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76화 (276/740)

276화 61층 클리어

베이어드가 건네준 물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접혀 있는 쪽지와 수첩, 손가락 두 개 사이즈의 패, 그 외 잡다한 것들.

잡다한 건 진짜 잡다한 거니까 패스 하자. 포션이나 긴급 치료용 붕대, 먹다 남은 군것질거리를 봐서 뭐 하겠나.

가장 먼저 살핀 건 편지.

[통역 (A) Lv.10]

40층에 오르며 얻었던 공용 스킬이 있어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다 권능까지 사용했으니까.

[유헤다의 편지]

-탑 숭배 집단의 골드 계급 유헤다가 보낸 편지.

-직인이 찍힌 공식 명령서입니다.

유헤다?

덕분에 다른 숭배자를 알게 됐다. 유헤다라는 NPC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골드 계급이라는 건 나름대로 급을 나눈 건가?

게다가 직인이라.

편지 우측 아래, 그들의 문양이 찍혀 있다.

왼쪽에는 초승달, 오른쪽에는 태양. 그 사이, 중앙에 우뚝 솟은 탑.

직관적이네. 누가 봐도 ‘탑 좋아요.’ 이러는 거 같아서 말이지.

[카메라 (C) Lv.3]

편지 전체를 찍었다.

내 기억력도 한계가 있으니까. 더불어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여 주려면 이러는 게 최선이다.

필요한 작업을 마치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분명 공식 명령서라고 했으니 제법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지 몰랐다.

하지만 심플한 걸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탑 숭배자라고 친근하게 지내는 건 아닌지 내용은 짧았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거다.

최근 위로 올라오는 등반자가 늘고 있으니 예의 주시할 것.

저번 보고에 따른 행동 방침.

3번 마을 파괴 및 12번 마을 폐기.

“그냥 무작정 저지른 게 아니라는 거군.”

마을에 대한 테러는 테일러 개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탑 숭배 집단에서 떨어진 명령이었지.

저번 보고라고 하는 걸 보니, 내가 이곳에 오고 에밀라가 공략법을 찾았을 때 정보를 전달한 거 같은데.

이게 가능한가?

예전부터 궁금했다. NPC는 어떤 식으로 교류하는가.

이상하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서로를 알고 있는 경우가 제법 됐다.

릴카야 워낙 돌아다니니까 그렇다 치고.

킬더레스 역시 투기장 연합회 회장인 만큼 투기장이 있는 곳이라면 움직일 수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플레타가 있던 34층에도 왔었지.

아, 거기에는 벨라랑 다른 NPC들도 왔었네. 경기 관람 같은 건 움직일 수 있는 건가?

19층의 휴고와 29층의 마그네타도 서로 잘 만나고 있었지 아마?

둘이야 같은 교단 사람이기도 하고, 성검의 능력을 사용한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NPC의 생태계는 어렵다.

시스템의 지배하에 있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감도 안 잡히는 상황.

“테일러는 어떻게 이 편지를 받은 거죠?”

“방법이야 여러 개지. 등반가를 통해 전달할 수도 있고, 아니면 화조국 같이 가끔 들르는 이들에게 부탁할 수도 있거든.”

베이어드의 말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가장 기본은 퀘스트를 통해 등반가를 이용하는 법.

탑 숭배 집단에 등반가가 섞여 있다는 말에 왜 있나 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시스템의 승인하에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게 등반가 아닌가.

심지어 퀘스트 형식으로 마음껏 지원해 줄 수도 있다.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

NPC는 제약이 많지만 등반가는 서로 싸우고 죽여도 별다른 페널티가 없다.

끽해 봤자 안전지대에서 살인을 하면 살인자 칭호가 생겨 이름이 공개된다는 것 정도?

아니, 이것도 나니까 최악의 페널티인 거지 다른 사람은 신경도 안 쓸 가능성이 높다.

쯧. 혀를 차고 있는 찰나.

“편지 뒷면에 도장이 찍힌 걸로 봐서는 등반가보다는 갈매기인 거 같은데요.”

“갈매기요?”

내가 아는 그 갈매기? 끼룩끼룩?

영문을 몰라 어벙하게 에밀라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추가 설명을 내놓는다.

“대충 탑 안에 있는 우체국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등반가는 만날 일이 거의 없죠. NPC를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집단이니까요.”

“프램버그가 물품을 생산하고, 헬다잉 키친이 출장 뷔페를 운영하는 것처럼 편지를 전달해 주는 곳이 갈매기라는 거죠?”

“그렇죠.”

확실히. 편지를 뒤집어 보자 갈매기가 그려진 도장이 찍혀 있다.

탑 안에는 수많은 세력이 있다.

우편을 보내 주는 집단이 있지 말라는 법도 없지.

탑에는 탑만의 사회 시스템이 있으니까.

등반가와 달리 NPC에겐 이곳이 집이고 마을이고 나라다.

갈매기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봐야겠다.

혹시나 이곳이 탑 숭배 집단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괜한 의심은 아니다.

내가 알기로 탑 내부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물건을 전하고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은 화조국이다.

그들은 탑 숭배자가 아니었고.

내가 숭배 집단의 리더라면 가장 먼저 했을 일은 탑 곳곳에 퍼져 있는 숭배자와의 연락망을 만드는 거다.

지원을 하는 용도일 수도 있지만 처벌을 하기 위한 장치기도 하다.

우체국, 갈매기는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집단.

나라면 무조건 접촉했다.

이건 차차 알아보도록 하고.

“골드 계급이라는 말이 걸리네요. 숭배자라고 다 같은 위치는 아닌 거 같고.”

“이게 단서가 되겠지. 놈들이 말하더군. 어차피 자기들을 처리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솔직해지라던데, 탑이 사라지면 죽는 건 마찬가지라면서. 머저리들이지.”

베이어드가 증명패를 내밀었다.

테일러와 그의 동료 둘이 남긴 물건.

전부 다 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브론즈 증명패]

-탑 숭배 집단의 브론즈 계급에게 주어지는 패.

브론즈라.

좋게 생각해도 결코 높은 계급은 아닌 거 같은데.

지시를 내렸던 유헤다가 골드 계급.

패를 뒤집어 보자 탑 모양의 그림이 보인다.

몇 개의 칸으로 나뉜 탑에는 단어가 적혀 있었으니.

“다이아, 골드, 실버, 브론즈.”

아마 이게 숭배자들의 구조라는 거겠지.

테일러의 증명패는 브론즈에 색이 입혀져 있다.

특이한 건 그림 맨 꼭대기에는 아무런 것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것.

맨 밑에는 별다른 계급 없이 ‘따르는 자들’이라고 적혀 있다.

숭배자기는 하지만 따로 계급은 못 받은 이들을 지칭하는 건가.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 아닌가? 다단계나 그런 곳에서 볼 수 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물건들도 뒤져 봤지만 이게 전부다.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고 어느덧 해는 져 노을만 남기며 모습을 감추는 중.

슬슬 밤이 찾아올 거다.

내가 할 일을 하자. 숨만 쉬어도 시간은 흐르니까.

-짝짝

가볍게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나를 바라보는 4쌍의 눈.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훨씬 많았는데…….

쓴맛을 삼키며 반파된 마을을 한 번.

저 멀리 꿈틀거리는 메스토카를 바라봤다.

“준비합시다. 61층에서 벗어날 때가 됐어요.”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됐겠다, 일은 마무리 지어야지.

이런저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우선 순위는 등반이다.

베이어드와 에밀라, 마을 사람 1, 2도 지긋지긋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더덕이, 이리 콤.”

“끼아아아.”

손가락을 까딱이자 더덕이가 달려온다.

이번 일에는 더덕이의 힘이 필요하다.

아니, 앞으로도 61층을 오를 이들에게는 더덕이를 비롯한 맨드레이크가 큰 도움이 되겠지.

“오늘 밤은 길겠네요.”

“동감이다.”

“그래도 아침은 밝겠죠.”

우리는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전력을 가다듬었다.

* * *

닭은 날이 밝았음에 기뻐하여 운다고 했던가.

“살았다아!”

“우리가 해냈어! 으아아아! 살았다고!”

메스토카의 습격이 지나고 동이 트는 시간, 마을 사람 원과 투가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것을 내질렀다.

온몸은 만신창이.

쥐고 있던 무기는 이가 나가고, 방어구는 찌그러져 굴러다녔다.

그나마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던 마을은 이제 와서는 돌무더기로 전락.

평원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이 온기와 빛을 뿌리자 시커멓게 타 버린 대지도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후우, 어떻게든 넘어갔구나.”

벽에 기댄 채 숨을 고르던 베이어드마저 드물게 입꼬리를 올린다.

“이렇게 발버둥 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바닥에 대자로 뻗은 에밀라 역시 마찬가지.

나도 투구를 벗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절로 나온다.

요즘 몸을 너무 막 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보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싱싱한 영약 하나 먹으면 좋겠…….

“끼에?”

“아, 미안. 나쁜 생각을 좀 해서.”

영약 말고 영단 하나 먹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뭐, 성공했으니 다행이지.

망할 메스토카 놈들, 징그럽기 짝이 없다. 도대체 몇 마리를 잡은 건지 모르겠네.

솔직히 말하면 못 버틸 줄 알았다.

덕춘이와 더덕이까지 없었다면 큰일 났지.

마을을 포기하고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시간을 끄는 식으로 싸워서 다행이다.

실제 바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61층에서는 밤에만 공격해 오니까.

“클리어 소식이 없군.”

“아직 증명하지 않았잖아요.”

베이어드의 말에 에밀라가 힘들게 일어선다.

그녀가 간 곳은 덕춘이와 더덕이가 있는 곳.

이번 일의 일등공신.

천적 관계에 있는 더덕이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면 시간도 못 끌었겠지.

조금만 더 고생하자.

다들 한곳에 모였다.

검증 시간이다.

조금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더덕이와 덕춘이가 메스토카의 알을 찾아내도록.

감염자를 확인하도록.

베이어드는 예외다. 몸속의 알을 봉인해 버렸으니까.

“어때, 입맛 좀 다셔져?”

“끼에에.”

“그에에.”

긴 침묵을 깨고 더덕이와 덕춘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감염자가 없다는 뜻.

이미 일대에 있는 알은 둘이 전부 먹어 치운 상태.

이곳은 안전하다는 뜻이었고, 마을 사람들 역시 멀쩡하다는 의미였으니…….

[재앙을 극복했습니다.]

[61층 클리어!]

[12번 마을 인원이 안전지대로 전송됩니다.]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구한 자! 혼란이 잠듭니다.]

[혼돈 수치 +1점]

-파아아앗!

포탈이 생성되었다.

베이어드와 에밀라, 마을 사람들을 감싸는 빛.

피곤에 절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다들 환하게 웃는다.

“이거 신세 많이 졌는걸. 동생도 함께였다면 좋으련만…….”

“듀레이는 마음에 담아 둬야죠. 다른 마을 사람들도요. 이블아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이블아이, 고맙다! 너랑 쁘찡 연합? 누구든 만나면 잘해 줄게!”

“덕분에 살았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이들.

등반가와 달리 마을 사람들은 바로 전송되는 건가.

반쯤 흐릿해진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고.

“나중에 드루이드나 엘프를 만나면 보여 줘요. 도움이 될 겁니다.”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에밀라가 내게 뭔가를 던졌다.

그걸로 끝. 마을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난 반사적으로 잡은 물건을 살폈다.

[로얄 드루이드의 펜던트 (AA)]

-로얄 드루이드에게만 주어지는 펜던트.

-신목의 열매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자에게 주기도 합니다.

-드루이드나 엘프에게 준다면 보답해 줄지도?

특별한 옵션은 없지만 따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당장은 힘들 거 같지만.

이걸로 포탈은 만들었다. 혼돈 수치도 1점 얻었고.

60층대부터 혼돈 수치를 얻는다더니 이런 거였구만.

그건 그거고.

-우우우우웅

“이상하다 했지. 그동안 각 층대의 첫 번째 층은 항상 뭐가 있었거든.”

유독 61층만 숨겨진 스킬북이 보이지 않았다.

60층부터는 없는 건가 싶었는데 설마 클리어 후에 나타나는 걸 줄이야.

모두가 떠난 마을.

[12번 마을이 사라집니다.]

[일주일 후, 새로운 마을이 생성됩니다.]

그 흔적이 지워지더니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앙에는 스킬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뭘 주려나. 생각해 보면 매번 1층에서는 내성 스킬을 얻었다.

내성 스킬은 어지간한 건 다 얻지 않았나?

모르겠다. 알아서 주겠지.

난 어깨를 으쓱이며 스킬북을 집었고.

“아, 맞네. 이것들도 있었지.”

기쁜 마음으로 스킬을 익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