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표지판 뒷면
달칸의 몸이 일렁인다. 시커먼 불길 암염暗炎.
내가 잘 아는 능력이다. 이미 한 번 겪어 봤으니까.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몸이 불탈 것 같다. 공방 일체. 거기에 하나 더.
‘저걸로 몸을 회복했었어.’
정확히는 회복이 아니다. 파괴된 몸 일부를 암염으로 대체하는 형식으로 싸웠었지.
당시에는 봉인이 2개만 풀려서 온전한 힘을 쓰지 못했을 거다.
지금은 더 강력한 효과를 낼지도 모르지. 그 외에 신경 쓸 만한 건…….
‘저 녀석 원래 입에서도 불꽃이 나왔었나?’
잇몸을 보이며 으르렁거리는 놈의 입가에서도 암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암흑의 불길이 감도는 느낌.
이건 직접 찔러 봐야 알겠는데.
“크르르르르.”
달칸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 신중한 모습.
코에 전기가 통하니 짜릿하기는 했나 봐?
툭.
놈이 콧잔등을 긁자 코에 꽂혔던 뇌봉참검이 떨어진다. 검날이 상했다. 수리 없이 사용하면 오래지 않아 부러질 수준.
확실히 몸뚱이가 단단하다.
-차캉
난 다시 혼돈검을 꺼냈다. 놈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할 터.
애초에 혼돈의 파편을 잡기 위해 놈의 부산물로 만든 물건이다. 단단한 것으로만 따지면 그 무엇보다도 단단했다.
아무리 험하게 써도 부러지지 않는 검. 지금 상황에 딱 알맞았다.
-콰앙!
자세를 낮춘 달칸이 폭발적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피지컬로는 밀린다. 아무리 나라도 저만한 덩치를 정면에서 감당하기는 버겁다.
게다가 이 녀석은…….
-카가가가가각!
탄력적이고 유연하다.
급격히 방향을 비틀어 날아오는 일격.
“어딜!”
몸을 날린 후 날아온 앞발을 쳐 냈다. 반동을 못 이기고 땅에 처박혔으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발을 박차고 자리를 이동했다.
-쾅! 콰앙! 콰아아앙!
연달아 내리 찍히는 다리. 땅이 흔들리고 파편이 튀어 올라 시야를 가린다.
아무리 나라도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큽! 크흡!”
[독자무강獨者武强 (S) Lv.5]
[강철의 의지 (S) Lv.4]
[강체强體 (S) Lv.5]
[물리 공격 내성 (S) Lv.4]
버프와 보호 스킬이 발동됐음에도 둔중한 충격이 온몸을 두들겼다.
몸이 깨져버릴 거 같다. 갑옷도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이것만 해도 정신이 나갈 거 같은데.
“크하아아앙!”
기습적으로 내민 주둥이가 쩍 벌어진다.
물어뜯으려는 건가.
당할 수만은 없지.
“이거나 먹어!”
[파이어 밤 (S) Lv.8]
[스킬 레벨업!]
[파이어 밤 (S) Lv.9]
-콰과과과광!
망설이지 않고 아가리에 파이어 밤을 날려 줬다. 레벨이 오르며 파괴력이 상승.
아무리 놈이라도 데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게 분명했는데.
[폭식 (S)]
“뭣!”
놈이 그대로 폭발을 집어삼켰다.
폭식. 아는 능력이다. 덕춘이도 같은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디다 쓰는 건가 싶었더니 아무거나 먹어 치우는 능력이었던 건가.
-콰득!
폭발의 데미지를 입지 않은 달칸이 나를 집어삼켰다.
-쿠화아악!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닫힌 아가리 안에서 암염이 소용돌이쳤으니 그야말로 어두운 불길의 향연. 지옥에서나 볼법한 파괴의 현장이었다.
[안개 질주 (S) Lv.2]
이 스킬이 아니었다면 바로 녹아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안개화한 난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안개 질주는 무적기지만 유지 시간이 짧았고, 놈의 입안는 여전히 불길이 맴돌고 있다.
굳게 다물어 입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여의치 않다.
그렇다면…….
-스아아아아아!
난 안쪽으로 이동했다. 목구멍? 안된다. 고유 능력 폭식이 있다.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배 속에 들어갈 수는 없지.
내가 노리는 건 비강.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망자귀환 (AAA) Lv.9]
-꾸구구구국!
입과 콧구멍이 연결되는 공간으로 이동하기가 무섭게 안개화가 풀렸다. 망설일 것도 없이 버프를 둘렀다.
아무리 커다란 달칸이라도 성인 남성이 있을 만큼 비강이 넓지는 않다.
그럼 넓혀 줘야지.
[파이어 밤 (S) Lv.9]
-콰아아아아앙!
“크하아아악!”
강렬한 고통에 달칸이 몸을 흔든다. 아직이다.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으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영혼 찢기 (S) Lv.5]
-찌이이이익!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발광이 거세졌다.
영혼에 직접 타격을 준 만큼 단단한 육체를 지닌 녀석이라도 별수 없겠지. 물론 임시방편이라는 건 안다.
달칸은 영물. 타락한 영물인 쌍두귀도 영격을 이용해 잘려 나간 영혼을 수복했다.
온전한 영물인 달칸이라고 다를까.
그 전에 확실히 마무리를…….
-화르르륵!
고통을 견디다 못한 달칸이 코로 불길을 토해 냈다.
“이런 무식한 놈이!”
거센 불길이 나를 콧구멍 밖으로 밀어냈다. 놈의 코도 갑옷에 긁혀 찢어졌지만 놈은 개의치 않았다.
최대한 안에서 버티면서 뇌를 찌르려 했건만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크르르르륵!”
분노한 달칸의 코와 왼쪽 눈이 암염으로 뒤덮여 있다.
더욱 흉악해진 몰골. 놈의 볼이 부푼다.
저거 설마 그건가?
용종 계열의 시그니처.
브레스.
[연옥 불세례 (SSS)]
-푸화아아아악!
“늑대가 뭔 브레스냐고!”
등급도 제정신이 아니다. SSS급?
메스토카가 사용하던 스타 버스트도 SS급이었다.
아니, 이게 당연한 건가. 메스토카는 영물도 되지 못했다, 이놈은 영물이고.
잡생각 할 때가 아니다.
전방을 향해 쏟아지는 검은 불세례.
광범위하다. 주변 모든 것이 녹는다. 티끌만 한 불똥도 덩치를 키우며 모든 것을 태운다.
검게 죽었던 하늘과 풍경이 열기에 일그러진다.
보이는 것이라고 불과 아지랑이.
그리고…….
“무지개 반사아아아!”
[무지개 반사 (S)]
번쩍이는 여섯 색깔 빛줄기.
펠라인 세트 스킬을 발동시키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무지개 반사의 효과.
[무지개 반사 (S)]
-SSS급 스킬의 경우 3퍼센트의 확률로 반사합니다.
-크게 스킬 이름을 외치면 반사할 확률이 올라갈지도?
크게 외치면 반사할 확률이 올라간다.
놈이 사용한 연옥의 불세례는 SSS급. 고작 3퍼센트에 모든 걸 맡길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여야 한다.
그런 내 마음이 통한 걸까.
[행운 스텟이 반응합니다!]
[반사에 성공합니다!]
-파아아아아악!
불길이 방향을 틀었다.
역으로 불길이 달칸을 집어삼킨다.
“키하아아악!”
“그그그그가가!”
“크에에에엑!”
범위에 휘말린 몬스터들 역시 괴성과 함께 증발한다.
비단 몬스터 뿐일까, 불길에 닿는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빛조차 내지 않고 타오르는 불길. 바위가 녹아내리고 나무는 재가되어 날아올랐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칠흑의 불은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갔고.
“워후.”
삽시간에 일대를 넘어 산 전체를 불모지로 만들었다.
기세는 사그라들었으나 잔불은 남아 있다. 잔불마저도 탐욕스럽게 달라붙어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
닿으면 꺼지지 않는 불길.
이게 SSS급 스킬의 위력인가.
도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건물이고 사람이고 모조리 타 버렸겠지. 국가적 위기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
고작 60층대를 오르고 S급이라 불리는 이들이 막을 수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두 번 막으라면 못 막을 거 같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말 그대로 행운 스텟 덕에 살았다.
물론 타들어 갔어도 구사일생이 있으니 한 번은 버텼겠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이다.
“그에에.”
“덕춘아!”
혹시 휘말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슈퍼 프로그 덕춘이는 재주껏 살아 돌아왔다.
덕춘이와 나는 연결되어 있는 상태. 내 생각을 읽는 만큼 미리 대비를 했겠지.
그보다…….
“얘 어디 갔냐.”
“궤에?”
달칸이 사라졌다.
설마 죽은 건가?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여전히 65층은 어둡다.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 달아나는 녀석이 보인다.
달칸이 도망친다고? 이건 예상도 못 했는데.
데미지를 많이 입은 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쫓아야 하는지 고민하던 때.
[여명의 오망성이 발휘됩니다.]
[짧은 낮이 찾아옵니다.]
[남은 시간- 3:59:57]
-파아아앗.
언덕에서 보았던 빛이 연결되더니 오망성을 만들었다.
하늘을 향해 쏘아지는 빛.
어두운 하늘이 점차 밝아진다. 구름이 걷히고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
“진짜 마법진이었군.”
달칸이 자리를 피한 이유가 이거였나. 생각해 보면 9층에서도 달칸은 낮에 활동하지 않았다.
밤의 영물이라 그런가. 이미 놈의 모습은 사라진 상태.
난 맥이 빠지는 걸 느꼈다.
뒤늦게 찾아오는 통증. 싸울 때는 엔돌핀이 돌아서 아픈 줄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놈의 불길에 노출되며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피부 일부가 녹아내리고 땅에 처박히면서 속이 뒤집혔다.
천천히 몸을 숙여 뇌봉참검을 회수했다.
“준비를 더 해야 해.”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무지개 반사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당했을 테니까.
게다가 내가 느끼기에 달칸은 아직 모든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달칸은 분노에 눈이 뒤집혀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놈이 아니다. 조금씩 수준을 높혀 가며 전투를 즐길 줄 아는 놈이지.
이번 싸움은 전초전이라 생각하자.
-절그럭
난 몸을 이끌고 오망성이 빛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에에.”
“땡큐.”
덕춘이가 목을 핥으며 회복을 걸어주는 건 덤.
조금씩 컨디션이 돌아온다.
낮이 유지되는 시간은 4시간. 그 안에 준비를 마쳐야 한다. 밤은 다시 돌아올 것이고 놈은 나를 추적할 테니까.
* * *
30분 정도 걷자 오망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마법진. 중앙에 화살표가 그려진 팻말이 박혀 있다. 밑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세 번째 여명의 오망성]
[영원한 밤의 영역을 벗어나 빛의 도시로 향하라.]
“이정표였군.”
아무래도 달칸은 영역을 두고 살아가는 모양.
하긴, 아무리 영물이라지만 전 세계를 밤으로 물들일 능력은 없겠지.
이제야 알겠다. 여명의 오망성이 있는 이유를.
65층을 클리어하는 방법은 달칸을 물리치는 게 아니다. 여명이 밝은 4시간 동안 이정표를 따라 움직여 놈의 영역을 벗어나는 거지.
내가 있는 곳은 3번 마법진. 1번도 있고, 2번도 있다는 거겠지. 4번이나 5번도 있을지 모르고.
아마 화살표 방향을 따라가면 또 다른 오망성이 나오지 싶다. 거기서 또다시 다음 오망성으로 이동.
그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다.
‘어쩐지 마을이 안 보이더라.’
이미 65층의 주민들은 빛의 도시라 불리는 곳에 있는 모양.
난 머리를 긁적였다.
60층치고는 굉장히 친절하다.
수상하리만큼.
미간을 찌푸렸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곳에서 다시 달칸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이정표를 따라 이동할 것인가.
-끼릭
팻말에 손을 얹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팻말에서 쇳소리가 난다.
나무로 되어 있었다면 진작에 부서졌겠지.
이상하군.
“왜 달칸은 이걸 놔둔 거지?”
낮을 부르는 오망성.
밤이었을 때 파괴했어도 되지 않나? 달칸은 멍청이가 아니다. 패기로운 동시에 영악한 면모를 가지고 있지.
몬스터를 부려 체력을 깎는 것만 해도 그렇다.
일단 쉬자.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난 팻말 옆에 주저앉았고.
“음?”
팻말의 뒤편, 누군가 날카로운 걸로 긁어 적은 듯한 또 다른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미간을 좁혔다.
흙이 달라붙고 팻말이 녹슬어 희미했지만 분명했다.
뒤편에 적힌 단어는 영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