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47화 (247/740)

247화 특권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보면 머리가 멈춘다.

빨리 정신을 차리냐 못 차리냐의 차이지.

난 다행히 전자에 가까웠고 상황 파악에 나섰다.

어렵지 않다. 눈에 보이는 걸 기반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내 가슴에도 못 미치는 키의 드워프가 쌍도끼를 들고 은갈치 헬멧과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녀석을 노리고 있는 거 아닌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건 알록달록한 나와 개구리고.

“…하하, 제가 방을 잘못 찾아왔나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인정하자. 뭔 상황인지 모르겠다.

자고로 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껴드는 건 좋지 않은 선택.

자연스럽게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버리지 말아 줘! 돌아와!”

“야! 그럴 때 아니라고!”

다급히 나를 붙잡는 녀석들.

반대로 인자하게 웃은 베힐탄은 내가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허허, 잠깐만 나가 있게나. 뒷정리까지 3초면 충분하다네.”

“오케이, 스탑.”

안 되겠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진짜로 목을 날려 버릴 거 같다.

안으로 들어가 베힐탄의 도끼를 내렸다.

“도끼는 거둬 주시겠어요? 일단 친구들이라서요.”

“은인의 친구였단 말인가, 으으음.”

잠시 미간을 좁힌 베힐탄이 냥펀과 핥짝이를 노려봤고.

“친굽니닷! 아주 끈끈한 사이라구요!”

“같이 한솥밥 먹던 사이지. 그렇고말고.”

둘은 열심히 나와의 사이를 어필했다.

같이 밥을 먹기는 했다.

다 뱉어서 그렇지.

여전히 베힐탄은 심기가 불편한 듯했고, 난 지그시 도끼를 밀며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둘은 크게 나쁜 짓을 할 애들은 아니라서요. 날도 좋은데 잠깐 기분 전환이나 할까요? 저랑도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

뭐가 됐든 난 프램버그를 구한 몸.

드워프들의 대표인 베힐탄이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죽은 줄 알았던 내가 돌아오기도 했고.

보상에 대한 거든 드워프들에 대한 거든 풀어야 할 게 많은 상태.

내 뜻을 알아들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은인을 앞에 두고 실례했군. 자네가 돌아왔는데 피를 볼 수는 없지, 하지만…….”

-삐익

베힐탄이 테이블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의 경비들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전원 무장. 강렬한 적의가 느껴진다.

“이 둘을 놔둘 수는 없으니 지하 감옥에 넣어 두도록 하지. 자네의 친구들을 험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네만 이건 우리한테도 중요한 문제거든. 다 설명하겠네.”

그의 손짓에 경비대가 핥짝이와 냥펀을 끌고 간다.

발버둥 쳤지만 열댓 명의 NPC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내게 헬프 콜을 외쳤지만 잠시 놔두자.

오해가 있으면 풀면 되는 거고 드워프들이 이렇게 나온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래도 한마디는 해 줘야지.

“나중에 찾아갈 테니까 가 있어.”

“꼭이야! 믿고 있을 거라구!”

냥펀의 비명 같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대표실이 닫힌다.

잠깐의 정적.

이거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투구를 벗고 소파에 앉았다. 그 역시 잔 두 개와 술병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고.

“한잔하면서 하지.”

“좋죠.”

“그에에.”

“씁!”

은근슬쩍 덕춘이가 술잔을 탐했지만 어림도 없지. 바로 쳐 냈다.

넌 가만히 있어라. 안 그래도 파워 업 한 녀석이 취하면 수습할 자신이 없다.

술을 가득 따른 그가 잔을 내민다.

가볍게 건배.

“크으.”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짜릿한 감각.

속이 뜨끈해지면서도 텁텁한 듯 묵직한 향이 올라온다.

부드럽기보다는 단단하고 거친 느낌.

나쁘지 않다. 묘하게 끌린다고 해야 하나.

“귀한 술이네. 어딜 가도 구하지 못하는 것이니.”

“술은 잘 모르지만 제 입에는 맞네요. 열심히 구른 다음 한잔하기 좋은 술?”

“흐하하하! 제대로 봤군. 우리들의 전통주지. 땅을 파고 대장간 일을 하고 마시면 기가 막힌다네.”

“그런 거였군요. 그런데 왜 못 구하는 거죠? 만들면 될 텐데.”

“그야 이건 프램버그가 오염되기 전 수확한 감자로 만든 마지막 술이거든. 프램버그가 멸망을 피하는 날 마시려고 아껴 뒀지.”

베힐탄이 입꼬리를 올린다.

“이 저주받은 땅에도 농작물이 자라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지. 그리고 델버튼이 사라진 지금,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다시 그 모습을 보게 될 걸세. 자네 덕분이야.”

그런 거였나.

여러 의미가 담긴 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가 구한 탐사대원들과 다른 이들을 소개해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거 같고.”

“밖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니까요.”

행인들한테 둘러싸여서 환호받고 싶지는 않다.

싫은 건 아닌데 드워프들이 좀 과격한 면이 있어서.

“그건 나중에 비밀스럽게 진행하도록 하고. 먼저 자네 친구들 이야기부터 해 볼까. 안 그러면 계속 신경 쓰일 게 뻔하니 말이야.”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이야 나중에 챙겨도 되지만 멤버들은 챙길 수 있을 때 챙겨 줘야 한다.

엉뚱한 곳에서 죽으면 나중에는 나 혼자 탑을 오를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내 멘탈이 터지지 않을까.

냥펀이 잡힌 거 자체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속이 화조국이고 프램버그는 그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짐작하고 있겠지만 화조국은 온전한 생명수를 팔지 않았지. 그거 자체는 그럴 수 있어. 물량이 턱없이 부족하니 희석시킬 수는 있지. 정말 문제는 원본 상태의 생명수를 보여 주지 않았다는 거야.”

합당한 분노.

존재 자체를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당연히 희석시키지 않은 상태로 구매했겠지.

식수가 아닌 치료제로.

“정식으로 금천황후에게 항의했네. 그들과의 거래를 끊으면 힘들어지겠지. 여기 있는 의자, 책상, 선반까지도 화조국이 아니면 구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죽어 간 동족의 원한을 풀 수 있다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을 걸세.”

“전쟁이요? NPC끼리 그런 게 돼요? 이동도 할 수 없을 텐데.”

“원칙상으로는 안 되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

이런 전개는 상상도 못 했네.

탑에 있는 거대 세력, 화조국과 프램버그의 전쟁이라.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겠는데.

주변에 영향도 많이 끼칠 거고.

문제는 드워프라는 종족 성격이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거라는 것이다. 내가 겪어 본 드워프는 제법 터프한 편이라서.

“물론 이제 막 평화를 찾은 마당에 그러고 싶지는 않지. 동족을 구하려고 온갖 짓을 다 했는데 무기를 쥐고 싸우라 하고 싶지는 않아.”

“말로 풀 수 있으면 푸는 게 좋겠죠.”

“안 그래도 금천황후가 해명하겠다고 대리인을 보냈지. 방금 자네 친구라 한 자 말이야. 그쪽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오더군. 웬 등반가가 왔나 했더니만 금천황후의 계승자였어.”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는 거죠. 계승자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금천황후가 단순히 변명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다른 화조국 사람을 보냈을 거다. 혹여나 죽더라도 피해가 적도록.

베힐탄과 마주해야 하니 어느 정도 직책이 있는 자를 보내겠지만 전쟁보다는 나을 터.

중요한 건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던 걸 자신의 약점인 냥펀을 보냄으로써 진심을 내비쳤다는 거다.

계승자는 NPC가 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니까.

잠깐만…….

“그래서 죽이려 했던 거군요.”

“그것만 한 복수가 없으니까.”

“이야기는 들어 봤고요? 괜히 그랬다가 진짜 전쟁이 터지면 어쩌게요. 전쟁이 아니더라도 화조국에서 드워프들의 계승자를 공격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럴 일은 없어. 우리는 계승자를 고를 수 없거든. 분노로 시야가 좁아졌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계승자를 정할 수 없다?

NPC면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도대체 프램버그는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 걸까.

“이상하다는 표정이군. 맞아. 이상하지. NPC라면 누구든 평등하게 계승자를 고를 기회가 주어지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것 말고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NPC가 모여 있는 것도 처음 보고 유적에 터를 잡은 것도 처음 봅니다.”

“그뿐이겠나. 아이도 있고, 노인도 있는걸.”

“그건 상관없지 않나요. 따지고 보면 시간 지나면 늙는 거고 아이도 생길 수 있는 거죠.”

“아니, NPC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늙지도 않지.”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탑에 속한 존재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라…….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탑에 속한 이들이 늙지 않는다고요? 그럼 어떻게 NPC 중에 노인이 있습니까. 탑의 초대를 받지 못했을 텐데.”

당장 우리도 탑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나이가 한정되어 있다.

17세에서 35세 사이.

한마디로 지금 탑을 오르고 있는 이들은 절대 노인이 되어 탑에 갇힐 수 없다는 이야기.

그뿐만일까. 여기에 계속해서 들었던 의문이 있었으니.

“노인뿐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죠. 애초에 NPC가 되기 위해서는 상위층에 도달해야 하잖아요. 불가능은 아니라 하더라도 희박한 확률일 텐데요.”

단순 피지컬로 따지면 요정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는 덩치와는 별개로 강력한 힘이 있다.

객체에 따라서는 헤이다처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기도 하니까.

한마디로 종족값 자체가 인류를 뛰어넘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

베힐탄이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세계가 똑같은 조건으로 탑의 부름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건 아나?”

“무슨 소리죠?”

“탑의 초대를 받는 조건을 말하는 거야.”

초대를 받는 조건이라.

구체적인 건 모른다.

나이 제한이 있다는 것과 대형 길드 소속 헌터들이 비교적 높은 확률로 탑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정도.

“공통적인 조건이 하나 있지. 극심한 스트레스,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거나 받고 있을 것, 혹은 한 마리 이상의 마물을 죽였거나. 조건을 만족시킨 게 많을수록 빨리 초대받지.”

그런 조건이 있었단 말인가.

전혀 몰랐다.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머릿속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기도 했다.

대형 길드에 들어간 이들이 탑의 부름을 일찍 받는 이유.

그야 실전에 준하는 훈련을 거듭하니까. 어쩌면 진짜로 고블린 같은 약한 마물을 대상으로 싸웠을 수도 있고.

나와 멤버들이 초대된 이유도 납득이 된다.

탈모맨이야 94특임대로 활동했으니 당연한 거고.

냥펀은 안전에 대한 갈망이 생길 정도의 사건·사고를 겪었다.

나 역시 짐꾼 노릇을 하던 중 쓰레기 헌터들에게 걸려 몬스터와 놈들을 죽인 후에 초대를 받았고.

핥짝이는 잘 모르겠다. 국대 출신이라고 했으니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 같기는 한데. 개인 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니까 깊게 생각하지는 말자.

대격변 이후 개인사 없는 사람이 더 드물어졌으니.

난 베힐탄의 말에 집중했다.

“다른 조건은 세계마다, 솔직히 말하면 같은 세계에서 살더라도 종족별로 조건이 달라. 차별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드래곤종은 아예 조건이 없어 전원 초대를 받지.”

“전원이요? 새끼까지 말입니까?”

“헤츨링만 돼도 작은 마을 정도는 초토화시킨다네.”

종족값에 따라 조건이 달라진다는 거군.

“정령 쪽은 좀 심해. 최하급은 아예 초대를 못 받고 하급 정령은 아주 드물게 초대를 받아. 대충 중급 이상부터 탑을 오를 수 있다고 봐야지.”

“기회조차 없다는 거군요.”

“너무하다 생각하는가?”

너무하다라…….

탑이라는 알 수 없는 것에 내 가치관을 끼워 맞추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법.

“58층까지 등반했다면 어느 정도 느꼈을 거야. 탑은 등반가들이 위로 가기를 바라고 있네. 거지 같고 위험하며, 뚫고 갈 방법 따위는 전혀 없어 보여도 착실하게 등을 떠밀고 있어.”

그 부분은 동의한다.

튜토리얼 구간을 시작으로 각성을 위한 임시 안전지대, 성장 지대를 거쳐 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치된 층들.

심지어 안전지대 다음의 첫 번째 층마다 내성 스킬북을 숨겨 두기까지 했다.

안전지대에서 행해지는 이벤트 역시 마찬가지.

10층의 투기장, 20층의 디펜스, 40층의 이면의 성소, 50층의 선발전.

30층은 대표할 만한 이벤트가 없기는 했지만, 팀플레이를 앞둔 이들을 위해 가장 많은 편의 시설이 준비된 곳이었다.

도전과 보상.

적응과 성장.

의심과 생존.

갖가지 조건이 만들어져 살아남은 이들을 더 높은 곳으로 보내고 있다.

그 사람이 탑이 마련한 것들을 충분히 흡수했다면 말이다.

“이블아이, 자네가 속한 세계의 조건은 어땠는가?”

“17세에서부터 35세까지가 초대 대상입니다.”

“최하급 정령은 제외. 17세도 안 된 애송이도 제외, 36세 이상도 제외. 왜 그런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지?”

전이라면 대답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생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이니까요.”

“정답.”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는다.

“사실 탑은 누구보다 등반가들이 정상에 오르기를 기대한다네. 나 역시 한때는 99층까지 올랐었던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99층이라니, 대단하군요.”

“대단할 거까지야. 찾아보면 더 있을 텐데.”

“몇 명 만나기는 했습니다.”

“NPC들과 인연이 좀 있나 보군. 그럼 그것도 알겠어, 99층까지 오른 이에게는 몇 가지 특권이 주어진다는 사실.”

특권.

특권이라…….

아뇨, 모르는데요.

아무래도 오늘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어 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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