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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39화 (239/740)

239화 사이렌이 울리고

잘못 들었나?

펠라인 세트를 달라고요?

내가 이거 모으려고 어떤 고생을 했는데.

어림도 없다. 이제 2개만 더 모으면 끝인데 팔 수는 없지.

“전 펠라인 세트를 완성하고 싶어서요. 그건 좀 힘들 거 같습니다.”

“우연이구만. 나도 펠라인 세트를 완성하고 싶거든.”

“하하. 지금까지 하나 모으셨는데 5개 모은 제가 더 가능성 있지 않을까요? 나중에 다 모으면 사진이라도 보내 드리겠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 자고로 작품이란 실물을 봐야 그 가슴이 벅차오르는 법이야.”

“물건은 만들어진 역할을 다해야 의미가 있죠. 놔두고 감상만 할 거면 그림이나 모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단순히 감상만 할 생각은 아니라네. 연구하고 파헤쳐서 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쓰일 거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화.

말이 안 통한다.

대장장이이자 장인이고 기술자인 만큼 드워프의 보는 눈은 확실하다.

베힐탄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NPC로 이루어진 거대 집단 프램버그를 이끌고 있으니까.

아, 골 아파.

기껏 펠라인 세트의 소재지를 찾았는데 오히려 내 걸 내놓으라고 하고 있으니.

오케이. 단순히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없다는 건 알겠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을 써야지.

“좋습니다. 그럼 거래를 하죠. 프램버그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 대가로 펠라인 파츠를 주시죠.”

“허허. 나도 같은 생각일세. 자네는 등반가이고 100층까지 오르고 싶겠지. 내가 도와주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어.”

100층은 안 그래도 올라갈 생각이다.

절박하기도 하고.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시점.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고, 무한 코인이 있는 이상 100층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가더라도 너무 늦는다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었고.

그래서 더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펠라인 세트만큼 좋은 장비는 없으니까.

하나하나의 등급은 낮을지 모른다.

당장 펠라인의 노란 몸통도 등급만 따지면 E급이다.

주황 오른 다리는 F급이고.

따로 사용했다면 쓰레기나 다를 바 없는 스펙이지만 합쳐지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는가.

막강한 방어력과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옵션, S급 스킬까지 겸비한 장비가 되지 않았던가.

파괴 불가, 자가수복, 쾌적, 감각 공유.

귀한 옵션이다. 핥짝이가 사용하고 있는 은갈치 정장처럼 졸업 아이템으로 충분하다는 말.

그러니 베힐탄이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반대로 그가 거절하기 힘든 조건을 보일 자신도 있고.

시작은 내가 먼저.

“프램버그는 처음이지만 오면서 대충 사정을 들었습니다. 화조국을 통해 수입하고 있는 생명수. 그 제작자가 접니다. 제조법을 알려 드리죠. 로열티를 받겠다는 게 아닙니다. 완전히 넘기겠다는 거지.”

소파에 등을 기댔다.

“NPC가 자아를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한 법. 포인트를 아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습니까”

“생명수라… 설마 자네가 제작자일 줄 몰랐군. 어쩐지 물량이 한정되어 있다 했어. 터무니없이 적었지.”

그렇겠지. 나라고 하루 종일 포션만 만들고 있는 건 아니니까.

짬짬이 계속해서 만들고 있기는 했지만 혼자서 하는 만큼 무한정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다른 걸 떠나서 그는 프램버그를 관리하는 대표자.

개인의 욕심 때문에 더 나은 길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고 생각했는데.

“흥미로운 제안이네만 거절하지. 몇 가지 이유가 있지. 첫 번째.”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우리가 기존에 마시던 정화된 물과 생명수. 차이가 있기는 하네만 엄청나진 않아. 그랬다면 드워프는 진작에 멸종했겠지.”

그건 맞는 말이다.

생명수를 만들어 판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두 번째. 자네가 제작법을 알려 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화조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어찌 됐든 거래 품목이고 상품을 통해 화조국이 이득을 취하고 있으니 말이야. 일방적으로 거래를 해지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지면 되는 문제 아닌가요?”

“자네도 자네대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금천황후가 욕심이 많고 자기 것을 잃는 걸 극도로 싫어하니 말이야. 문제는 우리…….”

베힐탄이 창밖을 가리킨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 노동자로 보이는 이들이 기계 팔에 태엽을 먹이고 있었으며, 골렘의 배를 따 증기로 감자를 굽고 있다.

고름이 묻어 나오는 다리를 천으로 닦아 내고, 연고를 바르고, 포션으로 물집이 올라온 살갗을 문지른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품과 의약품, 각종 재료 일부, 하다못해 똥 닦는 휴지마저 수입에 의존해. 이곳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오염된 땅 프램버그니까.”

꽈득. 그가 주먹을 쥔다.

“화조국은 우리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집단이야. 거의 물건 대부분을 수입한다고.”

“화조국에서 보복을 가할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고작 상품 하나 놓쳤다고요. 말이 되나요? 단순히 도움을 받는 입장도 아니고 그들 역시 프램버그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판매할 텐데요.”

“명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의도가 어떻든 간에 겉으로 보기에는 자네를 빼앗아 화조국과의 거래를 끊게 만든 걸로밖에 안 보여. 게다가…….”

그가 어깨를 으쓱인다.

“실상을 알아도 모르는 척 제약을 가하겠지. 그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다시 쓸 기회니까.”

“…그런.”

NPC 집단의 관계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그들 역시 서로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어떤 암투를 벌일지 알 수 없는 거였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생명수 제작법은 크게 메리트가 없지. 더 나은 게 없다면 내 제안대로 하는 게 어떤가? 내 조건을 들어보면 분명히 혹할 텐데.”

-콰르르릉

베힐탄이 품에서 꺼낸 버튼을 누르자 벽 한쪽이 열린다.

숨겨진 전시장.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것들로 가득했는데.

“오우야.”

나도 모르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은 각종 장비와 아티팩트.

[사라진 왕의 전투 도끼 (SS)]

-대륙을 정벌한 왕, 그레힐 턴은 황제로 즉위하기 전 행적을 감췄습니다.

-그가 전쟁에 사용했던 도끼를 남기고 말이죠.

[지하 용의 마지막 숨결 (SS)]

-죄를 지어 영겁의 시간을 지하에서 보내야 했던 드래곤 펄 힐스곤.

-그녀가 남긴 숨결에는 강력한 저주와 마력이 담겨 있습니다.

-저주에 강한 내성을 지녔다면 모든 스텟이 큰 폭으로 향상될 것입니다.

[요정왕이 훔친 무언가 (SSS)]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요정.

-그들의 왕이라면 스케일도 크겠죠?

-대륙을 멸망시킬 뻔한 장난. 그가 숨긴 건 무엇일까요?

-강력한 봉인이 걸려 있습니다.

[예쁜 쓰레기 (S)]

-질투에 눈의 먼 마법사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구한 영웅 중 하나이기도 했죠.

-하지만 그의 외모는 추했으며 은연중에 배척받았습니다.

-그녀가 질투한 대상은 같은 영웅이자 배신자였던 성녀.

-세상이 밉네요. 성녀를 예쁜 쓰레기로 만들고 사라지겠습니다.

-구원의 마법사, 벨 카스트라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성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최소 S급. 대부분 SS급을 자랑했으며 간혹 SSS등급의 물건까지 전시되어 있다.

가품이 아니다.

권능을 통해 보이는 걸로 봐서 틀림없는 진품.

그런 아이템이 못해도 스무 개.

“자네가 보는 건 일부에 지나지 않지. 일종의 과시용으로 가끔 상대방 기를 죽이고 싶을 때 보여 주는 거거든.”

“은근 효과 있겠네요. 거래하러 왔다가 저런 거 보면 자신감 사라질 거 같은데.”

“맞아. 그래서 화조국 사람이 오면 종종 보여 주지. 문제는 그거 때문에 금천황후가 더 욕심을 드러낸다는 거지만 말이야.”

머리를 긁적인 베힐탄이 턱으로 벽면을 가리킨다.

“파츠당 내가 가진 물건 2개씩으로 계산하지. 자네가 가지고 있는 펠라인 세트가 5개니까 총 10개는 가져갈 수 있겠군. 저것만으로는 아쉽다 생각하면 말하게. 개인 창고가 따로 있으니. 거기서 골라도 상관없어.”

이런 미친. 이런 물건이 더 있다는 건가.

펠라인 세트 다섯 개를 포기하는 것으로 S급 이상 아이템 10개를 얻는다?

심지어 그중에는 SSS급도 섞여 있는데?

“그에에에.”

“잠깐만 덕춘아, 솔직히 고민될 만하잖아.”

날 잡아 흔드는 덕춘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결코 흔들리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이번 유혹은 상당히 강력하다.

아니, S급 정도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SSS급은 좀…….

58층까지 올라왔는데 SSS급 아이템이라고는 릴카가 사용하던 물건밖에 못 봤다.

애초에 NPC가 소유하고 있는 거 말고 SSS급 아이템을 본 적은 있나?

드랍템이나 퀘스트, 유적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맞나?

그런 의문이 들 정도.

어쩌면 이럴 때 아니면 못 구하는 걸지도 모른다.

양심 터진 생각일지는 몰라도 SSS급을 싹 긁어모으면 5개 정도는 챙길 수 있을 거 같은데.

따로 창고도 있다 했으니까 그 이상도 가능할지도 모르고.

등반하는 데 있어 엄청난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그에에에!”

“아 왜애, 좀만 있어 주라 좀.”

“그엑!”

-철썩!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녀석.

요놈의 개구리가 밥때가 됐나 왜 이래?

턱 돌아갈 뻔했잖아.

지금 어? 등반가로서 중대한 선택지를 고르고 있는데 말이야.

“설마.”

덕춘이 이 녀석!

나한테 깨달음을 주려고 했던 건가?

덕춘이를 들어 올렸다.

그래. 눈앞의 유혹에 잠시 흔들렸다.

높은 등급의 아이템. 중요하다. 확실히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강한 이들이 아이템에 연연하던가?

킬더레스도 그렇고, 알리오스도 그렇고, 99층까지 올랐지만 특별한 물건은 사용하지 않았다.

눈앞의 베힐탄 역시 이런 보물로 값을 치르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지 않은가.

물론 이들은 NPC고 더 이상 등반을 할 수 없는 몸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다르게 말한다면 펠라인 세트가 고등급 아이템과 비교해서 꿇리지 않을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52층, 현자가 했던 말.

‘스테이터스에 아이템 옵션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장비를 벗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본인의 힘은 본인이 결정짓는다는 것.

후후. 그래. 까짓건 아직 올라갈 길이 한참 남았는데 조급해하지 말자.

언젠가 좋은 아이템을 얻을 기회를 얻을 거다.

그 전에 나 스스로부터 강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도 하고.

덕춘이 이 녀석! 나한테 큰 교훈을……!

“궥!”

-짜아아악!

-촤아압!

냅다 혓바닥으로 뺨을 연달아 갈기는 녀석.

정신이 번쩍 든다.

이번 건 좀 진심으로 때린 거 같은데.

거짓말이 아니라 목뼈가 살짝 돌아갔다.

얼얼한 볼을 만지기가 무섭게 덕춘이가 창밖을 가리킨다.

뭐가 있나?

난 고개를 돌렸고.

“뭐야, 저게.”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보라색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척 보기에도 정상적인 기체는 아니다.

불길하기 짝이 없었으며, 미약하지만 가래 끓는 듯한 괴음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위이이이이잉!

알 수 없는 형상에 경계심이 생기던 중 사이렌이 울린다.

붉은 조명이 점멸하고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베힐탄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급하게 외투를 걸치더니 마스크를 장착한다.

-쿠르르릉, 쿵

전시장이 닫히며 다시 벽으로 변한다.

“이런! 벌써 그때가 됐나. 아직 시간이 좀 남았을 텐데.”

“무슨 일입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하세! 지금은 가만히 있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대표실을 박차고 나간다.

잘은 몰라도 비상 상황인 건 알겠다.

그런데…….

“사람이 참 신기한 게 하지 말라면 하고 싶단 말이지.”

“그에에에.”

너도 그렇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덕춘이와 주먹을 맞댔다.

내려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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