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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83화 (283/740)

283화 62층 클리어

8번 마을.

집주인 없이 자유롭게 집을 쓴 지 3일 차.

계획을 위해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 안에만 있었다.

밖이었다면 공격 스킬 등 범위가 넓은 스킬들의 레벨을 올릴 수 있었겠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당장 쓰기에는 충분할 만큼 레벨이 높기도 했거니와, 아쉬운 대로 ‘심연의 눈동자’나 ‘집착하는 망령’ 등 실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을 훈련했으니까.

이번 계획이 성공하려면 내가 집 안에 있어야만 한다.

왜냐…….

‘적어도 62층에서는 무너지는 돌탑이 건물 내부에 생성되지 않으니까.’

아무리 탑이 개판으로 돌아간다지만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등반가가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멸망해 가는 세계에 적응하고 이겨 낼 수 있도록 갖은 시련을 주는 것.

NPC가 퀘스트 등을 통해 우리를 돕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해야 했다.

등반가가 아닌 NPC한테도 말이지.

“가자, 덕춘아.”

“그에에.”

덕춘이를 머리에 올리고 밖으로 나섰다.

며칠 동안 잘 쉰 덕분에 컨디션은 최고.

난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앞으로 나아갔다.

시야가 없어서 불안한 느낌은 있었으나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겍, 그엑.”

“왼쪽? 오케이.”

덕춘이가 머리를 두들기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목적지는 마을 광장.

어느 정도 걸어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며칠째 이러고 있으니 죽을 맛이군.”

“버텨. 이게 약속이잖아.”

“악! 발 밟은 놈 누구야!”

“어제 내 쪽에 소변본 녀석 걸려만 봐. 그대로 갚아 줄라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8번 마을 주민들.

마을 사람 전원을 광장에서 생활하도록 시켰다.

무너지는 돌탑이 생길 때까지, 천으로 눈을 가린 채로.

실수로라도 눈을 떠도 돌탑을 못 보게 말이지.

무려 3일 동안 노숙을 하며 이동조차 못 하고 생활을 이어 나간 NPC들.

곤욕스러운 일이겠지만, NPC들 역시 한때는 탑을 올랐던 만큼 이 정도 인내심과 행동력은 있다.

한 가지 신경 쓰였던 게 있다면 혹시나 마을 사람들 사이에 탑 숭배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인데, 무사히 작전이 진행된 걸 보니 이번에는 없던 모양이다.

혹시 모르지, 있는데 가만히 있는 걸지도.

괜히 방해하겠다고 설치다 돌탑을 보면 본인 목숨이 날아가는데.

탑 숭배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무작정 등반을 방해하는 건 아니다.

결국에는 NPC로 평생 사는 게 그들의 목적이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삶에 대한 욕구가 큰 사람들이다.

“잠시 지나갈게요, 조심하시고.”

“그에엑.”

인파를 헤치고 덕춘이가 이끄는 대로 나아갔다.

내 목소리를 알아차린 이들이 자리를 비켜 준다.

덕분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며.

“이거군.”

“궥.”

난 돌탑을 만질 수 있었다.

힘을 줘 밀어 봤지만 밀리지 않는다.

돌멩이가 떼어지지도 않고.

덕춘이가 맞다고 울기도 했으니 확실하겠지.

입꼬리가 올라간다.

다행히 의도대로 진행됐다.

62층 NPC들은 돌탑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집에서 주로 생활한다.

돌탑은 목격자가 있는 곳에 나타나고.

그런 와중에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기는, 높은 확률로 돌탑이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지.

돌탑의 생성 위치를 유도한다.

이게 내 계획의 핵심이었다.

“여러분, 뒤로 물러서십쇼. 괜히 근처에 있다가 뭐라 하지 마시고.”

내 지시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이동한 타이밍.

[프로즌 브레이크 (S) Lv.1]

-콰드드드득!

프로즌 브레이크로 무너지는 돌탑을 가뒀다.

게다가 이어서 보물 주머니에서 커다란 보자기를 꺼내 덮어 버리기까지.

혹시 몰라 상점에서 여러 개를 사 놨다.

이중 삼중으로 돌탑을 가리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꾀죄죄한 얼굴로 서 있는 사람들.

얼음을 뒤덮은 천.

눈을 깜빡여 봤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마을 광장에 생성된 돌탑을 가리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었고…….

“다들 눈 떠요! 다음 단계로 갑니다!”

“오오오오오! 성공인가!”

“빌어먹을 햇빛아, 반갑다!”

“비켜! 바로 시작할 테니까.”

내 외침에 마을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었다.

환호성이 들리는 가운데 앞으로 몇몇이 나선다.

여기서부터는 이들의 차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스킬은 많은데 뭔가를 봉인하거나 건축물을 짓는 건 없더라고.

“고생했네.”

“뭘요, 마을 사람들이 고생했죠.”

자리를 비켜 주자 이를 드러내며 웃은 NPC가 돌탑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그동안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대지의 손아귀 (S) Lv.MAX]

-쿠드드드득!

주먹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흙과 돌로 이루어진 손이 튀어나오더니 돌탑을 움켜쥐었다.

그게 시작.

분풀이라도 하듯 마을 사람들이 스킬을 쏟아 냈다.

“아주 부술 기세로 해!”

“누가 와도 저건 못 뚫는다.”

“아티팩트 있는 사람 없어? 이럴 때 쓰지 또 언제 쓰냐고, 꺼내!”

“이것도 쓰자. 비켜 봐!”

[유리 봉인 (S) Lv.MAX]

[비틀린 공간 (SS) Lv.MAX]

[거구귀의 침묵 (S) Lv.MAX]

[다섯 요정의 손아귀 (S)]

[웅크린 천사 (SS)]

·

·

·

온갖 봉인 스킬과 인지 저하 스킬, 반영구적인 결계 마법진과 아티팩트가 돌탑을 뒤덮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어떤 공격을 받아도 돌탑이 드러나지 않도록.

MAX 레벨에 오른 스킬들과 고등급 아티팩트들, 정교한 마법진들로 도배된 마을 광장이 하나의 금지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광장을 바라보는 순간.

[재앙, 무너지는 돌탑이 활동할 수 없습니다.]

[기능 제한]

[시스템이 현 상황을 파악합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긴장한 채 메시지를 살피는 사람들.

나 역시 주먹을 쥔 채 결과를 기다렸다.

사실 내가 한 짓은 편법에 가까웠다.

재앙의 영향을 받지 않는 덕춘이를 이용해 돌탑의 기능 자체를 막아 버린 거니까.

나니까 할 수 있는 방법.

재앙을 마주하고도 살아남는 방법을 알아낸 것도 아니다.

재앙을 통해 발생하는 혼란을 잠재울 방법을 찾아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가 돌탑을 가두고 있는 동안 62층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

선택하라.

이것 또한 공략이라고 인증할 것인지, 62층을 포기할 것인지.

답이 나와 있는 선택지였고.

[62층 클리어]

[8번 마을 주민이 안전지대로 전송됩니다.]

[편법도 방법.]

[혼돈 수치 +5점]

[포탈이 생성됩니다.]

[일주일 후, 새로운 무너지는 돌탑이 생성됩니다.]

“됐다!”

“우오오! 거지 같은 62층도 이제 끝인가!”

“우리가 해냈어!”

클리어 인정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서로를 끌어안고 난리를 치는 게 보기 싫지는 않았다.

그만큼 기쁘다는 뜻이었으니까.

60층대에 있는 NPC 대부분은 오랫동안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하루하루 불안감을 느끼며 사는 게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고맙네, 자네 덕이야.”

“덕분에 살았군.”

“별말씀을, 제가 말한 거만 잘 지켜 주세요.”

“걱정 마, 약속은 지키거든.”

서서히 몸이 흐릿해지는 마을 사람들.

이들에게 요구한 게 더 있다.

61층에서 만난 이들한테도 했던 말인데, 혹시나 연합 사람들을 만나면 편의 좀 봐 달라고 했다.

어디 안전지대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몇 층으로 갈지도 모르고, 어느 서버로 갈지도 모른다.

조금은 두루뭉술한 이야기였으나 그거면 충분했다.

그건 그거고.

“둘도 잘 가고요. 이것들은 잘 쓰겠습니다.”

난 호호문과 벤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뭐라 말은 못 하고 똥 씹은 표정으로 눈을 돌리는 녀석들.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됐다, 앞으로도 고달플 테니까.

날 버리고 도망친 녀석들.

엿 먹은 만큼 돌려주는 게 내 신념이었고, 당연하게도 시스템에 항의를 넣었다.

두 녀석에게 시스템적 제약이 걸리는 건 기본이었고.

[심해룡의 영단 (S)]

-심해에서 살아가는 용의 내단으로 만든 영단.

-비린내는 걱정 마세요! 잘 씻었습니다.

[계약 파기의 가위 (SS)]

-일회용 아티팩트.

-단 한 번, 계약서를 파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애지중지 아끼던 아이템도 뜯어 낼 수 있었다.

S급 영단. 성능은 의심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계약 파기의 가위.

이게 대박이지.

등급부터가 어마어마하다. 일회용 아티팩트 주제에 SS등급이라니.

일회성 무적 아티팩트도 S급이었는데.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다.

탑에서 계약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탑이 공증해 주니까.

확실한 페널티를 먹일 수 있다는 거다.

그걸 끊어 버릴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사기 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들 잘 가요.”

-파아아앗

빛이 터지며 전송이 끝났다.

동시에 마을 광장에 있던 돌탑도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사용했던 스킬들과 아티팩트도 증발.

남아 있는 거라고는 나와 덕춘이.

-우우우웅

돌탑 대신 생성된 포탈.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62층은 클리어했는데 공략 올릴 만한 게 없네.

다들 영물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건 좀 고민을 해 봐야겠다, 어쩌면 답이 생길 것도 같아서.

일단은 할 일부터 마무리해야지.

아직 쉐핀에게 받은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했다.

뭉그적거릴 필요 있나. 바로 끝내면 되지.

“외곽 쪽이라 했었지?”

“그엑.”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 * *

일주일 후에나 돌탑이 생성되는 만큼 신경 쓸 건 없었다.

간혹 몬스터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칼질 몇 번이면 해결됐다.

마을 외곽, 난 켄락의 흔적을 찾았고.

“그래도 뼈는 남아서 다행이네.”

뼈 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몬스터가 물어 간 건지 없는 부위도 있다.

뿔도 부러졌는지 안 보이고.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대충이라도 수습해 줄 수 있으니까.

그냥 이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줄까도 싶었으나, 8번 마을도 사라졌고 쉐핀도 활동 영역이 있어 이곳까지 못 올 걸 생각해 챙기기로 했다.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도 따로 챙기고.

수습을 마치고 쉐핀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클리어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쉐핀이 나와 있다.

돌탑이 재생성되기까지 일주일.

쉐핀뿐만 아니라 다른 NPC들도 오랜만에 마음 놓고 밖을 돌아다니고 있겠지.

“설마 옆 마을에 갔다가 층을 클리어할 줄은 몰랐네요.”

“운이 좋았어요.”

진짜로, 덕춘이 덕이었지.

툭. 덕춘이의 코를 두드려 주고 그녀에게 켄락의 뼈를 담은 보자기를 내밀었다.

내용물을 알 리 없던 쉐핀이 안을 들췄고.

“이건…….”

“켄락의 유골입니다. 가져오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유품은 따로 챙겨 놨어요.”

희미하게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산 자가 알아서 해결을 봐야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묻지는 않았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었고, 여전히 해골을 바라보는 그녀의 감정을 흐릴 만큼 눈치가 없지도 않았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그녀가 해골을 내려놓고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천족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퀘스트가 클리어되며 떠오르는 창.

보상 아이템과 천족 호감도 상승.

여기까지는 일고 있던 거였는데 말이지.

[당신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레지스탕스 하얀뿔 소속 NPC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그 외, 소수의 레지스탕스 NPC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이건 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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