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75층 클리어
허공에 생성된 홀로그램. 지금까지 본 적 없던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의 메시지.
[멸망화 지수- 90/100]
멸망되었다고 판단되는 기준이 있는 것인가.
저 메시지가 떠오른 건 막바지에 들어서이고?
90점이 된 시점에 메시지가 떠오르는 걸지도 몰랐다.
놈이 타이밍을 아는 것은…….
‘이미 여러 번 겪어 봤기 때문이고.’
얼굴을 찌푸리며 하늘을 바라본 건 나뿐만이 아니다. 멤버들도 마찬가지.
그저 멸망하고 있구나 하면서 인지하고 있는 것과 객관적인 수치로 통보받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 멸망화 지수라는 것이 늘어나기만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겪어 본 적도 없거니와 겪고 살아남은 세계가 있는지도 의문이니까.
중요한 건.
‘어디서 일이 꼬인 거지?’
저렇게 될 때까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는 것.
히든 가든에 넘어온 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나?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는 건가.
머리가 복잡해지는 가운데 탑 숭배자 히메니아를 따르는 자들 또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릎을 꿇었다.
“오오오! 구원의 때가 됐다!”
“히메니아 님을 따라 탑으로 들어가는 거야!”
“어차피 망한 세상. 새로운 터전을 만들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마, 맞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탑에서 살아가면 되잖아!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지도 몰라!”
구원의 길.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예비 탑 숭배자인 것인가.
권능을 발휘했다.
유독 사람들을 독려하며 감정을 부추기는 바람잡이들.
[에볼린]
-탑 숭배자.
-브론즈 등급입니다.
[긱 픽센]
-탑 숭배자.
-브론즈 등급입니다.
.
.
.
저놈들은 이미 탑 숭배자다.
처음부터 숭배자였던 건지, 이때를 기점으로 숭배자가 되어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멸망한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 등반가들, 열심히 발버둥 쳐라.”
[멸망화 지수- 91/100]
[멸망화 지수- 92/100]
.
.
.
지금 이 순간에도 멸망화 지수가 올라가고 있다는 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무력한가.”
히메니아가 나직이 물었다.
무력하냐고? 답답하기는 하다. 뭔가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어떤 걸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너희는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 냈지. 다른 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허공에 떠오른 그가 저 멀리 시선을 던진다.
세계숲이 있는 방향. 히메니아의 시선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그때 세계숲을 내주었다면 결과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대로의 의미다.”
촤악.
그가 팔을 벌렸다.
이어 그를 따르는 군중을 내려다봤으니.
“너희는 세계수를 지켰고 인류는 살 터전을 잃었다! 최후에 최후의 도전마저도 실패했지. 만족하는가? 그들을 지켜서 다행이라 생각하는가?”
그가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인류의 배반자여.”
인류의 배반자.
침입자 중 한 명도 그런 말을 했었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시나리오, 피로 물든 세계수.
첫 번째 챕터. 눈의 정령의 아이들.
그게 뜻하던 건.
‘세계에 남는 이들이 그들뿐이라는 거였어.’
그렇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대침공.
인류가 세상을 버리면 남아 있는 건 세계숲에 있는 엘프와 드루이드뿐이다.
대규모 침공은 마지막 발악이었으며, 두 번째 챕터로 넘어온 지금 이 세계는 멸망에 접어들고 있다.
폐쇄적으로 있던 히든 가든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고.
잠깐만…….
그럼 실종되던 엘프와 드루이드들은?
살아남은 자들이 이곳으로 모였다면 그들은 누가 해친 것인가.
섬뜩한 생각이 떠오르는 찰나.
“때가 됐군.”
히메니아가 차분한 어조로 읊조렸다.
“너희는 실패했다. 이미 세계수는 너무 많은 피를 마셨어.”
[멸망화 지수- 95/100]
[세계가 멸망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95점을 기점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
구원의 길에 모인 이들의 눈앞에 어지럽게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NPC가 되겠습니까?]
[당신의 업적은 안전지대에 진입하기에 충분합니다.]
[새로운 조건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NPC 대기 인원으로 분류됩니다.]
[업적 부족! 40층대에 배치됩니다.]
[탑 숭배자는 혜택과 불이익을 받습니다.]
.
.
.
원래라면 개인에게만 보여야 할 메시지였지만 권능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모두 보였다.
사람마다 주어지는 선택지가 다르다.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고 특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기 인원으로 밀려나는 이도 존재했으니.
탑에서 이룬 업적은 NPC가 되어 돌아갔을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뜻이겠지.
반면에.
“아,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런 선택지도 받지 못한 이들도 존재했다.
상위층에 오르지 못한 이들. 그리고…….
[NPC 부적격]
[탑에서의 유의미한 활동이 없습니다.]
[기댓값 기준 미달.]
[당신은 탑에 쓸모가 없습니다.]
탑 자체에서 NPC로 데려오기를 거부하는 이들.
저 기준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유의미한 활동이 없다는 걸 봐서는 그거라고 봐야 한다.
상위층에 올라와서도 별다른 활약 없이 시간을 보낸 이들.
누군가는 분노했고, 어떤 이는 흐느꼈다.
절망에 빠진 이들은 소수였으며 나름의 선별 과정을 거쳐 서열을 정한 이들은 열기를 띠었으니.
“너희, 심장이……!”
[NPC가 되신 걸 축하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얻길 바랍니다.]
[담보로 심장을 가져갑니다.]
-파스스스스
NPC가 되기로 결정한 이들의 가슴에서 푸른 불꽃이 퍼졌다.
NPC의 상징과도 같은 그것, 블루 하트.
심장을 담보로 탑에 종속되었다는 증거.
“잘 있거라, 어리석은 이들아.”
히메니아가 나와 멤버들을 훑더니 양팔을 벌렸다.
“무너진 세상을 뒤로하고 영생을 찾아라!”
“와아아아아아!”
“가자아아아아!”
그의 외침에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
그에 화답하듯 하늘이 열렸다.
하늘을 찢고 나타난 공간. 난 처음으로 탑의 실체를 볼 수 있었고.
[정신 보호 (SSS) Lv.3]
나를 보호하기 위해 정신 보호가 활성화됐다.
“오오.”
“탑이시여.”
숭배자들이 무릎을 꿇는다.
시커먼 우주 속 홀로 존재하는 탑의 존재.
의지를 가진 것처럼 나를 마주하는 시선이 전신을 꿰뚫는다.
한없이 거대하며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감.
피륙을 벗어나 순리와도 같은 관념적인 영역까지 도달한 세상의 법칙.
자아라는 가치마저 티끌로 만들어 버리는 압도적인 실체화된 탑은 그 자체로 경외였고 두려움이었으며…….
‘기다려. 어떻게든 올라갈 거니까.’
결국에는 도전에 이겨 내야 할 대상이었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쳐들었다.
탑의 몸통을 넘어 꼭대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탑을 응시합니다.]
【탑의 두 의지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히든 퀘스트 클리어를 응원합니다.】
머리로 직접 울리는 메시지… 음.
그 자체만으로도 영혼이 깎이는 울렁거림이 느껴졌으나.
[‘정신 보호 (SSS) Lv.3’가 충격을 완화합니다!]
[혼돈 수치가 충격을 완화합니다!]
[루나티스의 안배가 충격을 완화합니다!]
[카오스 개구리(덕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카오스 개구리(덕춘)가 충격 일부를 부담합니다!]
코피가 터지는 것 정도로 끝이 났다.
아, 골이 띵하네.
것보다 루나티스의 안배라면.
‘별을 주시하는 눈을 말하는 거군.’
그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권능이 이거니까.
대체 탑이란 무엇인가.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걸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히든 퀘스트를 받아서? 생각하면 이것도 이상하다.
탑이 생기고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나처럼 1층을 돌아다닌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리가 있나.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길드 소속이나 탈모맨 같은 실력자들은 각성 전에도 고블린 정도는 우습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분명히 탑의 형상이건만 시선이 느껴진다. 온화했다가 광폭해지기를 반복하는 시선.
-사아아아아
이내 허공에 뚫린 공간이 아물며 탑의 모습이 사라졌고.
“아.”
한곳에 모여 있던 이들의 모습 또한 사라졌다.
[75층 클리어]
* * *
암전.
세상이 멀어지며 어두운 공간에 들어섰다.
75층이 끝났다.
영화관처럼 떠오른 화면에 선택지를 받지 못한 이들이 절규하는 것이 보였다.
절망에 빠진 이들이 분노했고, 분노는 폭력이 되었으며, 남겨진 자들은 빠르게 서로를 죽여 나갔다.
그때마다 멸망화 지수가 조금씩 늘어났다.
숭배자들이 인원을 선별하며 경쟁자를 죽인 이유도 저 때문이겠지. 멸망을 앞당기기 위함.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들은 알까, 실제로는 본인들도 선택받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곳은 탑 안이다.
70층대는 멸망 중인 세계가 테마.
과거의 일을 재현하는 곳이었으며 아마 저들은…….
‘제대로 된 역할을 받을 수도 없을 정도로 업적을 쌓지 못한 거겠지.’
이쪽 세계에 있는 이들 전원이 그런 걸까?
그럼 아이들과 노인은? 그들도 모두 상위층까지 올라서 70층대에 있다는 건가.
말이 되나? 모르겠다. 망할 탑은 뭐 하나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는다.
-털썩
전송 대기실에 마련된 1인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다. 탑의 메시지를 직접 듣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충격이라.
후우. 길게 숨을 내뱉었다.
“탑 숭배자가 왜 생기는지 대충은 알 거 같군.”
고대 인류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을 신격화한 것과 마찬가지.
심지어 본인들의 세계가 멸망에 접어들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됐다. 이런 건 궁금하지 않다. 겪고 싶지도 않고.
멤버들은 괜찮을지 모르겠다. 나도 경황이 없어서 못 챙겼는데.
알아서 잘 넘어갔으리라 믿을 뿐이다.
-촤르르르륵
정신적인 피로감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동안에도 화면 속 영상은 계속해서 지나갔다.
줌아웃 된 시야.
문명이 있던 자리를 몬스터가 차지했으며, 살아남은 종족들은 어떻게든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뭐야.”
내가 있던 세계숲, 그곳이 보였다.
안에 있을 때와 멀리서 바라봤을 때 느낌이 전혀 다르다.
아니다, 이건 느낌이 다른 게 아니라.
“숲이 마경화됐잖아.”
“그에에.”
드루이드가 있는 서쪽과 외곽에만 마경화를 했었는데 지금은 세계숲 절반 이상이 마경화됐다.
-촤르르르르
화면이 바뀐다.
세계숲 내부.
이 세계의 주민 대부분이 사라지고 생존자들이 NPC가 되어 탑으로 들어간 시점, 엘프와 드루이드는 여전히 세계숲에 있었다.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크리쳐, 괴목… 역시 이거였나.”
탑 숭배자 히메니아가 했던 말.
세계수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마셨다.
광폭화된 크리쳐가 이성을 잃고 레인저와 기동 타격대를 공격한다.
괴목이 영역을 확대하며 숲이 미쳐 돌아갔으며, 숲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엘프들이 줄줄이 쓰러진다.
거대한 나무 기둥을 내려쳐 짓이기기까지.
그렇게 남긴 상처는 실종자들의 시신과 같았다.
미약하게 들었던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고.
-사라라라라
모든 장면이 지나간 화면 속.
[챕터Ⅱ- 정령을 잃은 세대 종료]
두 번째 챕터의 제목이 드러났다.
[혼돈 수치 +3점]
[76층에 진입합니다.]
이제 남은 챕터는 하나.
난 어떻게든 단서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고.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멈춰 버린 화면 속. 흐릿하게 보이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아아앗!
시야가 바뀌었다.