 루키? 아니 뭐, 지금 길드장 하고 있던 양반들은 루키라서 50층 너머로 올라섰답니까? 적어도 남 앞길은 막지 말았어야지.”

결국 실제로 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잘못된 공략으로 떨어진 자 중에 탑을 정복할 만한 인재가 없었을까?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가?

한치의 사리사욕도 없이 순순히 대의를 위해 그런 짓을 했을 가능성은?

글쎄.

루키니 뭐니 해도 결국은 자기 사람들.

탑 클리어 이후의 미래까지 염두에 둔 거겠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이 잘 해결됐을 때의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건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래도.

“잘못됐을 경우의 대가가 인류면 안 되는 거잖습니까.”

지들이 뭔데 남의 목숨을 베팅해.

정말로 세상이 망하는 꼴을 보기 싫었다면 그러지 말아야 했다.

“자네는 우리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그야…….”

어째서인지 웃고 있는 그가 질문을 던졌으나 난 답하지 못했다.

이들은 어째서 멸망을 피하지 못한 걸까.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한가득하다.

90층대에 오른 이들도 찾아보면 꽤 있고.

99층까지 등반한 NPC도 드물지만 존재한다.

“내가 있던 곳도 그렇고, 마계도 그렇고, 다른 세계도 영웅, 정령왕, 혹은 그에 필적할 만한 강한 존재가 있었지. 자네의 세계는 어떤가?”

없다.

애초에 마법이니 정령이니 그런 건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거였으니까.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맹수를 상대로 맨손으로 싸워 이기지는 못한다.

사자나 호랑이, 코끼리는 당연히 안 되고.

개한테 물려 죽는 사고도 빈번히 일어나는데 현자가 말한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

총을 가지고 올라오더라도 마찬가지.

당장 50층대에 나오는 몬스터만 하더라도 총탄 따위는 먹히지도 않는다.

“그대의 세상에는 비상식적인 대상과 맞서 싸울 영웅이 없네.”

그가 티스푼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개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NPC 모두가 겪었지. 그거 아나? 홀로 고립된 난 호문쿨루스를 만들어 위로 올라가고자 했네.”

안다.

아케인 젬의 정보에 나와 있었으니까.

결국은 실패로 끝났지만.

“보다시피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강자는 몰라. 공략법이든 뭐든 필요가 없거든. 무력으로 뚫으면 그만. 그렇게 홀로 나아가다 보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지.”

탑은 혼자 깰 수 없다.

정확히는 혼자만으로는 멸망을 막을 수 없다.

존 트레일러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였다.

“확실한 개척, 그를 위한 시간을 벌어 줄 계략, 공공의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뭉치는 것. 나를 찾아온 이들에게 알려 준 건 그런 것들이라네.”

미간을 찌푸렸다.

다 좋다, 좋은데…….

“그래서 탑이라는 공공의 적과 싸우기 위해 대형 길드가 생긴 걸 받아들이라는 건가요.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내가 한 일이 부정당하는 것까지는 상관없다.

하지만 그들이 한 행동들을 합리화시키는 건 용납하기 힘들다.

난 주먹을 쥐었고.

“무슨 소리인가? 내가 말한 공공의 적은 대형 길드를 말한 것인데.”

존 트레일러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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