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대림원
나와 모르토는 숲 안으로 이동했다.
아직은 64층에 대해 잘 모르는 만큼 길은 모르토가 인솔했다.
시체를 짊어지고 있는 것도 있고, 주변을 관찰하려는 의도도 있어 발걸음은 느긋했다.
피 냄새가 나는 상태로 시야가 트이지 않은 숲속에서 천천히 이동한다는 건 몬스터의 표적이 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되는 거니까.
나와 NPC인 모르토가 있는 만큼 어떤 놈이 나와도 상대할 수 있다.
굳이 우리가 아니더라도…….
“대림원은 수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야.”
수인 NPC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는 곳에 몬스터들이 활개 칠 리가 없다.
“혹시 들어 봤어?”
“조금은.”
“의외인걸. 대림원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이 몇 없기도 하고, 안전지대에 있는 수인들도 많지는 않아서.”
모르토 역시 대림원 안에 들어가는 게 부담스러운지 발걸음을 늦추며 잡다한 이야기를 건넸다.
나야 좋지, 그만큼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으니까.
“수인은 특성이 다양해서 무리 짓는 일도 있고 따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지만, 한 가지 규칙이 있지. 동족을 버리지 않는다.”
모르토는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난 눈썹을 까딱일 뿐이었다.
동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게 좋기는 한데 실제로 그러냐가 문제지.
당장 이 녀석도 동족을 죽인 것 같고, 릴카도 버림받았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만나는 수인마다 규칙에서 벗어났다.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갈 생각.
모두가 규칙을 잘 지키고 법을 지키면 범죄자가 왜 있고 다툼이 왜 있냐.
으레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툭. 앞에 박혀 있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입을 열었다.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지? 우리로 치면 법을 어기는 거랑 같아 보이는데.”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이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 다른 사람들은 처벌에 동의하고 집행하고.”
“처벌이라는 게 형태가 없어 보이는데?”
“맞아. 누군가는 돈을 원하고, 누군가는 신체 일부를 원하지. 노역을 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고.”
“저지른 죗값만 치른다면 뭘 시켜도 된다는 거네.”
“다른 사람들이 들어도 합당한 수준이라면 말이야.”
합당한 수준이라.
참으로 미묘한 단어다.
각자 기준이 다른 만큼 같은 처벌이라도 생각이 갈릴 테니까.
더 신기한 건 그 수준을 당사자들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인원이 집단으로 판단하고 강제한다는 것.
나쁘지는 않다.
피해자가 힘이 없을 경우 당사자끼리 해결을 보라 하면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도 비슷하다.
법을 어기면 경찰이라는 공권력이 투입되는 형식이니.
이쪽은 인원수가 적어서 그런지 좀 더 단순화된 거 같지만.
적당히 우리 세계와 비교하며 이해를 하는 중에도 모르토의 말은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사이 좋게 지내려고 노력해. 같이 사는 거 얼굴 붉힐 일 없으면 좋은 거고, 혹시나 사고를 쳐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 쪽이 처벌을 덜 받거든. 결국에는 주변 사람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니까.”
“맹점이군.”
“맹점이지.”
피해자, 혹은 그의 친족이 강력한 처벌을 원해도 가해자가 마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면 약한 처벌로 대체될 수 있다는 이야기.
물론 처벌을 완전히 안 하지는 않겠지만 피해자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겠지.
‘부당하다며 원한 품을 사람도 있겠는데?’
깔끔하게 벌 받고 끝내면 좋겠다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나.
조금이라도 편하고 덜 손해 보려고 발버둥 치는 게 사람인데.
종족은 상관없다. 말 그대로 현자가 아닌 이상에는 자기 안위가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
걸리는 건 이 녀석이 왜 굳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점을 말해 주냐는 건데.
“혹시 너, 거기서 왕따냐?”
“…친구가 적을 뿐이야.”
“몇 명? 한 명?”
“두 명 같은 한 명. 친구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얼마나 가까운지가 중요한 거지!”
괜히 발끈해 소리치는 녀석.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팩트로 때린 모양.
입을 꾹 다문 녀석이 코를 찡그렸다.
탑에 갇힌 지 꽤 됐을 텐데 이 모양이라고?
어쩐지 나한테 변호해 달라고 할 때부터 이상했어.
믿어 주는 사람이 많았다면 떳떳하게 사고였다고 말하고 말지.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클리어 하면 위로 올라갈 사람을 붙잡아다가 내 편이 돼 주라고 하지는 않잖아.
벌써 머리가 아파 온다.
어쩌면 진짜 사고였어도 이놈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처벌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이 녀석과 그 친구라는 녀석의 도움을 받아 범인을 찾아내는…….
잠깐만.
“야, 설마 네 하나뿐인 친구라는 게 내 어깨에 있는 이 사람 아니지?”
내 물음에도 답이 없다.
아, 제발.
얼른 아니라고 해 줘.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을 기다렸고 녀석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베히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모르토가 차갑게 식어 가는 베히가를 쓰다듬었다.
눈앞이 아찔하다.
너무하네, 일부로 이러는 건가?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판을 짠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에에.”
덕춘이는 한숨을 내쉬었으며, 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일이 꼬이려면 얼마든지 꼬일 수 있잖아.
진정하고 딱 하나,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물어보자.
“그, 베히가는 대림원에서 어떤 사람이지?”
“나마저도 신경 써 줄 만큼 착한 모두의 친구.”
오케이, 망했다.
마을에 들어가면서 ‘이 녀석이 범인입니다!’라고 외치면 될 거 같다.
변호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 같은데.
괜히 얘 편들다 눈 밖에 나지 말고 깔끔하게 퀘스트를 접는 게 나을 거 같다.
“후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 그럴 수는 없는 노릇.
퀘스트라는 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62층에서 만났던 놈들도 퀘스트를 파기했다가 페널티를 받았다.
등반가의 경우는 신뢰를 잃게 된다. 이후 다른 NPC들에게 퀘스트를 받기 힘들어진다는 것.
사실상 등반 중 받는 보상 대부분이 퀘스트 보상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강력한 페널티다.
이런 이유 때문에 릴카가 악명이 높았지.
클리어 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난이도의 퀘스트를 강제로 부여했으니까.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수많은 피해자가 생겼을 거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네가 아는 거 싹 다 말해. 지금부터 잡담 금지다.”
“무작정 그렇게 말하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둘이 이곳에 있던 이유, 평소와 달랐던 점, 너 또는 베히가의 심경 변화, 변수가 될 수 있는 것들. 소원 들어주는 연못 같은 거 말이야.”
이런 것까지 말을 해 줘야 하나 싶었지만 할 거면 구체적으로 말해 주는 게 낫겠지.
생각해 보니 이 녀석 소원 들어주는 연못에 대해서도 말하라 했는데 자연스럽게 딴 이야기만 줄줄이 내뱉었다.
개인적인 원한, 이런 게 아니라 재앙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차라리 답이 생길지도 몰랐다.
재앙은 혼란을 일으키는 법.
60층대에 머무는 이들이라면 더욱 잘 알겠지.
녀석의 평판이 어떻든 간에 재앙과 엮였다고 주장한다면 그들도 무시할 수 없을 거다.
적어도 내가 겪었던 60층대 NPC들은 그랬다.
그들의 목적은 나와 같았으니까.
이곳을 벗어나는 것.
“어?”
우뚝.
난 자리에서 멈춰섰다.
위화감이 든다.
61층, 메스토카와 싸우던 사람들.
62층, 무너지는 돌탑을 피해 숨어 있던 사람들.
63층, 쌍두귀의 뒤를 쫓아야만 했던 사람들.
그동안 겪어 왔던 60층대 NPC들과 64층의 대림원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모르토, 대림원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거지?”
만약 이들이 등반가를 도와 재앙을 극복했다면 대림원은 유지될 수 없다.
재앙을 극복한 보상으로 안전지대에 전송되었을 테니까.
대림원은 수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 지금까지 이곳이 유지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인가.
난 모르토를 노려봤고.
“말해, 재앙과 대림원의 관계를.”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분위기를 감지한 녀석이 눈을 굴린다.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불안감.
의심.
혹시나 엿듣는 사람이 있는지를 걱정하는 거 같았다.
입이 달싹거리는 걸 보아하니 녀석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고.
“조용히 들어.”
손으로 입을 가린 녀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64층 숲 내부.
다른 층과 달리 대규모 형태의 마을이 있었다.
그런 마을이 수십 개.
각 부족에 맞게 나누어진 마을을 전부 합치면 하나의 도시나 다를 바 없었다.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는 이들.
대림원.
수인들의 집단이자 나름 탑 내부에서 영향을 끼치는 세력이었다.
화조국이 NPC들에게 공급하는 채소와 과일, 곡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육류 대부분이 이곳에서 나왔다.
같은 이유로 헬다잉 키친과도 인연이 있는 곳.
숲 깊숙한 곳, 산길이 험해지는 곳을 따라 계단식 논밭이 있었으며 인위적으로 깎아 만든 평지에는 과수원과 목장이 마련되어 있다.
수인은 그 자체로 뛰어난 약초꾼이기도 했으니, 특별한 시약이 필요한 연금술사와 영약을 만들고자 하는 약사 역시 거래를 요청해 왔다.
등반가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NPC 사이에서는 모르는 자가 없는 곳.
동시에 64층에 위치해 등반가들이 거친 적이 많지 않은 곳.
대림원에 손님이 찾아왔다.
동족의 시체를 가지고.
늑대 수인 베히가.
대림원 내에서 평판 좋던 인물이었기에 몰려든 수인이 많았다.
바쁘게 일하던 이들도 잠시 농기구와 무기를 내려두고 대림원 4번 마을 입구로 모였다.
늑대 수인이 주로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이게 무슨… 베히가가 이렇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술 한잔했었건만.”
한 마디씩 중얼거리는 이들.
입을 가리면서도 눈으로는 베히가의 시신을 훑었다.
이들 역시 탑을 오르던 이들.
비록 탑에 갇혀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나, 칼은 칼날이 닳아도 칼이었다.
상처를 살피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늠하는 건 본능적인 일.
“살해당한 거군.”
누군가 말했고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살해.
안 그래도 늑대 수인 무리는 동족을 아끼는 경향이 강했다.
각자의 털을 뽐내던 이들의 눈빛에 살의가 깃들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 확신했다.
그게 누가 되었든 베히가를 죽인 이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내 이름은 히포토스라네. 늑대 부족의 대표지.”
인파를 가르고 늑대 수인 한 명이 조현수에게 다가왔다.
건장한 이들보다는 작은 키.
나이가 있는지 털 곳곳이 하얗게 셌지만 감히 덤빌 수 없는 묵직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감돌았다.
모르토의 어설픈 야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제된 흉폭함.
“베히가의 시신을 수습해 줘서 고맙네.”
“이블아이입니다.”
조현수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지 굳은살이 잔뜩 붙어 있는 손이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그래도 이렇게 돌아와 기쁠 따름이군. 방치됐다면 몬스터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히포토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아끼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슬픔은 슬픔으로 가게 놔두며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단순한 예의치레는 아니었다.
“수인에 대해 잘 아나? 우리 예법에 따라 시신을 수습했는데.”
히포토스가 시선을 내려 베히가를 바라봤다.
가지런히 모은 손. 편히 뻗은 다리.
하얀 나뭇가지가 입에 물려 있었다. 얼굴은 피로 붉었다.
늑대 부족은 죽은 자에게 하얀 나뭇가지를 물린다. 전사라면 얼굴을 피로 붉게 물들이는 것이 관례. 이방인이 알 리가 없는 문화였다.
히포토스의 눈이 호감과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조현수는 말을 아꼈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 모르토와 짠 계획 중 첫 번째. 그들의 방식에 맞춰 호감을 얻는다.
“한 수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조현수가 슬며시 그의 손을 놓으며 다음 작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